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14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14화
일순 연회장에 정적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모두 질린 표정이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왜냐면, 나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청혼 반지 스페어를 준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뤼디거답다면 답다고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가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겠다는 의지만큼은 높게 사겠다마는…….
모두가 침묵한 사이, 뤼디거는 수줍게 웃으며 덧붙였다.
“반대가 있을 거라곤 충분히 짐작했고, 유디트 씨가 반지를 못 받으면 안 되니까요.”
“……반대가 있을 줄 알면서도 연회장 프러포즈를 했다, 이 말이에요?”
기가 찼던 나는 입을 벌린 채 뤼디거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난 전혀 칭찬하는 게 아닌데, 내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뤼디거는 조금도 구김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건국제를 제외하고 이렇게 모두가 모이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럼가트 전역에 소문낼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신문에 광고를 싣는 게 어때요?”
“좋은 생각입니다. 돌아가는 대로 바로 신문사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아니, 비꼬는 말이었거든?!
내 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뤼디거의 청회색 눈동자가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미치고 팔짝 뛰겠네, 정말.
그리고 미치겠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젠장……!”
루카가 욕설을 뇌까렸다.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양상에 초조해졌는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대로 포기해 주면 좋으련만, 그러면 김루카가 아니었다. 루카는 다시 한 번 반지를 훔치려 했다.
“칫!”
“처음에야 생각도 못 했다 보니 그대로 당했지만, 두 번 당할 만큼 호락호락하진 않지. 방심은 한 번이면 족하니까.”
뤼디거는 무뚝뚝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행동이 완전히 읽힌 만큼, 뤼디거에게서 두 번 반지를 빼앗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뤼디거는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는 내 왼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라, 싶기가 무섭게 뤼디거가 상자에서 반지를 꺼냈다.
그는 손에 힘이라도 주면 내 손가락이 부러질 것처럼 조심스럽게 내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그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손을 내밀고 있는 당사자인 나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싶어 눈만 깜빡였다.
뤼디거만이 홀로 흡족해했다.
“분명 받을 거라 했습니다. 그러셨지요?”
“무, 물론 그렇지만.”
“그리고 지금 받으신 겁니다.”
“그, 그렇네요?”
“좋습니다. 이걸로 제 청혼, 받아주신 겁니다.”
이, 이래도 되는 건가?! 남이 반지를 끼워주는 것만으로도 청혼 허락으로 인정해 주는 거야?
“안 돼!”
“무효다!”
……인정되는 모양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카와 선왕이 처절하게 내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왼손 약지에 반짝이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라벤더 다이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단지 반지 하나를 꼈을 뿐인데, 그 반지에 켜켜이 함축되어 있던 사회적 함의들을 그제야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다이아에 은은히 서린 보랏빛에 내 심장도 크게 두근거렸다.
하지만 내 감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선왕이 무슨 자식 애인 떨구려고 돈 봉투 내던지는 드라마 속 회장님처럼 길길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빈터발트와의 그 잘난 계약 때문에 네가 이러나 본데! 좋아! 파투 내주겠어! 끝이다! 전쟁이라도 해보자고!”
“아바마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 됩니다!”
뒤에서 왕이 쩔쩔매며 선왕을 말렸다.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고, 단지 그냥 청혼을 받았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선왕과 루카는 마치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처럼 극단적으로 굴었다.
물론 돌이켜 줄 생각도 없지만…….
이 난장판을 어찌해야 할까.
나는 난처한 얼굴로 입만 달싹였다. 내 난처함과는 별개로, 상황은 더욱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선왕의 난동을 보다 못한 왕이 버럭 외쳤다.
“근위병! 일단 마이바움 양을 방으로 돌려보내도록!”
뭐? 자, 잠깐!
격리라면 당연히 선왕을 해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내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보다 근위병들이 움직이는 것이 빨랐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근위병들이 뤼디거와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자, 잠깐만요. 이건 너무…….”
“유디트 씨!”
뤼디거가 근위병들을 헤치고 나에게로 다가오려 했다.
근위병들이 당연히 가로막았지만, 그 체격 좋은 근위병들이 뤼디거의 손짓에 휙휙 날아갔다.
와, 무슨 볼링 핀인 줄.
하지만 마냥 이렇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헤어지면 두 번 다시 못 만날 사람처럼 구는 뤼디거를 말려야 했다.
“뤼디거 씨. 일단은 저, 청혼받았으니까……! 사고 치지 말고 계세요!”
마지막 말에 진심을 가득 담았다. 사고는 오늘 저지른 청혼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뤼디거에게 중요한 건, 내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말인 모양이었다.
그는 무척 감격 어린 낯으로, 불도저처럼 근위병들을 밀쳐 내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다급해진 것은 왕이었다.
“다들 빈터발트 대령을 잡아라! 대령! 자꾸 그리 반발하면 명령 불복종 죄로 근신을 내릴 수도 있어!”
하지만 뤼디거는 근신이든 연봉 삭감이든 강등이든 제 알 바 아닌 듯싶었다.
그는 왕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오로지 직진, 직진만을 거듭했다.
결국 불똥은 뤼디거에게 밀려 푹푹 쓰러지는 근위병들에게로 튀었다.
“다들 대령을 막아내지 못하면 두 달 치 월급 삭감이다!”
“대령님, 제발 진정하십시오!”
“대령님이 이러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
“대령님이 우리 곤란한 걸 신경 쓸 분이시냐! 그런 말 해봐야 아무 쓸모 없어! 그럴 시간에 좀 더 잘 막아봐!”
근위병들은 사색이 된 채 뤼디거를 막으려 아등바등했다.
그들의 필사적임에 나는 안타까이 혀를 찼다.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래, 월급은 중요하지…….’
그런 근위병들의 필사적인 저지가 아주 의미 없진 않았다.
아무리 뤼디거라 하나 물량전에서는 주춤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쓰러진 근위병들이 뤼디거의 다리를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발목이 붙들린 상태였다.
근위병들은 체면이고 뭐고 전부 버린 상태였다.
그들은 재빨리 나를 데리고 연회장 밖으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마이바움 양. 손속이 다소 거칠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도 까라면 까야 해서…….”
근위병들은 연신 굽신거렸지만, 나를 데려가는 팔뚝만큼은 강경하기 그지없었다.
뤼디거와 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내 뒤로 뤼디거의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이건 왕가에서 빈터발트를 무시한 처사입니다!”
“무시는 자네가 하고 있네, 대령!”
왕은 어처구니없는 듯 외쳤다.
지금껏 왕이 어지간한 일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이번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짐작이 갔다.
“패트릭, 잠깐 비켜봐라. 내 당장 저놈을……!”
“잠깐, 서, 선왕 전하!”
“진정하십시오! 그 의자는 무겁습니다! 잘못 들다가 허리라도 삐끗하시면!”
“이거 놔라!”
“차라리 이 화병! 이걸 드십시오! 이건 가볍습니다!”
“화병도 잘못 맞으면 죽습니다! 지금 빈터발트 대령을 죽일 셈입니까?”
“설마 선왕 전하께서 정말로 대령의 머리를 향해 던지겠습니까? 게다가 대령이라면 맞아도 안 죽을 겁니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뤼디거도 사람이라고!
물론 뤼디거가 호락호락 선왕이 던지는 화병을 맞아줄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뤼디거가 걱정되었던 나는 근위병들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그들의 어깨 사이로 고개를 빼꼼 들었다.
정작 당사자인 뤼디거는 루카와 심각한 설전을 나누고 있었다.
“아저씨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이모를 제대로 아껴주지도 않을 거면서!”
“루카 너야말로! 난 네가 지금껏 날 삼촌이라 부르지 않은 건 예비 이모부로 생각해서였는 줄 알았는데…….”
“뭔 개소리야! 내가 지금껏 두 사람을 방해하는 데 얼마나 전심전력을 다했는데!”
아…….
난 이제 모르겠다, 정말.
연회장에 펼쳐진 것은 태초의 혼돈 그 자체였다.
솔직히 처음에 끌려 나올 때만 하더라도 근위병들을 밀치고 연회장으로 돌아가 뤼디거를 끌어 안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연회장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보고 나니, 저 연회장으로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조용히 근위병들의 지시에 따라 연회장을 빠져 나왔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