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ake a Bath Together, Duke! RAW novel - Chapter 8
8화
뛰어난 동체 시력으로 내 입술의 움직임을 읽은 그가 살짝 눈에 힘을 주었다. 가볍게 다물린 입술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어떻게?’
잘생겨서 개연성이 생기긴 했는데, 솔직히 좀 웃겼다. 뭘 어떻게야.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으면서.
‘뭐, 그래도 이해한다.’
다른 거였으면 좀 더 열심히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지 못한 그를 탓했겠는데, 더러운 건 참기 힘들지.
나는 그의 시선에 답을 돌려주는 대신, 꽃을 꽂은 그의 가슴 주머니를 톡톡 정리해 주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가기에는 주위의 시선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다.
“어머!”
“오…….”
주변에서 들리는 작은 탄성을 배경 음악 삼아,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호의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완벽한 리드에 대한 감사 인사예요.”
굳이 ‘리드’라는 단어를 써서 그런가?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흥이다.
‘내 피 같은 첫 번째 비장의 무기가 이렇게 허망하게…….’
꽃 장식은 ‘너는 이런 거 없지?’ 같은 느낌으로 쓰려고 했던 건데. 예기치 않게 미끼 상품을 소모하게 되어 마음이 울적해졌다.
‘아니, 이 정도면 선방했지!’
다 떠나서 적절한 선에서 ‘나 얘한테 호감 있음!’을 보여주지 않았나. 무도회에서 일어나면 안 될 큰 사태를 막기도 했고.
나는 대놓고 구역질하는 카르테인 공작과 그로 인해 처참해졌을 무도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며 진심으로 안도했다.
“짧은 사이에 표정이 꽤 자주 바뀌는군.”
“…네?”
“아니.”
가볍게 내 물음을 자른 그가 시선을 돌려 주위에 몰린 사람들을 응시했다.
“우리가 너무 길게 시간을 끈 것 같은데. 나도 나디아 영애도 사교계는 오랜만이라 들뜬 모양이야.”
자연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한 말에, 주위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담백한 미소를 지은 그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게 가볍게 눈짓을 보냈다.
“그만 자리를 비켜주지. 즐겁게 풍요의 밤을 보내길.”
눈치껏 연주를 시작한 지휘자 덕에 홀 안의 사람들이 서로서로 짝을 짓는 게 보였다. 우리를 향했던 시선 역시 언제 모였었냐는 듯 산산이 흩어진 지 오래다.
‘그야말로 물 흐르듯이 상황이 흘러갔네.’
그리고 이걸 유도한 게 저 남자란 말이지. 나는 힐끗 카르테인 공작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움직이는 모습이 아주 노련했다. 시선의 중심에 서는 것도, 관심을 잡아채는 것도 독보적이었고.
‘과연. 저 정도는 해야 로판 공작 타이틀을 얻나.’
언니의 칭찬으로 차올랐던 자신감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체 여주들은 어떻게 저런 남주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걸까?
다들 애초에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계셨던 건 아니신지. 아니면 빙의할 때 버프라도 받으셨어요?
‘뭐야. 나도 줘요, 그 버프…….’
왜, 왜 나는.
“얼굴이 뚫어질 것 같은데. 언제까지 보고 있을 생각이지?”
“…….”
“고백할 타이밍이라도 재는 건가?”
왜 나만 그런 거 없어.
담담하게 고백 운운하는 공작을 마주하고 있자니 억울함이 더 북받쳤다. 도무지 가망이 보이지 않는 착잡한 상황에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우리 회귀하고 다시 시작할까요? 일단 한 대 후려쳐 봐.”
“…뭐라고?”
“아니, 첫 단추가 잘못된 거 같아서.”
황당함이 담긴 그의 표정을 보며 나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뭐 삶이 다 그렇지. 원하는 대로 굴러가면 그게 인생인가.
“후……. 공작님만큼이나 저도 신경 쓰여서 그랬어요.”
나는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에게 사실을 툭 털어놓았다. 아무리 봐도 준비했던 서프라이즈 대사나 테라스에서의 쌍방 구원 스타일 분위기가 먹힐 것 같지 않아서였다.
마주하고 있던 그의 주황색 눈빛에 흥미가 감도는 것을 느끼며, 나는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나페를 집어 먹고 있는 테일즈 백작의 검은 손톱 때, 제넷 자작 부인의 머리 장식 사이로 보이는 각질, 지금 이 후덥지근한 공간을 은근하게 떠돌고 있는 악취들. 전부 아찔할 정도로 신경 쓰인다고요.”
“…….”
“그래서 말인데, 잠깐 테라스로 안 나갈래요?”
여기서 계속 이야기하기에는 좀.
하나하나 내 입으로 나열하니까 어쩐지 속이 더 부대끼는 기분이다. 애써 흐리게 눈을 뜬 채 무시하던 것도 다시 훤히 보이는 것 같고, 코끝을 맴도는 냄새도…….
‘아, 왜 갑자기 버티기가 힘든가 했더니만 내가 클로드 카르테인한테 준 꽃이 제일 강한 향이 나는 애였네!’
내 보호막을 가지고 갔으면 눈치껏 빨리 움직이자, 북부 공작님아.
허락을 안 하면 혼자라도 나갈 태세를 취하고 있자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탁월한 선택이에요.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도 숨을 참았더니 슬슬 시야가 어질거려서 나는 대충 아무 말이나 던지며 양손으로 치마를 쥐었다. 비어있는 테라스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찰나, 그가 손바닥으로 내 등을 받치며 가볍게 턱짓을 했다.
“이쪽이야.”
그의 큰 보폭을 맞추기 위해 나는 백조처럼 열심히 다리를 움직여야 했지만, 딱히 불만을 표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여기를 벗어날 수 있다면 뭔들 못 하겠어.
얇은 커튼으로 가려진 유리문이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하아…….”
북부 최고다.
코끝을 맴도는 바깥바람이 신선했다. 나는 이 계절에도 서늘함을 머금은 북부의 바람을 느끼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진짜 폐가 쪼그라드는 줄 알았네.
“언제부터 그랬지?”
소설 남주 종족 특성인가? 왜 자꾸 말을 자르는 거야. 나는 짧디짧은 그의 말에서 질문의 뜻을 유추해 내며 입을 열었다.
“어, 일단 크게 앓고 난 이후로 그렇게 되었고요. 괜찮으시면 앞으로 말은 자르지 말고 해주시겠어요?”
“앓고 난 이후라…….”
나는 혼자 생각에 골몰한 클로드 카르테인을 바라보며 슬쩍 눈을 부라렸다. 아니, 이 사람이 춤을 출 때도 나를 기만하더니 진짜?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나디아 골드게이트.
“공작님, 대답.”
BL 소설 속 광공처럼 대답을 종용하는 내 모습에 그가 말없이 또 나를 응시했다.
내가 진짜 광공이면 날 미치게 할 셈으로 대답을 안 하는 거냐고 물었을 텐데, 아쉽게도 내게 그 정도의 항마력은 없었다.
“…이끄시는 군대의 부하분들은 빠릿빠릿 알아들었겠지만, 전 매번 공작님 앞에서 머리를 굴리고 싶지는 않아서요.”
“…영애는 정말……. 아니, 미안하군. 앞으로는 그렇게 하도록 하지.”
“좋아요.”
나는 한결 편한 웃음을 지으며 재차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공작에게 질문이 들어온 것은 딱 내가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그런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나와 같은 걸 느끼는 건가?”
“지금 절 의심하세요?”
공작의 눈빛이 ‘너 나한테 고백했잖아.’라는 뜻을 담은 채 일렁였다.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작게 코웃음을 친 채 주머니에서 끄집어낸 민트 소금 치약을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저건 본래 프러포즈 링 대신 그에게 내밀려고 한 거였는데.
“제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구강 청결제예요. 그리고 유행도 아닌데, 생화로 온몸을 뒤덮은 절 좀 자세히 봐주실래요? 이거 제 보호막이라고요.”
배은망덕한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내 시선 탓일까? 그가 의심 어린 시선을 물린 채 재차 사과를 건넸다.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다시 말을 이었다.
“영애가 나와 같다니 다행이군. 그대에게 목욕이 괴로운 경험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여.”
“신경 쓰고 있었어요?”
“예민을 떨면서 이상하게 구는 쪽은 나인 걸 아니까.”
담담하게 떨어진 그의 대답에 도리어 내 심장이 더 철렁했다. 아니, 어, 음. 이런 말을 들으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는데요! 나는 눈을 도르르 굴리며 빠르게 그의 말을 받았다.
“어……. 그, 그래도 이제 둘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혼자는 고독해도 둘은 외롭지 않답니다?”
내가 공작에게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그도 내게서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다.
급습을 당한 사람처럼 잠시 멈칫하던 그가 한 손으로 느릿하게 입가를 가리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렇군. 뜻밖에 공감자를 얻은 기분이야.”
처음으로 보는 공작의 모습에 잠시 정신을 팔고 있는데, 그 순간 한 번 바닥을 쳤던 직감이 머리를 딱 때리고 지나갔다.
‘잠깐. 기다려 봐, 나디아. 지금 이거… 처음에 계획했던 쌍방 구원 분위기 아니야? 고백하기 좋은 그런 분위기 아니냐고!’
기분 좋은 당혹감에 살짝 굳은 입꼬리, 평소보다 부드러워진 눈!
‘맞네, 맞아!’
삽시간에 목이 탔다. 나는 기회를 포착한 하이에나처럼 공작의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그를 더 찔러 보았다.
“그, 공작님도 주위 시선 때문에 힘드셨겠어요. 저는 목욕의 ‘목’ 자만 꺼내도 난리였는데. 저희 언니 반응 보셨죠?”
“아아, 불같긴 하더군. 그대가 처음에 그렇게 꼬질꼬질했던 게 이해될 만큼.”
“꼬질……. 아, 그 말 들으니까 생각나네. 공작님 그때 저 보고 불결하다고 그러시지 않았어요?”
“그걸 들었나?”
진짜냐. 내가 잘못 들었던 게 아니란 말이야?
순간적으로 힘이 꽉 들어가는 주먹을 의식적으로 펴고 있을 즈음,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리는 사람도 많았고 시선도 꽤 받았지. 다들 내가 환각을 보고 있다 여기는 모양이야.”
“환각?”
“공작이 손과 몸에 피가 묻는 환각을 봐서 자꾸만 씻는 거라고. 나는 오랜 기간 전쟁터에서 굴렀으니까.”
아, 거긴 또 그런……?
나는 일순 기회를 노리던 것도 잊고 입을 틀어막았다. 가슴의 깊은 곳까지 동질감이 찡하게 와닿은 탓이다.
“그거참… 환장할 노릇이네요.”
“영애도 공감 가는 게 있는 모양이지? 특히나 부모님께서 걱정하시더군. 그렇게 매일 목욕을 해서야 결혼할 상대가 있겠느냐고 말이야.”
어?
머릿속으로 톱니바퀴가 끼릭끼릭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이거, 이거 말이야……. 혹시 청혼하기 딱 좋은 타이밍 아니야?
“저, 저요!”
너무나도 적당한 타이밍에 생각보다도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어쩌면 나의 간절함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이 너무나도 간절해지면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게 되는 법이니까.
나는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공작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저와 결혼해요. 나랑 결혼해서 하루에 목욕 두 번씩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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