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0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06화
바닥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파란 눈동자가 필사적이었다.
나락 속에서 내려온 한 줄 동아줄을 부여잡기라도 하려는 듯 절절하기 그지없었다.
이사벨라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뚝뚝 묻어났다. 그녀는 자조했다.
“이 모든 게 변명처럼 느껴지는 거 알아요. 그래요. 제 죄예요. 프란츠 그놈을 믿는 게 아니었어요. 하, 그에 대한 기대를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제 자식도 체스 말로 보는 놈이 다비를 보살펴 줄 리가 없었는데…….”
“…….”
“다비를 구해준 건 정말 고마워요. 당신에게 큰 빚이 생겼네요. 제가 당신에게 내어줄 증거가 있다면 당장 내어줬을 거예요. 하지만 저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저를 구명해 달라 부탁하는 게 몰염치하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전 정말 다비를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어요. 어떻게든 당신의 도움이 될게요.”
이사벨라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등대의 불빛처럼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는 그녀의 눈빛에서는 신뢰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더욱 이상했다. 이사벨라는 과분한 욕망에 몸을 불태우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가 왜 프란츠에게 속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은…… 강단 있고 똑똑하고 현실적이야. 도대체 왜 프란츠에게 속은 거지?”
“그땐 어렸으니까요.”
이사벨라가 자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귀족 나으리가 저에게 관심 가져주니까 마냥 좋았고……. 그 인간, 얼굴은 그럴듯하니 친절해 보이잖아요? 십 년 전 한창 순진했을 땐 깜빡 속아 넘어갔죠.”
생각해 보니 십 년 전이면 이사벨라도 스물이 채 안 됐을 나이였다. 입맛이 썼다.
“그거 알아요? 프란츠가 왜 절 택했는지?”
난데없이 질문을 툭 던지더니, 갑자기 소리 높여 웃었다. 허탈한 듯도 서러운 듯도 한 웃음이었다.
한참을 그리 웃어 재끼는 그녀를 내가 떨떠름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사이, 그녀는 돌연 정색하며 말했다.
“저에게 애를 보면 금발에 푸른 눈의 애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요. 당신 조카처럼 말이에요. 애초에 요나스의 사생아로 들이밀기 위해 저에게 접근한 거죠. 금발에 푸른 눈의 평민 여자는 드무니까. 뭐, 프란츠의 피가 섞였기 때문인지 다비는 저만큼 선명한 금발과 푸른 눈이 아니지만 말이에요.”
이사벨라의 말이 끝날 때쯤 나 또한 정색한 상태였다.
소설을 읽을 당시만 하더라도 사생아가 생긴 건 우연이었을 뿐이고, 야망 때문에 그녀를 잠시 버려둔 것 정도로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나중에 쓸모를 깨닫고 이용한 거라거나.
하지만 애초에 이용하기 위해 이사벨라를 만난 거라니.
상식적으로, 다른 놈 자식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사생아를 일부러 만드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귀족가 여식에게 사생아를 본다면 크게 일이 불거질 테고, 그러면 혹여나 있을 왕족과의 결혼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생각했겠지. 그래서 굳이 평민 중에 상대를 고른 거고…….’
와, 프란츠 얘 그냥저냥 적당한 악당이 아니었네. 이거 완전 개새끼 아냐.
나는 혀를 찼다. 이사벨라에 대한 동정심이 치밀었다.
원작에서 이사벨라가 루카를 괴롭혔고, 그녀가 정보를 팔아넘긴 탓에 루카와 뤼디거가 죽었던 걸 생각하면 동정심이 웬 말이냐 싶지만…….
게다가 내가 이사벨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된통 당했을 수도 있는 일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적의 적은 친구란 말도 있고……. 지금으로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솔직히 내 몸의 주인 유디트의 악행에 비하면 이사벨라 쪽은 온건할 정도라 내가 할 말이 없기도 하고.’
하물며 유디트의 악행은 이미 저질러진 것들이 태반이었다. 원작의 시점 전이라 묘사가 되지 않았을 뿐.
그리고 내가 이사벨라에게 원작이라는 원죄를 묻는 것이 꺼려지는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너무 많은 주변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소설 속 캐릭터들과 내가 맞닥트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 사이의 괴리감.
마치 미처 보지 못한 달의 뒷면을 보게 된 것만 같았다.
‘이사벨라도 좋아서 프란츠에게 협력한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루카의 말이 내 머릿속에 울렸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그 상대의 본성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 또한 상황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물론 내가 마냥 그녀에게 호의적인 것도 아니었고, 방심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기회를 주는 것 정도는 고려해 볼 만했다.
‘어차피 그녀가 증거를 주면 대가로 사면해 줄 생각이었으니까. 좋아.’
하지만 상황이 흘러가는 꼴을 보아하니 이사벨라가 사면된 것을 프란츠가 알게 된다면, 이사벨라를 암살하려 하든가 그녀를 다시 이용하러 들 터였다.
‘프란츠가 접근하는 걸 노려서 덫을 놓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지만……. 그러려면 뤼디거 씨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에게 쉽게 연락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말이지.’
어쩔 수 없다. 당분간은 그녀를 내 곁에 두는 수밖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차라리 내 옆에 두고 감시하는 게 제일 속 편할 것 같았다.
그녀가 정말로 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애쓴다면 좋지만, 만약 그녀의 맹세가 거짓이고 프란츠에게 정보를 빼돌릴 속셈이라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프란츠의 행적이 드러날 함정을 팔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미래는 바꿀 수 있다.
각오를 다진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신을 사면해 주지. 그리고 당신 아이도, 당신도 계속해서 보호해 줄 거야. 당신이 나를 따르는 한…….”
“절 믿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이 절 의심해도 좋아요. 당신이 저와 다비를 보호해 주기만 한다면, 전 당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할게요.”
나와 이사벨라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이 곧았다.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족쇄가 채워진 그녀의 손과 장갑으로 감싼 내 손이 단단히 서로를 마주 잡았다.
* * *
말은 쉽게 했지만, 이사벨라의 사면은 당장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물며 한때 범죄를 저질렀던 그녀를 시녀로서 왕궁에 들이는 것 또한 그러했다.
물론 당장 처리할 수 없다 뿐이지, 불가능하단 소리는 아니었다.
나에게는 만능 패스권인 선왕이 있었으니까.
왕궁으로 돌아온 나는 바로 선왕을 찾았다.
“뭐라고? 그 평민을 사면해 달라고?”
“네. 그녀와 이야기하며 그녀가 얼마나 반성하는지를 알 수 있었어요. 게다가 홀로 남은 아이가 얼마나 엄마를 그리고 있겠어요? 저도 할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 여자와 똑같이 감옥에 있었겠죠…….”
“너는 달라!”
선왕은 바로 길길이 날뛰었다.
“사면이라면 충분히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시녀라니! 왕궁 시녀는 평민이 넘볼 자리가 아니다, 얘야. 지금 빈터발트에서 네가 데려온 하녀였던 애만 하더라도 충분히 예외적이야. 게다가 그 평민이 너를 골탕 먹이려 하지 않았더냐. 그런 것이 뭐가 안 쓰럽다고 사면해 주고 곁에 두려 굴어! 사람이 필요한 거라면 내가 더 싹싹한 아이들을 붙여 주마.”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 있는 로라만으로도 충분한걸요. 하지만 그 여자는 생활고 때문에 그린할텐 경의 사기극에 동참했다고 해요. 전 그런 그녀에게 먹고살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일 뿐이에요.”
나는 로이텐의 핑계를 댔다.
빈터발트 가를 향한 선왕의 적대감을 봤을 때 방계인 버켄레이스의 범죄를 순순히 고발하는 것이 결코 긍정적으로 작용하진 않을 터였다.
‘잘못하면 되레 뤼디거까지 휘말릴 수도 있는 일이야……. 관련이 없는 게 명백해도 열심히 짜 맞출 사람이란 말이지.’
빈터발트에 관해서 선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다. 그런 변수는 애초에 제거해 두는 게 편했다.
그리 머리를 굴리며, 나는 구슬프게 목소리를 꾸며 애원했다.
“저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에요. 할바마마, 제가 동정심조차 갖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선왕은 못마땅한 듯 씨근덕거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선왕은 내 의지가 확고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좋아. 너 좋을 대로 하거라. 하지만 내가 그 평민에게 따로 사람을 붙이고 감시한다 해도 신경 쓰지 말거라.”
선왕이 이사벨라를 감시하는 척하면서 나에게 감시의 눈을 붙일까 봐 잠시 걱정되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런 식으로 사람을 붙이려면 진작 붙였을 사람이다.
나는 활짝 웃으며 선왕의 뺨에 작게 키스했다.
“당연하죠. 어려운 부탁이었는 데도 들어줘서 고마워요, 할아버지.”
이 정도면 예상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허락이 났고…….
이제 문제는 루카였다.
루카가 이사벨라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짐작도 안 되었다.
단지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 사기꾼 정도 생각하면 다행이다. 만약 루카가 미래를 알고 있다면…….
그 때문에 감옥에 가는 걸 비밀로 한 거기도 했다.
증거를 받는 대가로 자신을 학대한 여자를 사면해 준다는 게 루카에게 있어서 분노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결국은 이사벨라를 시녀로 데려오게 되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루카와 마주치게 된다. 그러니 루카 또한 꼭 설득해야 했다.
‘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이사벨라를 만나러 간다고 미리 밝히는 건데. 이건 완전 사후통보가 되어 버렸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루카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러면 이사벨라에게 사면이 당장은 불가능하다 하는 수밖에……. 대신 다비는 책임지고 키워주겠다. 당부하고. 그녀에게 해둔 말이 있으니까.’
이사벨라와 한 약속을 완벽히 지키지 못하는 것이 무척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 해서 루카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나에게 있어 루카가 우선이기도 하고…….
‘루카에게 신뢰를 잃어버리면 큰일이지. 얘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상황인 만큼……. 최대한 통제할 수 있는 고삐를 쥐고 있어야 해.’
제가 어른인 줄 아는 어린아이다.
가끔 몸이 열 살인 것도 잊고 행동할 때마다 가슴이 여러 번 철렁이기도 했다.
최대한 루카가 돌발 행동을 하지 않는 쪽이 내 심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만큼, 나는 루카와 우호적인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나는 루카의 반응을 짐작해 보며 무거운 발을 질질 끌어 루카를 찾아갔다. 편지만 두고 가서 성이 잔뜩 났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게 웬걸?
루카는 평소와 같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
얼떨떨해하며 루카의 눈치를 보는 사이, 루카가 바로 돌직구를 던졌다.
“감옥에 다녀왔다며? 연회장에서 깽판 친 그 여자 만나느라.”
자, 잠깐.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