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ake a Bath Together, Duke! RAW novel - Chapter 83
83화
“…….”
가늘게 뜬 은회색 눈동자가 처음 보았을 때처럼 오묘한 감정을 눈에 담았다. 공작 부인은 나와 클로드, 그리고 탁자 위의 비누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보고는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모두가 나를 놀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너희 다 이상하다는 말을 고상하게 한 그녀가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주 잡은 공작 부인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나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주무르다 갓 준비된 온천수에 천천히 그녀의 손을 담갔다.
“아…….”
절로 튀어나오는 탄성이 꽤 좋은 시작을 알리는 듯해, 나는 조금 더 짙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물의 온도를 만끽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아, 마탑에서 비싼 값 주고 온도 조절 마도구 살 만하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피부에 대기 딱 알맞은 온도가 손끝에서부터 찌르르 퍼지는 느낌이 좋았다.
나는 속으로 마탑의 마도구를 잔뜩 칭찬하면서 기억 속, 비누 매장의 점원이 어떻게 했는지를 잠시 떠올렸다.
분명 상대방의 기분이 좋아질 때를 놓치지 않고 이것저것 제품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지. 나로서는 이 온천수도 제품이니까……. 좋다. 열심히 입을 놀려 보자!
“신의 영역에서 직접 떠 온 온천수예요. 손 전체를 휘감는 물의 감촉이나 온도가 상당히 다르죠. 그래서 담아 온 용기도 신경을 썼어요. 마탑의 온도 조절 마도구를 사용해 그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려고 했답니다.”
“마탑의 마도구?”
“네! 대신관님이 직접 온천에 몸을 담그신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생각 외로 너무 큰 은혜를 받으셔서 병에 온천수라도 담아달라고 하시지 뭔가요. 어떻게 드려야 좋을지 고민하던 차에 마탑이랑 의견이 잘 맞아떨어져서…….”
나는 은근슬쩍 신전과 마탑의 이야기를 꺼내며 부드럽게 옆에 놓인 비누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공작 부인의 손등 위로 조심히 비누를 문질렀다.
거품을 낸다거나 손을 꼼꼼히 씻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누가 가진 특유의 미끈거림을 잘 느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함이었다. 왜? 이게 내 사업이 내걸 간판 제품이니까.
나는 회사의 대표가 자기 제품을 홍보하고 다니듯 성심성의껏 비누의 좋은 점을 늘어놓았다.
“느낌이 어떠세요? 부드럽지 않으신가요? 게다가 제가 방금 써봤을 때는 향도 제법 좋더라고요.”
“음…….”
공작 부인은 아직 물기가 묻은 손의 냄새를 맡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그녀의 표정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처음과 비교했을 때 꽤 풀어진 게 보였기 때문이다.
‘좋아, 향을 자랑하는 건 이 정도로 하고.’
나는 다시 그녀의 손을 온천수에 담그고 본격적으로 비누칠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혼자 자기 손을 문지를 때의 경험을 살려 손 마사지도 조금씩 곁들였다.
“흐음.”
짧게 튀어나온 소리가 제법 긍정적이다. 나는 열심히 손의 구석구석을 누르며 낭랑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나는 다 알고 있다는 티를 내는 거다.
“몸 쪽이 간질간질하지는 않으세요?”
“글쎄, 조금 그런 것도 같구나.”
“뭉쳐있는 걸 풀어줘서 그럴 거예요. 지금은 손이지만, 다음에는 발을 담그는 것도 한번 시도해 보세요. 지금보다 더 기분이 좋으실 거예요. 몸을 다 담그면 더 그럴 거고요. 아마 여독이 단번에 시원하게 풀리실걸요? 타냐, 수건 좀 건네줄래?”
“앗, 네!”
나는 타냐가 건네준 수건을 받아 들고는 공작 부인의 손을 감쌌다. 물기를 깨끗하게 닦아낸 그녀의 손은 처음 만졌을 때와는 다르게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이게 이 로맨스 판타지 세계관에서 만든 비누로 처음 씻은 타인의 손이라고 생각하니 제법 마음이 찡했다.
“다 되었습니다, 에스텔 님.”
공작 부인은 따뜻해진 손을 두어 번 쥐었다가 펴더니 팔을 걷은 나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카르테인 공작이 처음에 나와 대화를 하다가 자주 보였던 시선과 꼭 닮은 눈이었다.
“영애는 참 이상하군.”
그래, 이 말도 비슷하네.
나는 어딘가 익숙한 말을 들으며 살짝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나도 안다. 내가 내 위치에 맞지 않게 움직인 감이 있다는 걸.
‘아, 그런데 어쩌겠어. 또 구구절절 긴 설명을 하는 것보다 이렇게 눈에 보여주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는데.’
사람은 직접 눈으로 보고 겪는 것에 더 마음을 주는 법 아닌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민망한 웃음을 짓고 있자, 내 모습을 가만히 살피던 공작 부인이 처음 나를 만났을 때처럼 가볍게 내 얼굴을 건드렸다.
“영애는 눈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구나.”
“아…….”
“확신을 줄 수 있다고 했지? 그래, 영애가 팔을 걷고 나설 정도로 이 문제에 마음이 있다는 건 잘 알겠어. 그건 영애만이 아니라 클로드를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
공작 부인의 눈에 잠시 온기가 서렸다가 사라졌다. 대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엄격함이었다.
“하지만 나디아, 그대는 아직 카르테인의 보석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
“…….”
언뜻 매섭게 들리는 공작 부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순간적으로 심장이 조였다. 직전까지 했던 말을 번복하는 건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는 뜻 같아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기분이 들어서 잠시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쿵쿵 뛰기 시작하는 내 마음과 달리 공작 부인은 차분하게 말려 올라간 내 소매를 내려주고 있었다.
담담하게 옷소매를 정리해 준 그녀가 나와 다시 시선을 마주하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더 멋대로 굴어도 좋겠어.”
“…….”
“영애가 지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한 것? 카르테인의 보석이 지위에 맞지 않게 굴었다고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지? 나와 이안이 클로드의 목욕을 못마땅해한 건 맞지만, 생각한 바가 있다면 사실 고집을 부려도 괜찮아. 애초에 클로드도…….”
잠시 말을 멈춘 공작 부인이 옆의 클로드를 한 번 바라보고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클로드 저 녀석이 안 하던 짓을 하나 했더니, 영애에게 맞춰 주고 있었군.”
“어, 네?”
안 하던 짓을 해?
그게 무슨 뜻인가 싶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휙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을 마주친 클로드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냥 나디아 그대가 마음을 편하게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 아니, 지금 주제가 그거랑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어?
나는 미묘하게 말을 피하는 듯한 카르테인 공작의 모습에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클로드를 보며 다시 헛웃음을 지은 공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뭐, 일단은 그런 비슷한 거라고 해두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니까.”
…뭐지. 뭔가 나만 빼고 이야기가 정리되는 기분이 든다.
어딘가 찜찜한 기분에 눈을 굴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찰나, 공작 부인이 부드럽게 내 손을 쥐었다. 아직 손에 남은 온기가 서서히 손등 위로 퍼져 나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옅게 미소를 지은 그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나는 영애가 참 마음에 들어. 방금 해준 온천수 체험도.”
“어, 그,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나디아 그대의 말대로 몸도 담가보는 거로 하지. 그때는 클로드 없이 영애와 나 둘이서.”
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냥 여기에서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네! 좋아요! 에스텔 님은 언제가 좋으세요?”
사실 아직도 뭐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결론은 그거잖아. 멋대로 굴어도 괜찮고, 어. 목욕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는, 그런 거.
음, 그럼 일단 된 거 아닐까? 나머지는, 음. 나중에 생각해 보자.
* * *
생각보다 수월하게 상황을 넘기게 되면서 나는 근래 아주 평화롭고 또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나 타냐가 마련해 준 다양한 오일과 비누들을 사용할 수 있는 목욕 시간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재스민, 장미, 캐모마일, 민트……. 거기에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다양한 허브들까지. 헤링본 자작이 나를 미워하는 이유가 사실 타냐를 데리고 갔기 때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타냐는 정말 엄청난 인재였다.
‘안 좋은 부분을 굳이 꼽자면 요즘 들어 핑, 하고 도는 어지럼증이 좀 잦아졌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너무 오래 목욕을 즐겨서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혹시 몰라 달튼 자작을 찾아가 보기도 했는데, 의사 선생도 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했고.
‘괜히 찾아가서 약 잘 먹고 있냐고 잔소리만 들었지.’
그뿐이야? 심지어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야 한다며 양을 더 늘리기까지 했다. 나는 꿈에서도 나올 것 같은 노란색의 약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이제 슬슬 줄리엔이 또 약을 들고 올 때가 됐는데…….’
―똑똑
그래, 이렇게. 나는 작게 신음을 흘리며 느릿하게 문 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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