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1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1화
뤼디거는 늘어놓은 옷을 보며 못마땅한 듯 쯧, 혀를 찼다.
“시간이 없어 기성품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군요. 아무리 수선을 해도 맞춤옷과는 많이 다를 텐데…….”
특히나 뤼디거의 안목이 얼마나 높은지, 수도 없이 많은 옷이 그에게 퇴짜를 맞았다.
내가 난생처음 보는 화려한 옷들도 뤼디거의 미간을 펴주지는 못했다.
그가 괜찮다고 한 옷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게 아니라, 수많은 타협을 한 끝에 선택된 옷이라는 느낌을 풀풀 풍겼다.
그래. 뤼디거야 본 게 많은, 태생이 부잣집 귀족 도련님이니 그럴 수 있다.
루카 너는 뭔데? 이런 드레스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가 너무 태연자약하게 자기 취향을 주장하고 있는 거 아니니……?
그것도 여자 드레스를……?
카탈로그를 뒤적이던 루카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태도로 뤼디거에게 물었다.
“이 옷 어때요?”
“주인장, 이 옷을 한번 가져와 보게.”
뤼디거도 마음에 들었는지, 바로 양장점 주인에게 말했다.
양장점 주인은 바로 내 옷 시중을 드는 직원에게 옷을 갖다 주었다.
흰 담비 털이 덧대어진 진녹색 벨벳 외투였다.
벨벳 위에 다이아몬드형 격자 무늬로 금사가 수놓아져 있었고, 무늬의 교점에 작은 진주 단추가 장식되어 있었다.
본디 양장점 주인이 이렇게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도와주는 일은 드물 것이다.
뤼디거가 원체 거물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
그래. 내가 이런 대접을 또 언제 받아보겠니.
작은 한숨을 내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음. 잘 어울리는군요.”
이 외투는 과연 얼마나 할까.
짐작도 할 수 없었던 나는 그냥 하하 웃고 말았다.
양장점 주인은 손바닥을 비비며 뤼디거에게 다가왔다.
그는 사람 좋은 낯으로 웃으며 굽실대는 태도로 넌지시 운을 뗐다.
“꼬마 도련님께서 안목이 좋으시네요. 숙녀분께서 원체 미인이셔서 더 옷이 받는 모양입니다. 아, 외투와 함께 맞춘 모자와 장갑도 있는데, 한번 보시렵니까?”
“꺼내와 보게.”
뤼디거는 주인을 보지조차 않은 채 명령했다.
그는 카탈로그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이건 어때요?”
“이것도 가져와 보게. 음, 루카. 이건 어때 보이니?”
“이 상아색이요? 괜찮은 것 같아요. 저 군청색은요?”
“좋아. 나쁘지 않군.”
둘은 서로의 안목을 인정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그래도 나한테 묻기라도 하더니, 이제는 아주 두 사람 만의 세계였다.
뤼디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벌의 옷이 추가로 내 앞에 대령되었다.
목덜미에 짙은 색 족제비 털이 달린 하얀 외투와 검은 수달 털이 달린 군청색 외투였다.
군청색 외투는 자칫 어두워 보일 수도 있었지만, 소매와 가장 자리에 금사로 짜인 레이스가 장식되어 화사했다.
점점 쌓여만 가는 옷가지를 나는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중에서 고르는 것만으로도 한 세월일 것 같았다.
나는 손뼉을 치며 두 사람의 주의를 환기했다.
“저기요, 신사분들. 이제 슬슬 그만하시죠? 벌써 옷이 산처럼 쌓였다고요. 이 중에서만 골라도 충분할 것 같아요.”
“고르다뇨?”
뤼디거는 내 말이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당연히 다 사는 겁니다.”
“네?”
나는 쌓여 있는 옷을 다시 보았다.
어림잡아도 족히 열 벌 가까이 되어 보였다.
하루에 한 벌씩만 입어도 일주일 내내 입고도 남겠다.
굳이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 정도까지는…… 필요 없지 않을까요?”
“아, 대령님, 여기 가져왔습니다.”
내가 말을 떼기가 무섭게, 양장점 주인이 아까의 진녹색 외투와 짝이 되는 모자와 장갑을 찾아왔다.
뤼디거는 그걸 보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산더미가 된 옷가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있는 것들, 그로셀 호텔 303호로 배달 부탁하네.”
“네, 네! 그러면 장갑과 모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지금 이것들만 같이 보내드릴지, 아니면 다른 것들도 함께…….”
“모두 함께.”
뤼디거는 양장점 주인의 말을 끊고 짤막하게 답했다.
뤼디거가 말을 제멋대로 끊었음에도 양장점 주인의 입가는 찢어질 듯 올라가 있었다.
머릿속으로 지금 한 번에 얼마만큼의 매출을 올린 건지 주판을 튕기느라 바쁘겠지.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그 광경을 보았다.
치고 빠지기가 아주 예술이었다.
내가 무어라 말도 못 붙일 정도로 빠른 정산이었다.
그새 장교복 위에 외투를 걸친 뤼디거는 나보고 나오라는 듯 양장점의 문을 잡아 주고 있었다.
나는 잰걸음으로 그를 따라잡으며 불렀다.
“저기요, 대령님.”
“대령이라뇨. 가족끼리 너무 팍팍한 호칭 아닙니까?”
“그, 그럼 도련님?”
내가 떨떠름하게 되묻자, 뤼디거는 픽 웃음 지었다.
그러고 보니 뤼디거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지 못하게 훅 들어온 뤼디거의 미소와 마주치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뤼디거 씨.”
“뤼디거 씨?”
“네, 좋습니다.”
그는 그리 말하고는 또다시 성큼 발을 옮겼다.
다리가 어찌나 긴지, 그리 빨리 걷는 것 같지 않은데 벌써 훌쩍 앞에 가 있었다.
호칭 문제로 왈가왈부하는 사이, 양장점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서둘러야 합니다. 오늘 사야 할 게 많습니다. 우선 마이바움 양의 물건을 다 사고 루카 걸 사도록 합시다.”
“제 물건이요? 이걸로 끝이 아니에요?”
“무슨 소립니까? 아직 멀었습니다.”
“충분히 많이 샀어요. 더 필요한 것도 없고요.”
“부츠도 새로 사야 하고, 모자도 새로 사야 합니다. 더 필요한 게 없다니 무슨 말입니까?”
“잠깐, 부츠는 그렇다 치고, 모자는 아까 샀잖아요?”
“일단 세트라 하니 사긴 샀지만……. 그래도 양장점보다 모자점에 더 괜찮은 모자가 많을 겁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시간도 없다며.
굳이 그 없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모자점에 들러야 하는 건가?
게다가 모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이미 있는데!
하여튼 귀족들의 소비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빈터발트가 돈이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형 애인의 동생까지 비싼 옷을 사주는 게 보통인가?
루카야 그쪽 핏줄이고, 어린애니까 뭘 사주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나는 생판 남이 아닌가.
촌수로 따지면 사돈이라 칠 수도 있다지만, 실제로 결혼한 것도 아니라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비싼 선물을 받은 적이 처음이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머쓱히 손가락만 꿈지럭거렸다.
그런 내 기색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뤼디거가 돌연 나를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그렇게까지 제가 건네는 선물을 받기 싫습니까?”
“네? 아뇨. 받기 싫다는 게 아니라…….”
나를 내려다보는 곧은 눈빛과 마주하니 말문이 막혔다.
잘생긴 얼굴이 무표정하게 바라볼 때의 파괴력이 어떤 줄 아는가?
내가 갑자기 대역 죄인이 된 것 같은 죄책감이 휘몰아친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는 문제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니면 상관없지 않습니까? 문제없는 것이지요?”
어디서 밑장 빼기를 하려고.
뒤늦게 정신 차린 나는 당황하며 덧붙였다.
“아니, 그게. 저한텐 좀 과한 듯해서.”
“아……. 이런. 저한텐 전혀 과하지 않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뤼디거는 안타깝다는 듯 덧붙였다.
그 태도가 얼마나 뻔뻔했는지, 처음엔 도대체 얘가 뭔 소릴 하나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소설은 루카의 시점에서 묘사 되는지라 나는 뤼디거가 그저 어른스럽고 고지식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지…….
예상치 못한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니 당혹스러웠다.
특히나 귀족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화법은 나도 모르게 말문이 탁 막힐 정도였다.
결국 나는 모자점과 구둣방도 따로 들르게 되었다.
하늘하늘한 연분홍색 천을 커다란 작약 모양으로 장식한 아이보리색 종 모양 클로슈.
단정한 리본이 달린 케이크 모양의 보터.
검은 망사가 드리워진 타조 깃으로 장식된 자그마한 칵테일 캡까지.
나는 모자의 종류가 그렇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러니 양장점의 모자로는 눈에 차지 않았던 거겠지.
나는 마트료시카처럼 층층이 쌓인 모자 상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