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09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09화
선왕은 그리 말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선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를 왕족의 일원으로 소개하는 궁정 연회의 준비가 일사천리로 준비되었다.
선왕은 한 번 뱉은 말은 철석같이 지켰다. 성대한 연회를 열어주겠다는 말대로였다.
“이번에 대연회실을 개방한대요.”
“대연회실? 그건 즉위식이나 왕가의 결혼식에서나 쓰는 것 아니었어?”
“그렇다니까요! 정말로 선왕께서 단단히 각오하신 것 같아요. 왕족분들도 이런 데뷔를 하진 못한다고 하는데…….”
로라는 신이 나서 외쳤다.
이리되기를 바라긴 했지만, 실시간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연회 규모를 보고 있자 하니 마음 한구석이 묵직했다.
“이게 마님의 실질적인 데뷔니까, 신경 많이 쓰셔야 해요.”
“지, 지금까지도 신경 많이 써 온 것 같은데.”
“지금까지요? 그건 이번에 비하면 연습이나 다름없었죠! 이제 실전이구요.”
단호한 로라의 기세를 볼 때, 아무래도 연회용 드레스를 수십 벌은 입어보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그런 철두철미한 점이 믿음직스럽기는 하지만……. 그에 처음부터 끝까지 어울리는 건 사양이다!
나는 재빨리 발을 뺐다.
“그럼 로라, 너만 믿을게. 괜찮은 드레스를 추려놓을 수 있지?”
“하지만 마님이 입어보셔야…….”
“나는 로라 눈썰미를 믿어! 네 눈에도 통과 못 한 게 나에게 어울릴 리가 없잖아. 그치? 넌 빈터발트에서 제일가는 용접꾼인걸! 진주 한 알도 놓치지 않는!”
용접꾼이 옷을 고르는 것과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칭찬하고 보는 게 먼저였다.
나는 정말 되는대로 말을 뱉었다.
“그건……. 그렇죠, 마님!”
다행히 로라는 그를 트집 잡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녀를 믿고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고 생각했는지, 고무되어 들떠 있었다.
“좋아요. 마님께서 딱 이거다! 할 만한 옷을 골라오겠어요.”
“좋아, 좋아.”
나는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맞아.”
나는 빈터발트에서 보내온 내 보석함을 뒤적였다.
오래지 않아 내가 찾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걸 들어 올리며 말했다.
“보석은 이걸로 할 거니까, 이에 맞춰서 드레스 부탁해.”
“라벤더 다이아요? 물론 이것도 귀하지만……. 지난번 궁정 연회에서 찼던 얼음요정의 눈물에 비하면 화려함이 부족한걸요. 혹시 새 보석이 필요하신 거라면…….”
“그래도 난 이게 좋아. 드레스도 여기에 맞춰주렴.”
나는 고집을 부렸다.
뤼디거와 사귀기로 한 이후, 정말 오래간만에 그를 만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의미 있는 물건을 지니고 가고 싶었다.
내가 착용한 보석을 발견한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한 것도 있고.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낭만이나 사랑 같은 것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만드는 법이 아니던가.
“어쩔 수 없죠. 그럼 제가 최대한 격에 맞는 드레스를 골라 볼게요.”
나는 로라의 융통성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드레스에서 벗어났다 하여 내가 자유를 만끽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드레스 고르는 것 말고도 연회를 위해 골라야 할 것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연회장에 드리울 커튼의 색, 연회 만찬 메뉴, 카펫의 원산지…….
내가 연회의 주역인 만큼 연회는 내 취향에 맞춰 준비되었다.
드레스를 로라에게 맡긴 것처럼 왕궁 시종장에게 세세한 것들 대부분을 맡겨두기는 했다.
그래도 결국 최종 선택은 내가 해야 했다.
단지 선택일 뿐이지만 규모가 규모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일이었다. 게다가 마냥 선택하기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내 취향을 물어봐서 답했더니, 그런 식습관은 지나치게 남부식인지라 불가능하다는 게 말이 돼? 그럼 왜 물어봤어?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 내 취향대로 한다며! 내 입맛엔 그게 최고라고!”
나는 성을 내며 명단을 노려보았다.
내가 상당히 시끄럽게 굴었는지, 지금껏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내 방 한쪽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루카가 내 쪽을 흘끔 보며 말했다.
“바쁘네.”
“도와줄래?”
나는 진심을 담아 물었다.
이쯤 되니 굳이 내가 해야 할 의미를 못 느끼기도 했고.
하지만 루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열 살 조카한테 할 말이야?”
“이럴 때만 열 살이지!”
나는 억울함을 가득 담아 루카를 째려보았다.
경제지를 정독하는 열 살이 어디 있어!
설령 있다 해도 그쯤 되면 이모의 산처럼 쌓인 연회 결재 서류쯤은 단숨에 처리해 줄 수 있을 터였다.
내가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루카가 한숨을 쉬며 신문을 접었다.
그러고는 내 결재 서류 절반을 가져가더니, 묵묵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정말 해주는 거야?”
“안 해준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나는 굽신거리며 남은 서류를 들고 루카의 곁에 앉았다.
사락, 사락.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우리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그렇게 한참 서류를 점검하던 루카가 툭 하니 말했다.
“아, 맞아. 이번 연회에서 프란츠 조심하는 거 잊지 말고. 절대 말도 섞지 마.”
“아…….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빈터발트에서 프란츠가 했던 걸 생각하면 접견 신청을 넣고도 남았을 놈인데……. 한 번도 그런 일이 있었단 보고는 못 받았어.”
물론 내가 바빠 모든 접견 신청이 반려되고는 있지만, 그래도 접견 신청이 들어오는 내역에 대해 다 보고를 받고 있기는 했다.
때마침 뤼디거가 왕궁에 출입하지 못하겠다, 이때가 나를 포섭할 기회라고 생각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들이대고도 남았을 놈인데…….
실제로는 머리카락 한 올 보인 적이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의아해하는 나에게 루카가 진실을 알려주었다.
“선왕이 아저씨만 출입 금지령을 내린 게 아니라 빈터발트 가 전체에 출입 금지령을 내렸거든. 버켄레이스도 빈터발트의 방계니까 같이 출입 금지령이 걸린 거지, 뭐.”
“……그랬어?”
“그랬어. 너무 관심 없는 거 아냐?”
“아니, 그렇게까지 넓은 범위로 출입 금지령을 내렸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
“뤼디거 아저씨한테만 집중해서 까먹은 건 아니고? 내가 말했지? 그 아저씨는 안 돼.”
“…….”
정곡이다. 괜스레 찔렸던 나는 우물우물 말을 삼켰다.
루카는 그런 내가 못 미더웠는지 연신 당부했다.
“하여튼 이번에 아저씨 출입 금지령이 풀리게 되면 프란츠도 같이 연회에 참석할 테니까. 알았지? 이사벨라라는 수도 없어졌겠다,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조심해.”
“걱정 마. 연회 때는 보는 눈이 많으니 허튼짓하진 않을 거야.”
“아직도 북부 사람을 모르겠어? 주변 사람 눈을 신경 쓰는 놈이 아니야.”
“그건……. 그렇지.”
“오히려 모두가 지켜보겠다, 그 자리에서 이모한테 청혼할 수도 있어.”
“설마.”
“설마라고 생각해?”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프란츠는 빈터발트에 미친놈이었고, 미친놈이 하는 짓을 정상인의 사고 범주로 확신하는 건 무리였다.
그저 짐작 가는 것들에 대한 대비를 철저하게 하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하지만 청혼해도 내가 안 받아주면 그만이잖아. 게다가 그 자리에 선왕도 있다고. 선왕이 그 꼴 절대 두고 안 볼걸.”
“하긴. 선왕이라면 그 자리에서 멱을 따려고 들겠지.”
“하하……. 프란츠도 생각이 있으면 선왕 앞에서 그러진 않을 거야. 나한테 접근을 해도 연회가 끝난 뒤겠지.”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불안함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역시 연회장에서는 계속 선왕 곁에 붙어 있는 쪽이 낫겠다. 나는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로라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퍼뜩 생각이 난 나는 루카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이번에 샤를로트 왕녀 에스코트한다며?”
샤를로트 왕녀는 루카 또래의 왕의 막내딸이다.
샤를로트와 바로 위 자매인 죠세핀은 거의 나와 루카만큼 나이 차가 났다. 완전 막둥이였다.
사교계 데뷔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이번에는 친척인 나를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겠다 가볍게 얼굴을 내비칠 요량인 것 같았다.
루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 왕가 가족들이 모두 참석하는 연회라는 상징성 때문에 선왕이 우긴 모양인데……. 그게 정치적으로 쓸모가 있다는 건 알지만 굳이 그렇게 어린애가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지는 의문이긴 해.”
나도 그에 동감이긴 한데…….
혹시나 했던 나는 넌지시 물었다.
“그러면 루카, 너랑 샤를로트랑 같이 연회 빼달라고 할까?”
“어? 왜? 나는 당연히 참석해야지.”
“……너랑 샤를로트가 동갑인 건 알고 있어?”
“나랑 걔랑은 상황이 다르잖아.”
루카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앓느니 죽지…….
이런 대답일 걸 알면서도 물어본 내 잘못이다. 나는 말을 돌렸다.
“그래. 샤를로트 왕녀랑은 말 좀 나눠봤어?”
“뭐. 그냥 한두 마디 해본 거지.”
쑥스러운지 루카는 그리 말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루카가 그런 건 또 처음이다. 괜히 궁금했던 나는 살살 캐물었다.
“한두 마디? 무슨 한두 마디?”
“아, 왜 이렇게 수다스러워? 나 이거 안 도와줘도 돼?”
“아, 아니.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참 나. 사람이 애써서 도와주는데 수다나 떨고 말이야.”
루카는 투덜거리며 서류를 힘 줘서 팔락팔락 넘겼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말을 꺼낸 건 루카, 너였는데…….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했다가 루카가 서류를 팽개치고 떠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나는 루카의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고 서류에 집중했다.
팔락, 팔락.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가 다시 방 안을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