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07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07화
입단속은 철저하게 했고, 내가 어딜 갔다 왔는지 아는 건 오늘 나와 함께 다녀온 로라와 호위 기사, 그리고 마부들뿐인데?
하지만 나는 이내 수긍했다.
상대는 루카였다.
항상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가슴을 철렁이게 했던 만큼, 나는 루카가 내 행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좋아. 네가 알고 있는 건 이제 그러려니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야? 그건 정말 궁금하다.”
“선왕이 알고 있다며. 이모가 편지에 손수 그리 적었잖아.”
설마 선왕에게…… 물어봤니?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루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루카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선왕이 나에게 잘 대해주기는 하지만, 루카에게도 상냥하거나 친절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냉정하다면 냉정할 정도로 선을 그었다.
루카가 그런 선왕에게 질문하러 간 것도 놀라웠고, 선왕이 순순히 대답해 준 것도 놀라웠다.
벌어진 상황이 얼떨떨했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루카가 나를 재촉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러 간 거야? 증거라도 있냐고? 프란츠 그놈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이 아닐 텐데.”
맞습니다, 맞고요…….
어쩜 그렇게 사람 생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나 모르겠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네 말대로 증거는 없었고…….”
그러고 슬쩍 루카의 눈치를 보았다.
이사벨라를 연회장에서 깽판 친 여자라 호칭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사감이 있는지는 모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카의 얼굴만 봐서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슬쩍 운을 뗐다.
“이사벨라를 사면해 주기로 했어.”
루카의 눈썹 하나가 치켜 올라갔다.
고작 열 살인데, 눈썹 하나 까닥이는 거로 스물일곱 먹은 이모 심장을 들었다 놓는다.
일단 루카에게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말이 나오진 않았다.
“물론 이사벨라가 나와 너에게 하려고 한 짓을 완전히 용서한 건 아니야. 하지만…… 그녀도 프란츠에게 이용당한 거니까.”
“흐음.”
“무, 물론 그녀가 우릴 속인 건 죄지만, 그녀도 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고. 프란츠의 본성을 알고 정이 다 떨어졌다 그러는 데다……. 그렇다고 내가 단지 그 여자를 동정심 때문에 사면하려는 건 아니야. 아, 내 말은 그러니까…….”
나는 한참을 횡설수설했다.
이사벨라를 변호하는지 날 변호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머릿속으로 열심히 시뮬레이션 돌려둔 대화들은 하얗게 날아간 지 오래였다.
사교계에 나서면서도, 선왕 마주하면서도 팽팽 잘 돌아가던 혀가 지금은 제멋대로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그렇게 한참을 말했을까, 가만히 듣고 있던 루카가 툭 하니 말했다.
“이모가 그렇게 생각하면 상관 없지 않아?”
“응? 저, 정말?”
너무 가벼운 대꾸에 얼떨떨해진 나는 눈만 깜빡였다.
이렇게…… 간단하게 상관없다는 말로 퉁쳐질 수 있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
루카는 오히려 내가 얼떨떨해하는 걸 이해 못 하겠는지,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이모가 생각했을 때 적당히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을 만하니까 사면해 준다고 한 거 아냐? 이모는 다루기 힘든 건 애초에 시도도 안 하니까.”
그건 맞는데…….
생각보다 루카가 나를 잘 파악하고 있어서 한 번, 루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사벨라에게 건조한 태도를 유지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정말…… 괜찮아? 그, 시녀로 두고 곁에서 감시할 건데…….”
“괜찮다니까? 시녀로 데려오면 보는 눈도 많겠다, 감시가 더 쉽겠네. 여기는 이모 홈그라운드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눈치를 봐?”
“……내 선택이 네 맘에 들지 않을까 봐.”
“난 그런 걸 마음에 안 들어하진 않아. 게다가 난 사람 하나 쓰고 말고에 일일이 감정 소모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 아니야.”
아, 네……. 그러시겠죠.
사람 하나라고 칭하기에 중요도가 좀 다른 것 같지만……. 일단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일이 진행되는 건 다행이었다.
다만 예상과 어긋나는 건 루카가 이사벨라에게 정말 별생각 없다는 점이었다.
내심 루카가 회귀를 한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자기를 몰락하게 한 이사벨라에게 이토록 건조하다니. 내 짐작이 틀린 걸까?
회귀한 게 아니기에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거라든가…….
또 그렇다고 하기엔 뤼디거나 프란츠에게 갖는 감정이 너무나 생생하단 말이지.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건이 있었던 걸 수도.
내가 그렇게 루카에 대해 짐작하려 노력하는 사이, 루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아직도 그런 표정이야?”
차마 내가 너를 고찰하고 있었다고는 대놓고 말하기 민망했던 나는 말을 돌렸다.
“네가 이렇게까지 날 믿어주는 게 당황스러워서……. 너 맨날 나보고 사고 치지 말라 그러잖아.”
“아, 그건 좀 포기를 했고.”
별생각 없이 꺼낸 말에 난데없이 뼈를 맞아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포, 포기라니! 이왕이면 적응이라고 해 줄래?
갑작스러운 공격에 사레가 들린 나는 한참을 콜록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카는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이모의 진정한 목적이 뭔지 몰라서 더 경계한 것도 없지 않은데, 결국은 이모 목적이랑 내 목적은 같잖아.”
“……그렇지.”
잔기침을 멈춘 나는 힘겹게 대답했다.
우리의 목적은 바로 프란츠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
그 전까지는 서로 어렴풋이 짐작만 했지만, 뤼디거에게 프란츠의 감시를 맡긴 일 이후로 서로의 목적을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엔 루카가 돌연 빈터발트의 타운하우스에 등장해서 깜짝 놀랐는데…….
그날의 일이 아니었다면 평생 루카에게 경계를 샀을 거라고 생각하니 차라리 루카가 온 게 잘되었다 싶기도 했다.
“그래. 결국은 같은 목적으로 가는 거니까. 물론 내부의 적이란 말도 있지만…….”
루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발끈해서 외쳤다.
“그런 식으로 발목 잡지는 않거든?”
“알아. 아니까 봐주는 거야.”
봐준다는 루카의 말에 나는 기가 찬 한숨을 뱉었다.
말만 들으면 정말 열 살 같지가 않다.
“하지만…… 다음부터 이런 일 있으면 나한테 말없이 행동하지 마. 알았어? 내가 덮어놓고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상의하자, 이 말이야.”
마치 나를 꾸중하는 듯도, 타이르는 듯도 한 말투다. 살살 달래는 듯도 싶었다.
아주 저 혼자 어른이지.
곧이곧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불퉁스레 덧붙였다.
“……너도 나한테 밝히지 않고 하는 일들 많잖아.”
“나야 뭘 한다 싶으면 이모가 덮어놓고 하지 말라 하니까.”
“나도 덮어놓고 하지 말라는 건 아니야. 네 몸이 열 살, 어린애니까. 그걸 가끔 잊고 있는 것 같아서 대신 걱정하는 거지.”
“…….”
뼈 있는 대화가 한마디씩 오갔다. 마지막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지금껏 한 마디도 지지 않았던 루카의 입이 꾹 다물렸다.
한참 끝에 루카가 한숨과 함께 읊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그쪽에 관해서는 당분간 견해가 좁혀질 일은 없겠네.”
“루카.”
혹여나 루카의 기분이 상했을까 싶어 나는 전전긍긍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사춘기 자식 눈치 보는 부모가 된 심정이었다.
그때, 루카가 품에서 종잇조각을 꺼냈다. 무언가 하고 봤더니 내가 써준 서신이었다.
표정이 안 좋을 거라 짐작한 내 생각과 달리 루카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루카는 씩 웃으며 서신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번에 편지를 써두고 간 건 괜찮았어. 앞으로도 종종 이런 식으로 보고해 주는 거지? 다음번에도 기대할게.”
“뭐? 다음번? 매번 어떻게……. 잠깐, 루카? 루카!”
내가 뒤늦게 루카를 부르짖으며 뒤를 쫓았지만, 루카는 쏙 하니 제 침실로 들어간 뒤였다.
“참나, 자기가 내 상사야, 뭐야……. 행선지 꼬박꼬박 보고하고 다니라는 거 아냐, 지금.”
루카의 응접실에 홀로 남은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과하게 기분 상한 티를 내더라니.
내가 반발할 걸 미리 알고 심각하게 분위기 잡으면서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난 게 분명하다.
그 용의주도함이란!
반박할 여지조차 없이 완전히 루카의 페이스에 휘말려 버렸다.
고작 편지냐 하겠지만 일상에 있어서 업무 하나 추가되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모른다.
게다가 행선지 보고라면 더더욱.
‘그렇다고 무시하면 약속과 다르다고 박박 우길 게 분명하단 말이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루카에게 편지로 가장한 보고서를 남기는 것이 얼떨결에 확정되어 버렸다.
애초에 내가 왜 편지를 썼을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나는 루카가 사라진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루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그 얄미운 표정이 너무나도 생생히도 그려졌다.
* * *
뜻밖의 지속적 업무를 맡아버리긴 했지만, 이사벨라 문제는 생각보다 원활하게 해결되었다.
며칠 뒤 이사벨라가 왕궁으로 들어오고, 간단한 시녀 교육을 끝마친 뒤에 나에게 배정될 거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내심 일이 틀어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고 있던 터라 거기까지 확인받고 나서야 작게 안도할 수 있었다.
‘애초에 뤼디거랑 연락만 원활히 됐다면 이런 마음고생 안 해도 됐는데 말이야. 뤼디거라면 일 처리를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나, 은근히 뤼디거에게 의지 많이 하고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