Let’s Take a Bath Together, Duke! RAW novel - Chapter 49
49화
“오랜만이구나.”
“으응?”
“네가 이렇게 시원하게 웃으면서 즐거워하는 모습, 정말 오랜만에 봐.”
한 손으로 물에 젖은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언니가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 손짓에서 여러 감정이 느껴지는 듯해서 나는 잠시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내가 그렇게 잘 안 웃었던가?”
“온전히 즐기면서 웃는 걸 말하는 거라면, 응. 다시 눈을 뜬 이후로는 그랬지. 아직 생생하단다. 밥을 먹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들어하던 네가. 눈가가 발갛지 않은 날이 더 적었었지.”
으으음, 그랬나?
언니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던 것도 같다.
내 일인데도 두루뭉술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힘든 건은 대체로 잊어버리는 성격이라서 그렇다. 그때의 감정만 남기고 흐릿하게 덧칠해 버리듯이.
‘여러모로 혼란스러워하긴 했지.’
괴로웠다는 생각만 가득한 가운데,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딱 하나였다. 신전 기도실 한구석에서 울다가 정신을 잃었던 경험.
‘다정하던 아이작이 처음으로 얼굴을 굳혔던 때라 기억나.’
착한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섭다더니, 나는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차가운 얼굴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금세 예전처럼 돌아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달튼 자작님도 대단하네.’
아이작 달튼은 내가 신전에서 정신을 잃은 이후 지극정성으로 나를 살폈다. 공작 영애임에도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공간에서 요양할 수 있도록 도운 것도 그였다. 덕분에 얼굴을 비쳐야 하는 일들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지.
아마 여기가 사랑이 넘치는 로맨스 판타지 세계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이작이 전형적인 서브 남주 상이 아니었다면 분명 나도 착각했을 것이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헷갈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냥 착각한 거야. 아이작 달튼의 투철한 직업 정신과 모두에게 친절한 성격 때문에 말이야.’
클로드 카르테인의 그 오묘한 분위기도 알아챈 나인데, 아이작 달튼이라고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일전에 줄리엔이 의사 선생님에 대해 뭔가 말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사람의 성정이라면,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조만간 그를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물속으로 몸을 더 깊게 담갔다.
오랜만에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자니, 괜스레 기도실 바닥의 감촉과 신전 특유의 향냄새가 나는 듯해서였다. 찬 기운에 가볍게 떨리던 어깨 위로 온천의 온기가 뒤덮였다.
그렇게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완전히 감쌀 때쯤, 아르웬 언니가 나와 맞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손길로 볼에 붙어 있던 내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멋쩍게 웃는 걸 보니 또 다른 생각을 하는 모양이구나.”
“아하하!”
“궁금하네. 대체 카르테인 공작의 무엇이 네 웃음을 되돌리고 활력을 북돋웠을까.”
“음, 그건…….”
내가 뭐라고 둘러댈까 고민하던 찰나,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언니가 말을 가로챘다.
“혹시라도 사랑이라는 말을 할 거면 그만둬. 내가 카르테인 공작을 질투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농담도. 언니가 공작님을 질투할 이유가 뭐가 있어.”
“있어.”
언니는 진심이라는 듯이 가볍게 혀를 차며 서늘한 눈빛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클로드와 루핀이 있을 다르홀 온천의 방향이었다.
예리함이 서린 푸른 눈과 물방울이 굴러떨어지는 매끄러운 턱선. 어느 로맨스 소설의 남자 주인공보다도 수려한 그녀가 작게 헛웃음을 쳤다.
“…언제는 나디아의 고백을 덮는 게 피차 귀찮지 않을 거라며, 표정 하나 안 바꾸더니.”
“응? 언니,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야. 그냥 혼잣말.”
“아…하?”
언제 서늘한 시선을 보냈냐는 듯 다정하게 내 볼을 다독인 언니가 천천히 몸에 힘을 풀었다.
아무래도 온천에 적응이 된 모양이다. 언니는 물에 젖어 한쪽 어깨로 쏠린 얇은 네글리제를 추켜 입더니 근처의 적당한 바위를 찾아 그 위에 앉았다.
고요하고도 평온한 공간 속에서 새의 지저귐이나 물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눈을 감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녀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눈을 뜬 채 나지막이 말했다.
“처음에는 정말로 내키지 않았는데, 내가 생각을 잘못한 모양이구나. 여긴 몸과 마음을 단련하기 좋은 곳이군. 수양을 위한 장소로 탁월해.”
“…어?”
“이 주위로 모이는 기운의 양이 꽤 많아. 왜 ‘치유의 물’이나 ‘신의 축복’이라는 말이 붙었는지 알 만큼.”
갑작스러운 칭찬에 몸을 움찔하던 것도 잠시, 입이 먼저 언니의 말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다분히 본능적인 대처였다.
“어, 어! 그렇지? 이렇게 따뜻한 물속에서 몸 씻는 거, 언니가 보기에도 나쁘지 않지! 병이랑은 좀 거리가 있을 것 같지 않아? 상쾌한 기분도 들고, 도리어 건강해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잖아!”
“건강이라…….”
다소 강요에 가까운 내 말에 잠시 입을 다문 언니가 시선을 내려 온천의 물을 가만히 응시했다. 손으로 물을 떠보기도, 코에 가져다 대 냄새를 맡아보기도 한 그녀가 내게 재차 물었다.
“나디아, 하나만 물어보자. 정말로 신께서 축복을 내린 거니? 이 치유의 물이 정말로 네 몸을 더 건강하게 하고 영혼의 안정을 도왔어?”
나는 그렇게 묻는 언니의 눈에서 복잡한 감정들을 읽었다.
언니의 눈에는 그렇게라도 내가 건강해지고 안정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그게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뒤엉켜 있었다.
그럴 수 있지. 소문이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었으니까. 나와 카르테인 공작의 결합, 그리고 기적의 나눔을 내세워 축복을 받지 않았나.
언니로서는 상당한 고민이 생길 것이다. 내가 나아지고 있는 게 정말 축복 덕이라면, 나를 북부에 놔둬야 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나디아.”
“언니, 나를 봐.”
내가 늘 강인하다고 느끼는 아르웬 언니의 푸른 눈이 나를 고스란히 담았다. 나는 바위에 걸터앉은 언니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등 위로 재차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화사한 미소를.
아르웬 언니의 눈이 커지고 입술이 잘게 떨리는 모습이 선연했다.
“우선, 고맙다는 말부터 할게. 물론 그럴 정신이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언니나 루핀을 보고 인사도 안 했더라고. 내가.”
“…….”
“소문을 듣고 이렇게 단박에 달려와 줘서, 나를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 줘서 고마워. 언니와 루핀이 어떤 마음으로 카르테인 공작가에 들이닥쳤는지 알아.”
“…….”
두 사람은 분명 가문 간의 전쟁도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왔을 것이다. 그건 곧 부모님의 의지이기도 했겠지.
그렇지 않고서는 나를 확인하겠답시고 그런 무례들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는 루핀답지 않게 적극적이었던 그의 태도를 떠올리며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언니, 난 정말로 북부가 좋아. ‘사랑’까지는 솔직히 과장이기는 하지만, 카르테인 공작님도 좋아해.”
“…여긴 네가 있기에 너무 험난하고 척박한 곳이야, 나디아. 부요의 시기가 지나면 북부에는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 오지. 마수들도 들끓고. 수도가 너무 부담스럽다면 차라리 우리 영지에…….”
“그게 아니야. 북부라서 좋아. 그치지 않는 바람도 좋고, 건조한 기후도 마음에 들어.”
냄새가 다른 곳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적게 나거든. 나는 미처 언니에게 전달할 수 없는 본심은 조용히 삼킨 후, 전할 수 있는 다른 본심을 꺼내 들었다.
“이상하지? 왜인지 여기에 있으면 살아있는 기분이 들어.”
“…….”
“골드게이트가 내게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곳이라면, 언제고 내 자랑이자 제일 큰 방패로 내세울 곳이라면 카르테인은 내가 뿌리를 내려야 하는 곳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자랑할 만한 곳으로 키우고 싶은, 그런 곳.”
“…카르테인을 ‘키워주고 싶은’ 곳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일 거다.”
“그건… 그래. 으응, 없겠지.”
나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와 함께 언니의 말에 짧게 긍정했다. 카르테인은 내가 키우지 않아도 이미 커다란 북부의 주인인걸.
내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일 때였다. 나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언니가 한순간에 얼굴을 굳히며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촤악, 하고 물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과 동시에 저 멀리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나와 언니의 시선이 마주친 것은 직후의 일이었다. 꼭 욕실에서 화들짝 놀랐던 나와 클로드처럼 우리는 동시에 온천에서 나와 몸 위로 큰 로브를 걸쳐 입었다.
“나디아, 위험하니까 여기에…….”
“여기에 나 혼자 있는 것보다 언니 옆에 붙어 있는 게 더 안전해! 그리고 지금 소리가 난 방향, 다르홀 쪽 아니야? 그럼 더더욱 가야지.”
그쪽에 마법사랑 검사가 둘 다 있는데.
내 말을 들은 언니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채 내 팔을 붙잡았다. 혹시라도 내가 산길을 걷다가 넘어질 경우를 생각한 듯했다.
언니의 곁에 붙어 빠르게 도착한 곳에는 당연하게도 소리를 지른 장본인과 두 남자가 있었다.
“흠, 1차로 퍼트려 놓은 마법은 다 피했네? 어떻게 한 거야?”
“누구냐. 정체를 밝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땅에 엎어져 있는 남자의 위에는 등 뒤로 손을 대고 있는 루핀이, 그리고 그 옆으로는…….
“그, 고, 공작님?”
“나디아?”
옷을 반 정도만 걸쳐 입은, 그래서 내가 마주하기에는 제법 당황스러운 모습의 클로드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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