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02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02화
아니, 이걸로도 부족하다.
왜 그렇게 뤼디거가 나를 좋아하는 것에 관해 설명에 설명을 거듭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말 한마디만으로는 부족해서. 말을 하고, 또 해도 무언가가 아쉬워서.
사랑을 말하는 내 말주변이 너무나도 조악해서.
머릿속으로는 그럴싸한 고백이 있었는데,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모두 허상처럼 사라졌다.
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목소리가 작게 떨리고, 혀가 제 멋대로 움직였다.
내 첫 고백도 이보다 더 떨리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땅에 파묻힌 골동품을 꺼내기 위해 그 위를 덮은 흙을 조심스레 털어내듯,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감히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감정보다 더 사랑한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뤼디거처럼 처음으로 상대에게 가슴이 흔들린 것도 아니고, 내 생애 최초의 사랑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감정이 뒤바뀌는 것은 아니다.
뤼디거의 것과 무게가 다를지언정, 이 감정의 본질은 분명했다.
“저 정말 당신 사랑해요.”
처음 뤼디거는 마치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단어를, 어절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그렇게 한참을 곱씹던 그의 얼굴이 점점 경악스럽게 바뀌었다. 그는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이내 고장 난 시계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당신이 사랑한다고요? 저를 말입니까?”
“네.”
“당신이, 저를?”
“그렇다니까요.”
“…….”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해서 되물었다.
몇 번이나 내가 그렇다 대답을 해주고 나서야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뤼디거의 아랫입술이 이내 바르르 떨렸다.
그의 손이 내 양팔을 움켜쥐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듯 절박한 손짓이었다.
안타까웠던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매만졌다.
그는 마치 고양이가 손에 얼굴을 비비듯, 내 손에 뺨을 온전히 맡긴 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속삭였다.
“맙소사……. 신이시여.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무척 작은 소리였지만, 지금 나는 그의 입술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전쟁터에서도 신을 찾지 않았을 것 같은 남자가 신을 부르짖는다.
그것에 가슴 한켠이 간질간질해진 나는 웃음 띤 채 물었다.
“신에게 소원이라도 비셨던 거예요?”
“아뇨. 하지만 귀족의 의무로 기부는 성실히 했으니, 그에 대한 보답을 주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뤼디거는 내 손에서 얼굴을 떼며 진지하게 답했다.
감격 어린 낯은 그새 평소의 무뚝뚝함으로 돌변해 있었다.
손바닥을 뒤집는 듯한 그 변화와 더불어, 신에 대한 믿음은 전혀 없지만 기부했으니 자신에게 보답을 내려주는 것도 당연하다 믿어 의심치 않는 그 뻔뻔스러움은 내가 아는 뤼디거 그 자체였다.
그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아까의 심각함과 진지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한참을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제야 슬슬 실감이 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뤼디거가 내 손을 와락 부여잡으며 물었다.
“그러면……. 정말입니까, 유디트 씨? 그러면 제 고백을 받아주시는 겁니까? 우리, 미래를 기약해도 되는 겁니까? 제가 당신을 신경 써도 되는 겁니까?”
“정말이고요, 고백 받아줬어요. 미래는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하고, 지금도 충분히 신경 쓰고 계신 것 같지만, 더 쓰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쓰셔도 좋아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뤼디거의 질문에 나는 하나하나 답을 해 주었다.
그가 얼마나 들떠 있는지, 마치 꼬리를 붕붕 회전시키며 달려드는 대형견을 진정시키는 기분이었다.
“이제 마음껏 당신에게 신경 써도 되겠군요. 사실, 당신이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 같아 남들 눈이 있을 때는 정말 많이 자제했습니다.”
그게 자제한 거라고? 정말?
여기저기 대놓고 티를 내고 다닌 게 아니라?
그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나는 의심스레 물었다.
“그렇게 자제한 사람이 빅토리아 왕녀님에게 절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했어요?”
“좋아한다 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저와 유디트 씨가 긴밀한 관계가 되도록 협조를 요청한 것뿐입니다.”
“그게 그 말이잖아요…….”
뻔뻔스러운 뤼디거의 대답에 나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콩깍지가 껴서인지, 이런 뤼디거의 모습도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잔뜩 방을 어질러 놓고는 해맑게 웃는 사고뭉치 대형견 같다고나 할까…….
자꾸 사람을 개에 비교해서 참 그런데, 그렇게밖에 보이질 않으니 참으로 난감했다.
뭐, 딱히 문제가 된 건 아니니 상관없나.
오히려 빅토리아 덕분에 상황 파악을 빨리한 것도 있었다. 다들 선왕의 눈치를 보기 급급해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 덕에 왕녀님께서 저에게 당신의 출입 금지령에 대해 알려주셨으니까요. 왕녀님이 아니었다면 또 몇 날 며칠을 헤맸을 거예요. 일이 잘 풀렸으니 되었죠, 뭐.”
“왕녀에게 협조 요청을 하기는 했지만 쓸모를 잘 몰랐는데. 그래도 보람이 있었군요.”
“하하……. 선왕 전하께서 지금은 감정이 많이 격해져 계시지만……. 제가 열심히 설득해 볼게요. 좀만 더 참아요. 할 수 있죠?”
“노력해 보겠습니다.”
“착해요.”
나는 그리 말하며 뤼디거의 턱을 토닥이듯 만지작거렸다.
맘만 같아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솔직히 너무 높았다.
“당장 같이 있지 못하는 건 좀 아쉽지만, 앞으로 계속 함께하기 위해 해결해야 하는 일이니까.”
“이해합니다. 다만…… 당신과 매일 티타임을 함께했던 때가 꿈같을 뿐입니다.”
“그건 저도 아쉬워요.”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엠덴 마을을 떠난 이후로 계속해서 붙어 있다시피 했는데 갑자기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그새 뤼디거에게 적응한 모양인지, 왕궁에서 있으면서도 그의 빈 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뤼디거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내 손에 조심스레 그의 손을 얽었다. 따듯한 손의 온기가 내 손을 뒤덮었다.
그는 내 두 손을 꼭 부여잡은 채 말했다.
“저는 딱히 결혼에 연연하는 편은 아닙니다. 제 마음이 영원한 이상, 결혼과 같은 제도는 의미 없다는 걸 아니까요. 하지만…….”
뤼디거가 잠시 머뭇거렸다.
나는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에게 붙들린 손이 뜨끈뜨끈했다.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불안합니다. 무척이나 초조해요. 제 마음이 영원한 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력감입니까?”
뤼디거는 답지 않게 무척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기보다, 괜스레 마음 한구석을 자극했다.
내가 지켜줘야 할 거 같고, 챙겨줘야 할 것 같은…….
생각해 보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뻣뻣하다 못해 딱딱한 남자에게 푸딩처럼 몰랑몰랑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게 나 때문이라니.
가슴이 설레지 않는 쪽이 이상했다.
나는 짐짓 태연스레 그를 다독였다.
“왜 불안해요. 당신만 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저도 당신을 좋아하는데요.”
“하지만 당신은 상냥하니까요. 선왕 그 늙은 여우가 당신을 어떤 말로 꾈지……. 약한 척하며 당신의 동정심을 사서 당신을 흔들려고 할 겁니다.”
“느, 늙은 여우…….”
빌어먹을 늙은이에 이어 늙은 여우라니.
선왕에 관한 호칭의 수위가 점점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요?!
게다가 약한 척하며 내 동정심을 흔들려고 하는 건 아무리 봐도 뤼디거, 당신 같은데…….
하지만 굳이 따지진 않았다. 사귀기 시작한 첫날이 아닌가.
분위기가 좋아도 모자랄 시기이니, 나는 너그럽게 그에게 딴지 걸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내가 그러는 사이 한참 무언가를 고뇌하던 뤼디거가 돌연 물었다.
“유디트 씨. 제가 만약 청혼하면, 받아주실 의사가 있으십니까?”
처, 청혼이요?
사귀는 첫날이니 딴지 걸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한 지 30초.
바로 딴지 걸 만한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만 너무하지 않아? 애초에 결혼을 목적으로 한 선 자리에서도 바로 청혼 이야기가 오가진 않겠다!
이 남자 진도 빼는 속도에 잠깐 놀라버렸다.
지난번 프란츠도 다짜고짜 청혼 이야기를 꺼내다니……. 북부 신사들에게 고백과 청혼은 항상 붙어 다니는 건가?
“이왕 온 길에 확실히 하고 싶어서요. 혹시…… 부담스러우십니까?”
자기가 성급하다는 자각은 있는지, 뤼디거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여기까지 눈치가 생긴 게 어디냐 싶기도 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나저나 고백에 청혼까지……. 그는 오늘 아주 작정하고 온 사람 같았다.
결의에 찬 그의 눈길에 목 끝까지 치솟은 말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뭐, 어차피 결혼도 고려하고 있던 거. 고백도 받았겠다, 청혼이라고 못 받을쏘냐.
고민은 짧고 결심은 빨랐다. 나는 호기로이 답했다.
“아뇨. 청혼, 좋아요. 지금 당장에라도요.”
좋아. 인생은 한 방이다.
어차피 액셀은 밟았다. 괜히 브레이크 밟았다가 이도 저도 안 되느니, 각오한 김에 끝까지 가보는 거야.
내 대답이 어찌나 단호했는지. 뤼디거는 그제야 조금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청혼만큼은 제가 제대로 준비해서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고백처럼 이렇게 초라한 꼴로 하지는 않을 겁니다.”
“딱히 초라하다거나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저도 마음의 준비,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정말 이대로 결혼까지 가는 거구나, 우리…….
아직도 얼떨떨했다. 사실, 사귀는 것도 현실감이 없는 상태였다.
그나저나 루카한텐 이걸 어떻게 말하지. 이모랑 숙부가 난데없이 결혼이라니.
안 그래도 뤼디거에게 마음의 벽이 산처럼 높은 것 같은데…….
설득하고 싶어도 요즘 나를 자꾸 피하니 그러기도 쉽지가 않다.
어차피 당장 청혼할 생각은 아닌 것 같으니 기회가 또 오겠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루카한테는 제가 천천히 말해 둘게요.”
“알겠습니다.”
루카 말고는…….
뭐. 역시 선왕이 문제인가.
선왕의 노기를 어떻게 누그러트릴지 생각만 해도 갑갑했다.
그때 뤼디거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유디트 씨. 염치불구하고, 제가 궁금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