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04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04화
와이너리까지 있어?
저택만으로도 매우 당황스러웠던지라, 와이너리까지 둘러보면 턱이 빠질 것 같았다.
나는 에둘러 거절했다.
“아, 아뇨. 나중에요.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러면 와인 시음은 어떠십니까? 왕실에도 납품하고는 있습니다만, 역시 현지에서 바로 드시는 것이 신선하지요.”
그리 말한 베르너가 손짓하자, 와인이 채워진 잔이 세 잔 냉큼 대령되었다.
세 잔? 선왕이랑 나랑…….
내가 세 사람을 셈해보는 사이, 루카가 자연스레 와인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루카, 너는 안 돼!”
화들짝 놀란 나는 루카를 제지하려 했지만, 내가 제지할 것도 미리 파악한 건지 루카는 잽싸게 와인 잔을 챙겼다.
“와인은 신사의 교양이야.”
“신사는 무슨! 넌 아직 애잖아!”
“사교계에 데뷔했으니 신사지.”
루카는 태연히 대답하며 와인 잔을 기울여 향을 맡았다. 평소에도 와인을 즐겨 마시는 듯한 능숙한 태도였다.
아니, 아무리 우리가 서로의 수상쩍음에 대해 눈치챘다는 걸 공유했다고는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해라, 좀!
물론 루카가 자길 어린애 취급하는 걸 질색하는 것도 이제는 이해가 갔다.
보아하니 정신 연령은 어른인 것 같은데 애 취급당하니 얼마나 답답했겠어.
‘그러는 루카에게 되레 애 취급당하는 나도 답답하지만 말이야…….’
하여튼 사칙연산 과제니 동화책이니 하는 걸 하는 게 답답하다는 건 이제 알겠다.
하지만 술, 담배는 안 되지, 안 돼! 몸은 어린애인걸!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안 돼. 어렸을 때부터 술 같은 거 즐겨 마시면 멍청해진다고!”
그러고는 루카의 손에서 와인 잔을 뺏었다.
그새 입을 축였는지 와인 잔에 입술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내 기세에 루카도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내가 허용해 준 선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투덜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그런 날 보며 선왕이 껄껄 웃었다.
“하여튼 잔소리 하고는! 그런 것도 네 할머니를 똑 닮았구나. 나에게 잔소리를 해준 것도 네 할머니밖에 없었지.”
“마가렛 왕녀님께서는 항상 그러셨죠. 잔정이 많으셨고…….”
선왕이 말하기가 무섭게 베르너가 거들었다.
두 노인이 젖은 추억 속 할머니의 모습은 내가 아는 할머니의 모습과 달랐다. 할머니는 잔소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린애가 술을 마시는 데 잔소리를 안 하는 쪽이 이상하지 않나…….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잔소리한다고.’
할머니의 모습에 날 끼워 맞추려는 선왕의 착즙이 이쯤 되니 눈물 겨울 정도였다.
그냥 외모만 닮은 거로는 부족한지, 선왕은 내 행동 하나하나에 할머니를 투영하려 애썼다.
‘뭐, 그걸로 만족하신다면야.’
상대가 푸릇푸릇한 나이도 아니고 이제 여든이 넘어가는 노인인데.
굳이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지적해 주기도 그랬다.
하물며 선왕은 나에게 이 많은 유산을 전해주지도 않았던가. 그러면 선왕이 바라는 모습대로 잠시나마 빙긋 웃는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근사한 저택과 와이너리를 비롯한 포도밭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 술자리에서 술안주 대신 하던 농담이 있었다.
나도 모르는 먼 친척이 프랑스에 있는 조그만 성이 딸린 포도밭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꿈이 있다고……. 그게 고스란히 현실이 될 줄이야.
뤼디거의 내기 돈을 받으려고 한 것도 노후에 살아갈 저택을 위해서였는데, 엉겁결에 그 모든 게 해결되었다.
갑자기 건물주가 된 심정이 이런 걸까.
아무리 불로소득이 최고라곤 하지만 이쯤 되니 얼떨떨했다.
내 머릿속에서는 로또 정도가 불로소득의 최대치였는데, 갑자기 미국 파워볼에 당첨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원작의 유디트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돈, 명예……. 그녀가 바라던 그 모든 것이 이미 본인의 손에 쥐어져 있었을 줄이야.
우연으로 밝혀진 일이었지만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왜 빙의한 걸까, 나는…….’
왜 하필 나였고, 왜 하필 유디트였는지.
뭔가 이유가 있을 만도 한데,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뤼디거나 루카에게 빙의한 사실을 밝히는 것과 별개로,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선왕과 근교 나들이를 끝마친 우리는 바로 왕궁으로 돌아왔다.
선왕의 기분도 좋아 보이겠다, 마차에서 슬쩍 뤼디거의 출입 금지령에 대해 운을 뗐다.
하지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왕이 바로 정색하는 바람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빅토리아에게 자문을 구해봐야 할까…….’
역시 왕실에서 제일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야 빅토리아였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예의상 대할 뿐이었고, 그나마 호감을 지닌이라고 하면 말리나 왕녀였는데…….
‘내가 우연히 바네사를 닮았다고 생각해서 호의적이었던 건데, 또 막상 마가렛 왕녀의 손녀라고 하니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 보아하니 선왕의 차별적 행동의 근원이 할머니 같던데.’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왕족 내의 문제도 만만치 않게 골치가 아팠다.
한 발짝 밖에서 봤을 때야 내 문제 아니니까, 하고 관조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이쪽의 원흉도 선왕이란 말이지…….’
선왕, 선왕, 선왕!
정말이지 그의 존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돌아오기가 무섭게 로라가 소식을 전했다.
“마님, 감옥 면회 신청권이 나왔어요.”
꽤 기다린 일이니만큼 희소식이었다.
아마 오늘 선왕과 같이 외출한 것에 대한 보상인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선왕에게 외출 허락을 받기만 하면 신청권이 바로 발급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외출 허락을 간신히 받아냈더니 정작 면회 신청권이 감감무소식이었다.
곧 발급해 줄 것처럼 굴면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슬금슬금 미루는데……. 어딜 봐도 선왕이 막았던 게 분명했다.
앞에서는 흔쾌히 다녀오라 허락해 놓고 말이야.
배신감이 치솟았지만 대놓고 추궁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나 혼자 속으로 삭이는 수밖에 답이 없었다.
하여튼 오늘, 뤼디거의 출입 금지령을 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얻는 게 전혀 없진 않았다.
시기적으로 나쁘지 않기도 했고.
나는 화색을 띤 채 로라가 물어온 소식을 반겼다.
“그래? 좋아. 내일 바로 출발해야겠구나.”
“체력은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체력은 좋잖니.”
나는 그리 말하며 웃었다. 힘들지 않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루카에게 걸릴 게 분 명했다.
그러면 루카는 백 퍼센트 따라 가겠다고 주장할 텐데, 아무리 루카가 어른스러워도 감옥에 데려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걔는 내 뭐가 그리 못 미더워서 감시를 안 하곤 못 배기는 거람?
나는 한숨과 함께 로라에게 단단히 일렀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거야. 해가 뜨자마자. 이건 비밀로 해야 해, 로라. 특히 루카에겐 말이야. 눈치 빠른 애니까……. 내 말 알겠지?”
“네. 걱정 마세요.”
로라가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완전 범죄를 꿈꾸었다.
아무리 루카가 눈치가 빠르다 해도 내일 내가 감옥에 가리라곤 생각도 못 하겠지.
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없는 걸 알고 또 비밀통로로 빠져나 오면 큰일인데…….
산 넘어 산이다. 나는 내가 자리를 비운 새 어떻게 해야 별일 없을지를 생각하며 골머리를 앓았다.
* * *
결국 내가 택한 것은 루카에게 편지를 써두고 가는 것이었다.
-말 안 하고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 루카. 하지만 너와 함께 갈 수 없는 곳이라 어쩔 수 없었어. 이상한 곳은 아니야! 선왕에게 허락도 받았어. 혹시나 해 호위기사들도 데려가고. 하지만 가는 곳이 어린애가 다니기엔 눈에 띄는 곳이다 보니 부득불 너를 두고 가는 걸 이해해 주기 바라.
그러니 절대 따라오지 말라 덧붙일까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괜히 붙였다가 긁어 부스럼일까 싶어 그 부분은 지웠다.
루카는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 백 퍼센트 따라올 성격이니까.
편지를 썼다 해서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정을 공유하는 것이 루카의 맘고생을 덜어줄 것이다.
‘원체 내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전전긍긍해야지…….’
나는 편지를 발견한 루카의 반응을 짐작하며 마차 안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찍 출발한 덕분일까. 해가 완전히 머리 위로 떠올랐을 때 즈음, 나는 감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범죄자들을 가둬두는 감옥은 빽빽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혹여 성벽을 벗어나더라도 옴짝달싹할 수 없게 깊은 해자가 파여 있었다.
도개교가 내려오지 않는 이상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
나는 철통처럼 지켜지고 있는 감옥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왕실마차를 확인한 간수가 도개교를 내렸다. 면회 신청권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감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선왕이 미리 일러둔 말이 있었는지, 간수들은 시종일관 나에게 저자세였다.
내가 안내된 곳은 면회실이었다.
면회실은 감옥의 면회실이 아니라 귀족가 응접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귀족이나 왕족이 왔을 때의 전용 면회실인 모양이었다.
푹신한 천이 덧대어 있는 부드러운 곡선의 하얀 의자에 앉아, 나는 이사벨라를 기다렸다.
잊고 있던 긴장감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너무 긴장하지 마. 나에겐 그녀에게 제시할 수 있는 강력한 패가 있으니까……. 게다가 잘 안 풀리면 뭐 어때? 어차피 큰 기대하고 온 거 아니잖아.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지, 뭐.’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하지만 면회실의 반대쪽 문이 열리자, 애써 다짐한 것이 허무하게도 몸이 자동으로 다시 뻣뻣이 긴장했다.
간수는 절도 있는 태도로 나에게 보고했다.
“마이바움 양. 죄수 번호 23103, 이사벨라 앤더슨을 데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