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08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08화
하여튼 이제 막 시작한 연애 때문이 아니고서라도 불편한 점이 너무 많았다.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어떻게 해야 선왕을 설득해서 뤼디거의 왕궁 출입 금지령을 풀 수 있을까.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한 나는 힌트를 얻기 위해 빅토리아를 찾아갔다.
하지만…….
“어쩌지? 내 이번 일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해줄 조언이 없구나.”
“전하를 설득할 만한 아주 자그만 힌트 하나만이라도 좋아요.”
기대한 것이 허무할 정도로 단언하는 빅토리아의 말에 나는 그녀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뭐, 할바마마께서도 빈터발트와의 계약을 생각하면 언제까지 빈터발트 대령을 홀대하진 않을 테지만……. 정 그리 마음이 급하면 차라리 말리나 이모님을 찾아가 보는 건 어떠하느냐?”
“말리나 왕녀님이요?”
나는 떨떠름히 되물었다.
예전에는 왕가의 인물 중 말리나가 그나마 상대하기 편한 인물에 속했었다.
하지만 내가 ‘마가렛 왕녀’의 손녀였다는 걸 알게 된 이후 그녀를 만나기가 거북했다.
말리나 왕녀가 선왕에게 차별당한 근본적 원인이 바로 우리 할머니였으니까.
빅토리아는 그런 내 심정을 전혀 짐작도 못 하는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손녀인 나보다야 자식인 말리나 이모님이 겪어온 세월이 있는 만큼 할바마마에 대해 아는 것이 더 많으면 많았지 적진 않을 것 아니냐.”
“하지만……. 말리나 왕녀님은 선왕 전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거로 아는데…….”
“하하, 이 왕궁에 할바마마를 좋아하는 이도 있느냐?”
빅토리아는 소리 높여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선왕의 흉을 볼 줄은 몰랐던지라 나는 화들짝 놀라 주변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빅토리아는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남 눈치 안 보는 사람들과 있으려니 소심한 내 심장만 덜그럭거린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 제가 여쭤봤다가 말리나 왕녀님의 기분이 상할까 걱정되어서요.”
“그대는 참으로 주변 기분을 잘 살피는구나.”
“하하…….”
아니, 왕녀님이고 이모님인데 기분을 살피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최근에 뤼디거가 좀 누그러지고 대화가 통하게 되어서 그런가, 저런 자기중심을 넘어 타인 배제적인 말이 참으로 새삼스러웠다.
“뭐, 자네라면 말리나 이모님이 썩 예뻐하기도 하였으니 괜찮지 않겠느냐. 적어도 아바마마보다야 말리나 이모님이 대화하기 더 편할 테니.”
하긴, 이러니저러니 해도 왕에 비하면 말리나 왕녀가 훨씬 허들이 낮은 상대임은 분명했다.
나는 결국 말리나를 찾아갔다. 찾아가면서도 조금 불안했다.
하지만 방도가 없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말리나를 만났다.
“아바마마가 빈터발트 대령의 출입 금지령을 풀게 해줄 만한 방도가 뭐 없느냐고?”
선왕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말리나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글쎄. 아바마마의 기분을 풀어 주는 것은 나보다야 네가 더 잘 알 것 같다마는.”
“애초에 그 주제에 관해서는 들으려고 안 하시니 저로서는 방도가 없어요, 왕녀님. 제발 저에게 지혜를 빌려주세요.”
나는 빈정거리는 말리나에게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말리나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재고의 여지조차 없는 태도였다.
“포기하거라. 아바마마는 기본적으로 주위에 관심이 없지만, 자기가 아끼는 것에 관해서는 지독한 통제광이야. 바네사 언니도 그에 못 견뎌 빈터발트 공작과 결혼하여 왕궁을 나선 것인데…….”
통제광이라는 말에 답답할 정도로 나를 옥죄려는 선왕의 모든 기질이 단숨에 이해됐다.
“애초에 아바마마가 그리된 이유가 바로 그레타 고모님이 말도 없이 남자와 함께 가출한 충격 때문이니, 그 통제광적인 기질은 쉬이 변하질 않을 것이야. 그나마 자네에게는 유한 편이지.”
“저한테 하시는 게…… 유하다고요?”
“그래. 최근에 자네 혼자 외출했다지? 예전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아바마마가 원하는 곳, 원하는 사람만 만나고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언니는 항상 일탈을 꿈꿨지. 왕의 총애가 항상 기꺼운 것만은 아니야.”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최종 보스를 깨다 힘들어 공략할 방법을 물어보러 왔는데, 내가 상대하고 있던 것이 최종 보스가 아니라 중간 보스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와 같은 충격이 머리를 울렸다.
와, 진짜 막막하네…….
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을 애써 억눌렀다.
“하지만……. 잠깐. 그래. 방도가 전혀 없는 건 아니구나.”
“정말요?”
나는 화색을 띤 채 물었다. 정말 동아줄이 따로 없었다.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며 생각을 정리한 말리나는 차근히 계책을 알려주었다.
“연회를 열어달라고 하렴. 너도 이제 왕족이 되었으니, 사교계에 제대로 소개하는 연회 자리를 가질 때도 되었지. 지난번 궁정 연회는 너무 소란스럽지 않았느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연회라니?
“남들이 널 얕잡아 본다고. 다들 속으로는 왕족 취급 안 한다고. 그러니 이렇게 꽁꽁 숨겨두는 게 아니냐는 소리를 할 거라 하렴. 그러면 아바마마도 안된 다 하진 않을 거야. 은근히 허세를 부리시니 성대하게 연회를 치러주려 하시겠지.”
서, 성대한 연회란 말이죠…….
지난번 루카를 소개한 연회도 좀 부담스러웠는데 그보다 더 큰 연회에, 심지어 주인공이 나란 말이지.
생각만 해도 부담감에 토할 것 같았다. 으으…….
“그렇게 연회가 크게 열리면, 빈터발트 대령의 출입 금지령을 알아서 풀어주실 게다. 왕족을 소개하는 연회에 공작가가 참석하지 않는다면 여러모로 좋지 않게 보일 테니까.”
“정말…… 그렇게 간단히 출입 금지령이 풀릴까요?”
연회를 여는 것만으로도 뤼디거의 출입 금지령이 풀린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간단했고, 나로서는 결코 생각해 내지 못할 해결 방법이었다.
확실히 그럴싸했다. 하루만 출입 금지령을 풀어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까.
“그래. 아바마마도 지금 고집을 부리는 것일 뿐이야. 결국은 출입 금지령을 풀어주셔야 하니까. 다만 제일 중요한 건, 너는 대령의 출입 금지령에 대해 한마디도 얹으면 안 된다. 설령 아바마마가 묻더라도 ‘상관없다, 할아버지 좋으실 대로 하라.’ 이리 대답해야 해.”
나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왕녀님, 정말 감사드려요. 덕분에 한시름 덜었어요. 왕녀님이 아니었다면…….”
말리나는 손사래를 치며 내 감사의 인사를 끊었다.
“되었다. 그리고 너는 언제까지 날 왕녀님이라 부를 셈이냐. 나는 네 당숙모가 아니더냐.”
나는 잠시 눈만 깜빡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얼떨떨했다. 나는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힘겹게 물었다.
“왕녀님은 제가…… 밉지 않으세요?”
“왜?”
“그……. 어찌 보면 저희 할머니 때문에 왕녀님이 선왕 전하께…….”
“아, 내가 아버지에게 차별당한 것 말이냐?”
말리나는 픽 웃었다.
그녀의 자조 어린 입 끝에는 허탈함과 포기,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그레타 고모님 일이 있고 난 이후에 아버지의 성격이 한층 더 괴팍해지기는 했지만, 애초에 저런 사람이었어. 사랑을 쉽게 주지 않아. 그것이 가족이라도 말이야.”
“…….”
“고모님이 그런 선택을 한 것도 이해가 갔고……. 언니 또한 결과적으로는 같은 선택을 했으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이 정말로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니?”
그렇다. 안 그래도 내가 말리나를 찾아온 것 또한 선왕의 사랑을 받기 때문이 아니던가.
하지만 선왕의 사랑을 받는 것이 괴롭다 하나, 말리나에게 있어 선왕은 부친이었다.
정말로 말리나는 괜찮은 것일까. 그걸 물을 자격이 나에게 있는 걸까?
많은 생각과 질문이 물에 퍼진 색색의 잉크처럼 머릿속을 잠식했다.
그러고는 이내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말리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물론 아버지에게 외면당하는 것에 상처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유디트, 그 때문에 너를 미워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단다. 애초부터 아버지의 사랑이란 건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아니었던 거야. 그리고 생각해 보면 그것 없이도 나는 썩 행복하게 살았고 말이야. 부유한 독신 여성의 삶이란 훌륭한 법이지.”
말리나는 아까보다 훨씬 가벼운 말투로 말을 맺었다.
일부러 꾸민 듯한 말투였지만, 나는 그 점을 지적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나에겐 네가 이젠 볼 수 없는, 사랑하는 언니를 그릴 수 있는 추억의 매개체가 되어 주어 고맙구나.”
그리 말하며 말리나는 내 눈가를 어루만졌다.
연보라색 눈동자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추억으로 물들었다.
정말로 말리나가 아무렇지 않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선왕과 말리나, 두 사람 사이에 오랜 세월 케케묵은 갈등은 당사자가 직접 풀어야지 타인인 내가 왈가왈부하여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말리나를 설득하거나 위로한다 한들 그저 마음을 스쳐 지나갈 뿐이겠지.
그녀가 지금 이것으로도 좋다 생각한다면, 나로선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는 선택지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메인 목으로, 힘겹게 대꾸했다.
“제가 뭘요. 당숙모님 덕을 많이 보는 제가 더 고맙지요.”
* * *
나는 바로 말리나가 말한 대로 작업에 착수했다.
아니나 다를까, 말리나가 시킨 대로 하니 딱 그녀가 말한 대로 상황이 펼쳐졌다.
“아니, 누가 널 얕잡아본단 말이냐! 나에게 말만 하거라. 내 당장……!”
“저도 몰라요……. 사실 왕족이라고 인정받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절 손녀라 생각하지는 않는 거라는 말에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할아버지, 정말 자그마한 연회도 괜찮아요. 그냥 제가 할아버지 손녀라고 공표만 해주시면 안 되나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당연히 해줘야지, 해주고말고……. 내 성대하게 연회를 열어주마. 그 누구도! 내가 널 아끼는 것에 대해 찍 소리도 못 하게 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