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12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12화
‘근데 왜 저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지? 오랜만에 만날 수 있으니까 기분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걱정스레 뤼디거를 살폈다.
거리가 있는 만큼 의미 없는 짓이었지만, 엉덩이가 절로 들썩였다.
그 순간, 뤼디거와 눈이 마주쳤다. 그전까지 잔뜩 인상 쓰고 있던 뤼디거의 험악한 얼굴이 눈에 띄게 사르르 풀렸다.
세상에 둘 없을 정도로 다정한 미소였다.
순식간에 돌변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 깜짝이야. 저건 완전 기습 공격이잖아!
“그녀를 왕족으로 인정하고, 왕녀와 동등한 권리를 내리며, 그녀의 혈육 또한…….”
왕이 뭔가 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휙 시선을 돌린 채 사정 없이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와,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파급력이 크네…….’
하지만 당사자는 내가 왜 시선을 피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는 초조한 듯 내 눈치를 살폈다.
왕의 개회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당장에라도 이쪽을 향해 올 듯한 기세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뤼디거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아, 안 돼……. 그랬다간 정말 선왕 눈 밖에 나버릴 거야!’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 – — ·—·(STOP)!’
여기에도 모스부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보가 있으니까 대충 비슷한 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뤼디거는 군인이니까 이런 단순한 암호 정도는 쉽게 알아들을 테고, 설령 모른다 해도 내 필사적인 깜빡임에 잠깐이라도 스턴이 걸리면 그것만으로도 목적 달성이다.
‘어휴. 중학교 시절의 쓸데없던 짓거리가 이렇게 빛을 발할 줄이야.’
소프트볼부였던 당시, 포수였던 친구와 함께 볼 배합 신호를 정하던 중 장난삼아 눈을 깜빡여 모스부호를 보내는 건 어떠냐는 제안이 나왔다.
못 외운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쩌다 보니 불이 붙어 버렸다.
그걸로 내기까지 하게 되어, 결국 우리 부원 전부가 모스부호 능력자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눈 깜빡임으로.
‘쓸데없는 일에 있는 힘껏 시간을 소비하던 중학교 시절이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지…….’
다행히도 뤼디거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분별은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작게 안도했다.
“하여, 모두 연회를 즐기도록 하라.”
길고 길었던 왕의 개회사가 끝났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대연회장을 울렸다.
그때, 내 옆에 있던 빅토리아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오늘, 기대 단단히 하고 있으라고.”
“……네?”
“하핫.”
빅토리아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웃어넘겼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얼떨떨해하며 눈만 깜빡였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었는데…….
뭔가 노래가 이상하다?
보통 연회에서는 왈츠나 미뉴에트와 같은 춤곡으로 서두를 여는 것이 보통인데, 들려온 것은 행진곡이었다.
‘그렇다고 대관식 행진곡처럼 엄숙하거나 군대 행진곡처럼 딱딱한 건 아니고……. 마치 겨, 결혼식 행진곡 같은 느낌인데…….’
내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가 무섭게, 뤼디거가 움직였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미스터리 서클도 같이 움직였다. 아니, 점점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모세가 바다를 가르듯 사람들이 뤼디거의 앞길을 터주었다.
뤼디거가 있는 곳에서부터 내가 있는 곳까지 고속도로처럼 길이 탁 트였다.
이쯤 되니 그냥 뤼디거를 피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애초에 짜 두기라도 한 것처럼…….
왠지 모르게 불안한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나는 떨리는 눈으로 뤼디거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뤼디거는 거침없이 성큼성큼 나에게로 다가왔다.
이상한 걸 눈치챈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선왕도, 루카도 미간을 찌푸리고 뤼디거의 기행을 주시했다.
“저놈은 또 왜 저래?”
선왕이 못마땅해하며 혀를 찼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 지척까지 다가온 뤼디거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까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어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오늘따라 정말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있었다.
지난번 잡일꾼복을 입고 있던 걸 만회라도 하는 듯한 옷차림이었다.
화려한 검은 예복의 옷감은 빛을 받을 때마다 색이 바뀌었다. 청록색으로 보일 때도 있었고, 짙은 암청색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다른 이가 입었더라면 옷만 둥둥 떠다녔을 텐데, 잘생겨서 그런가 아주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네 녀석,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왕이 의자에 앉은 채 지팡이를 휘두르며 말했다. 조금만 가까웠더라면 뤼디거를 때렸을 것처럼 위협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뤼디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선왕 쪽으로는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나만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좀 더 연회가 진행되고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뭘?
“당신의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본 순간, 제 심장이 뛰었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죠.”
아니, 뭔진 모르겠지만 멈추란 뜻이었는데……. 차, 참을 수 있으면 참아줄래?
알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는 와중, 내가 모스부호로 전달하고자 했던 의도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맺은 뤼디거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뭐지?
엄청 작은 상자인데…….
뤼디거의 한 손이 상자의 밑을 받치고, 다른 한 손이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있는 건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내 손톱보다도 커다란 라벤더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자, 잠깐. 잠깐! 이건!
“유디트 마이바움 양.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야, 이거 아냐! 아니라고!
나 아직 루카한테 아무 말도 못 했단 말이야!
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뤼디거의 말은 이미 시위를 떠나버린 화살이었다.
뤼디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연회장의 2층 난간에서 연보라색으로 물들인 태피스트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주르륵 풀려 내려와 대연회장 벽을 가득 메웠다.
마치 라벤더 꽃밭에 온 것처럼, 시야가 보라색으로 가득 물들었다.
뤼디거는 보랏빛 풍경 속에서, 스스로가 완벽한 프러포즈를 했다고 생각하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뤼디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쩐지, 오늘따라 뭔가 자꾸 불안하다 했더니 청혼이었습니까……. 그것도 공개 청혼…….
아까 빅토리아의 의미심장한 말을 두고 볼 때, 그녀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긴, 그러니까 궁정 연회의 왈츠를 행진곡으로 바꾸고, 대연회장에 저 수상쩍은 보라색 태피스트리를 가지고 들어왔겠지.
왕족의 허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회 초에 뤼디거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 것도 그저 준비한 게 제대로 될까 긴장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뤼디거가 긴장하다니, 그 또한 새삼 놀라웠지만 지금 상황에서 더 놀랄 힘도 없었다.
‘프란츠가 청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하, 뤼디거 네가 이러면 어떻게 해!’
뤼디거의 청혼이 이렇게 빠를 줄 짐작도 못 한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뤼디거가 분별을 알다니, 완전 말도 안 되는 기대였다.
생각해 보면 뤼디거를 탓하기만 할 것도 아니었다. 청혼해도 되냐는 뤼디거의 질문에 그래도 된다고 답한 것이 나니까.
내가 뤼디거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시기를 좀 더 정확하게 지정했어야 했다.
그냥 차라리 내가 프러포즈한다고 할걸. 후회만이 남았다.
이래서야, 선왕의 뤼디거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씩 풀어나가겠다는 나의 계획은…….
“안 돼! 이 청혼은 무효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당연히 실패였다.
하도 충격적인 일에 잠깐 정신을 놓았던 두 사람이 뒤늦게 소리 높여 외쳤다.
두 사람이란 당연히 루카와 선왕이었다.
“이모는 몰랐던 거지? 지금 아저씨 혼자 북 치고 나팔 불고 하는 거 맞지? 그래, 저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현실을 부정하듯 중얼거리는 루카는 평소의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하긴 최근까지도 뤼디거에게 정 주지 말라고 그리도 거듭 말했는데 갑자기 청혼이라니.
충격을 받을 만도 했다.
‘아, 이럴까 봐 루카에게 미리 말해두려고 했는데…….’
뤼디거에 관해 입을 떼려고만 하면 잽싸게 이리저리 말을 돌리니, 좀처럼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뤼디거의 청혼이 오늘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억지로라도 앞에 앉혀두고 설명했을 것이다.
나는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닌가. 뤼디거가 홀로 저지른 일이라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나는 솔직히 털어놓는 걸 택했다.
“음……. 사실 뤼디거 씨가 청혼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게 오늘인 줄은 몰라서…….”
“뭐? 언제 그렇게까지 말이 오간 거야?! 두 사람 무슨 관계야? 나한테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으면서! 거짓말한 거야?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모를 믿었는데!”
“자, 잠깐. 내가 언제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어? 그런 적 없어!”
나는 당황하여 외쳤다.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어?!
“예전에 그랬잖아!”
“그러니까 예전 언제! 뤼디거 씨가 오해하잖아!”
사귀기로 해놓곤 다른 데 가서는 아무 관계도 아닌 척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필사적이 되었다.
설마 루카가 이야기하는 예전이 내가 빈터발트에 막 도착했을 때는 아니겠지.
하지만 루카는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 대답해 주는 대신, 되레 성을 내었다.
“이 정도로 오해하는 남자의 청혼을 받아서 뭐에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