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03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03화
“궁금한 거요? 좋아요.”
나는 흔쾌히 답했다. 뤼디거가 이상한 걸 물어볼 사내도 아니고.
설령 이상한 걸 물어봐도 뭐 어떤가. 이왕 대답해 주겠다고 한 거, 주저 없이 대답하는 거다.
나는 화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허락이 떨어졌지만 뤼디거는 한참을 주저했다. 그는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유디트 씨는 제 어떤 점이 좋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유디트 씨가 사랑한다고까지 해주셨는데 이런 걸 꼬치꼬치 캐묻기나 하고…….”
그리 말하며 뤼디거는 고개를 조아렸다.
아, 아니. 그렇게 따지면 좋은 이유 같은 걸 물어본 건 내가 먼저였는데.
너무 순수하고 건실한 질문에 나는 잠시 답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뤼디거는 머쓱히 덧붙였다.
“지난번에 이상형을 여쭤보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것과는 별개니까요.”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답이야 정해져 있는데, 너무 노골적인 게 문제였다.
물론 노골적인 게 잘못은 아니다. 명쾌하고, 분명하고.
다만 뤼디거의 고백이 너무 절절한 게 문제였다. 그가 일평생 쓸 감수성을 전부 끌어 올려 짜낸 것 같은 고백에 대한 답이 ‘당신 외적 조건이 너무 좋아서요…….’라니. 입을 떼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웠다.
역시 조금 포장해서 말해줘야 하나.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좋아하는 이유를 거짓말하는 건 좀 그랬다. 속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물론 연애에 있어 어느 정도 가식은 필요하다지만, 입이 근질근질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는 쪽을 택했다.
“얼굴이랑…… 몸이랑…… 키 큰 것도 좋고, 아, 목소리도요. 그냥 다 좋다니까요. 당신, 제가 만난 남자 중에 제일 완벽하다고요. 제가 과분하다고 했잖아요.”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괜스레 투덜거렸다.
하지만 뤼디거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하신 말씀은 그냥 제 앞이라 듣기 좋으라고 해주신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럼 제 얼굴이…… 취향이라는 것 때문에 절 좋아하시는 겁니까?”
“네.”
“그 때문에 청혼도 받아주신 거고요?”
“그렇다니까요.”
나는 뤼디거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너무 대놓고 말했나.
사귀기로 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뤼디거가 나에게 정이 떨어졌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역시 조금이라도 가식을 끼워 넣었어야 했나.
남의 평판 신경 안 쓰는 뤼디거 당신이 내 평판을 위한 프로 파간다를 펼친 게 정말 인상 깊었다고…….
아, 이건 정말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뤼디거의 인성을 치켜세우기 위한 다른 일화를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렇게 내가 고민하며 끙끙거리는 것이 무색하게, 뤼디거는 활짝 반색했다.
“정말입니까? 다행입니다.”
다행? 뭐가?
나를 놀리나 싶었지만 진심으로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하긴 남을 놀리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남자이긴 했다.
뤼디거는 조금 흥분한 듯 말했다.
“제 외모가 쓸모 있는 날이 오긴 오는군요. 유디트 씨가 저를 사랑한다고는 하셨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유디트 씨 보기 좋은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제 외적 조건 자체는 전부 취향이라 이 말씀이지요?”
“네? 네.”
하도 기뻐해서 내가 말을 잘못 한 줄 알았다.
내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뤼디거는 뿌듯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얼굴 중에서는 제가 제일 괜찮지요. 적어도 사교계에 데뷔한 결혼 적령기의 사내 중에서는 말입니다. 한시름 놨습니다.”
물론 내가 너보다 잘생긴 얼굴을 못 보긴 했는데 말이야…….
내가 외모만 본다거나 그래서 실망하고 그러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너무 안심하니 기분이 묘했다.
‘뭐, 자기가 다행이라니 상관없지만…….’
뤼디거에게 많이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게 많았다.
생각해 보면 나도 뤼디거에게 숨기는 게 있었고…….
‘내가 빙의했다는 사실을 뤼디거에게 밝혀야 할까? 계속 이 상태로 살아갈 것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내 몸이 아니니까…….’
아직 루카에게도 밝히지 않은 건 좀 맘에 걸렸지만, 그렇다 해서 사귀기로 한데다 청혼 직전까지 말이 나온 시점에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만약 내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그래. 청혼하기 전에 알고 있는 것이 좋겠다.
루카 때야 처음 빙의해서 정신이 없던 터라 미리 설명을 못 해줬다지만…….
마음을 다잡은 내가 결연히 운을 떼었다.
“저, 뤼디거 씨. 저…….”
그때, 무언가 차가운 것이 코끝에 내려앉았다.
“이건…….”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늘에서 한 송이, 한 송이 눈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눈이…….”
“첫눈이로군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흐른 걸까.
잠시 할 말을 잊은 나는 뤼디거의 손을 부여잡고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첫눈을 함께 맞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데.
과연 내가 빙의했다는 사실을 밝혀도 우리 사랑은 이루어질까.
잠시 머뭇거림이 치솟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밝혀야 할 일이다.
바짝 마른입을 축인 나는 다시 한 번 입을 뗐다.
“제가……. 고백할 게 있어요.”
“마님, 도련님! 사람이 와요!”
간신히 말을 끝마쳤지만, 하필 호들갑스럽게 들려온 로라의 외침에 내 말은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왜 하필 이때!
타이밍 한 번 끝내준다. 나는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그래서 고백하실 말씀이라 하면?”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고스란히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멀뚱멀뚱한 낯으로 되물었다.
사람이 온다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응시하는 태도에 되레 내가 더 당황했다.
들키면 안 되는 거 아냐? 선왕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다.
다급해진 나는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이, 일단 몸을 피하세요. 제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네. 모쪼록 편하신 쪽으로 하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리하진 마세요.”
항상 태연한 낯으로 무리하는 남자니까. 괜찮다고는 해도 내가 신경 쓰였다.
나는 걱정스레 덧붙였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뤼디거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생각지 못한 포옹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나 또한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언제나 그가 뿌리고 다니는 코오롱 향기에 가죽 냄새, 미세한 화약 냄새가 뒤섞여 나를 잠식했다.
그 순간이 영원과도 같이 느껴졌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하늘에 잠시 멈춘 것만 같았다.
내리고 나면 사라질 첫눈의 순간처럼, 우리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처럼 서로를 꽉 부둥켜안았다.
뤼디거는 금방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떠나는 것이 못내 굴욕적이라는 듯, 미련이 뚝뚝 묻어 나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마치 눈에 새길 듯한 시선이었다.
그는 이내 몸을 돌려 성큼성큼 정원수 사이로 몸을 숨겼다. 나는 못이 박힌 듯 서서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밀회를 끝내고 도망치는 로미오를 바라보던 줄리엣처럼.
하지만 그는 로미오가 아니고, 나도 줄리엣이 아니다.
우리의 엔딩은 해피엔딩이 될 수 있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의지를 다잡았다.
CHAPTER 12. 장르가 제가 바란 장르가 아닌데요
뤼디거가 들렀다 간 이후,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선왕이 내 앞으로 남겨진 할머니의 영지와 저택을 보여주는 데 따라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할머니의 유산이 있다고 했을 땐 딱히 현실성도 없고 해서 흘려 넘겼는데, 실제로 보니 말문이 막혔다.
“어떻느냐. 자그맣고 소담하긴 하지만 운치가 있고 아기자기하지 않으냐.”
자그맣고 소담한 건 왕궁과 비교했을 때의 기준이겠지……!
“뭐, 나쁘진 않네. 왕궁에서도 이 정도면 가깝고.”
따라온 루카는 부동산을 통해 집 보러 온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동안 날 피하더니, 또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따라붙었다.
원래 오늘도 루카와 함께 올 계획은 아니었는데…….
언제 날 피했냐는 듯 태연자약하게 곁에 와 있던 통에, 얼결에 같이 오게 되었다.
그래 놓고선 마치 딸 자취방을 대신 구해주는 부모처럼 저택 이곳저곳을 검사하듯 돌아다니는 꼴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찼다.
게다가…….
전 도통 적응이 안 되는데요!
아직도 이게 내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던 나는 부담스러움에 떨떠름히 저택을 흘끔거렸다.
“영지와 저택은 지금까지 여기 있는 베르너가 도맡아 관리했단다. 내 측근이었던 만큼 믿을 만하지. 앞으로도 그러할 테니, 너는 가끔 얼굴만 내비치면 된다.”
“안녕하십니까, 드디어 귀하신 분을 뵙는군요. 영광입니다.”
베르너라 소개받은 노인이 나를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수더분한 사내였다. 왠지 선왕의 오랜 측근인 것이 이해되는 외모라고 할까…….
그나저나 이 세계에 있는 집사들은 전부 이름이 비읍으로 시작하나…….
빈센트와 빌헬름에 이어 베르너라니.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색하게 그의 공손한 인사를 받았다.
“하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릴라니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보라색 안개라는 뜻이지요. 주인마님께서도 이곳이 마음에 드실 겁니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죠?”
“이 근처 포도밭이 정말 근사하거든요. 안개 낀 날 내려다보면 포도 때문에 보라색 안개처럼 보인답니다.”
그리 말하며 환히 웃었다.
“이곳의 와인도 유명합니다. 와이너리에도 한번 들러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