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1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16화
물이 떨어져서 다시 받아왔어도 충분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내가 하염없이 이사벨라를 기다리는 도중, 문이 벌컥 열렸다.
하녀라기엔 다소 조심스럽지 못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나는 별생각 없이 이사벨라일 거라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사벨라?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이사벨라는 무슨 이사벨라!”
씩씩거리면서 방에 들어선 것은 루카였다.
루카가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한 나는 고개만 까닥 들어 루카를 확인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루카가 맞았다.
나는 멀뚱히 물었다.
“가져간 반지 돌려주려고 온 거야?”
“돌려주긴 뭘 돌려줘? 이미 갖고 있으면서.”
“그래도.”
아무래도 돌려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루카는 소파에 앉으며 심각하게 말했다.
“나 진지하게 할 말 있으니까 이리 와 앉아봐.”
“루카, 나 지금 손가락 하나 까닥일 힘도 없거든. 누워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루카가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정말인걸. 나는 부득불 설명하는 대신 지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어휴, 진짜.”
루카는 한숨과 함께 내 침대가 있는 쪽으로 의자를 낑낑대며 끌고 왔다.
의자 자체가 커다란지라 어린 루카가 들기엔 힘겨워 보였다.
맘만 같아선 도와주고 싶은데, 정말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하겠다. 보다 못한 내가 덧붙였다.
“그냥 너도 침대에 앉아.”
“나 진지하다니까!”
루카가 진지하다는 것만큼은 심각한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다만 루카가 진지한 것과 침대에 앉을 수 없는 것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루카가 그렇다니 그런 줄 알고 넘길 뿐이었다.
기어코 내 앞에 의자를 가져온 루카는 의자에 앉은 채 푸른 눈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어찌나 시선이 활활 타오르는지, 마치 데일 것만 같았다.
루카가 진지하니, 나도 마냥 누워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루카의 시선에 재촉당한 나는 비스듬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루카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말해봐.”
“뭘?”
“육하원칙!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
“음……. 뭘?”
“알면서 자꾸 그럴래? 내가 뭐 때문에 이러는지 정말 몰라?”
루카가 나를 다그쳤다.
루카의 위로 취업 준비한다고 해놓고 빈둥대던 날 앉혀두고 훈계하던 아빠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 때문일까. 소싯적의 반항심이 기저에 남아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반발심이 불퉁 치솟았다.
뒤늦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휴, 안 되지, 안 돼. 여기서 흥분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차라리 진솔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 루카처럼 똑똑하다면 충분히 이해해 줄 거야.
하지만 상대를 설득하고자 하는 건 루카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깊은 한숨을 내쉰 루카는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자, 다시 해봐. 누가.”
“뤼디거 씨가.”
“언제.”
“첫눈이 내리던 날에.”
순순히 답했는데,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루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답이라는 기색을 팍팍 풍겼다.
하지만 그에 대해 딴죽을 거는 대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디서.”
나직한 목소리에 묘한 위압감이 풍겼다. 일단 상황을 전부 들어둔 뒤에 본격적으로 탈탈 털 생각이라는 게 훤히 보였다.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이사벨라 얘는 도대체 왜 안 오는 거야? 나는 문을 힐끔거리며 느릿하게 답했다.
“……왕궁 정원에서.”
“참나, 왕궁 정원엔 또 어떻게 기어들어 간 거야……. 그래서 뭘……. 됐다, 됐어. 고백을 열심히 했겠지.”
물론 그렇습니다마는…….
아니,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물어봤어?
나는 반발심에 눈을 치켜떴지만, 루카가 성을 내는 게 먼저였다.
“그래서 고백을 했다고 순순히 받아줬다. 이거야? 첫눈이 내리던 날이면 내가 아저씨랑 엮이지 말라고 경고한 뒤잖아!”
루카만 할 말이 많은 게 아니다.
지금껏 꾹꾹 눌러왔던 것들이 폭발할 것 같았다. 억울했던 나는 지금껏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토로했다.
“나도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내가 뤼디거 씨에 관해 입만 떼면 네가 자리를 피했잖아.”
“그래서 내 탓이다?”
“네 탓이라는 게 아니라……. 아니, 이게 잘잘못을 가릴 일이야? 뤼디거 씨가 내가 좋다 하고, 나도 뤼디거 씨가 좋았을 뿐이야.”
“그러니까 아저씨는 이모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니까? 이모는 속고 있는 거야!”
루카는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답답한 쪽은 오히려 내 쪽이다.
내가 속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이라도 해주든가.
나는 의아히 물었다.
“날 좋아하지 않는데 청혼을 해? 왜?”
“……그냥 이모가 필요했을 뿐이라거나.”
“하지만 루카, 솔직히 말해서 내 조건이 객관적으로 뤼디거 씨에게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 오히려 짐이 된다면 모를까…….”
내가 왕족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왕녀인 죠세핀과의 결혼도 거부한 남자였다.
내가 선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해봐야 그게 뤼디거에게 별로 가치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도리어 나와 결혼한다는 것 때문에 필요 없는 빈터발트 후계자로서의 조건을 만족하게 되어 버렸다.
후계자의 조건……. 설마…….
나는 루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내가 뤼디거 씨랑 결혼하면 뤼디거 씨에게 빈터발트 후계권이 밀릴까 봐 걱정되는 거야?”
“뭐?”
루카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빈터발트 따위, 당장에라도 벗어던지고 싶다고! 내가 여기 있는 건 아직 이 이름으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야.”
기가 찬 듯 코웃음을 친 루카의 눈이 불똥이 튀듯 번뜩였다.
역시……. 기차에서 카드놀이 하다 말이 나왔을 때도 그렇고, 소원의 잔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그렇고.
루카는 빈터발트를 잇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게 분명했다. 실제로도 노골적으로 그런 티를 드러냈다.
뤼디거도, 루카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라마지않는 빈터발트 공작가를 소 닭 보듯 한단 말이지.
이러니 프란츠가 더 미치지.
자기는 그리도 원하는 걸 가진 당사자 둘이 미련 없이 구니까.
그렇다고 해서 프란츠에게 넘길 수도 없는 것이, 제 자식도 굶어 죽게 둔 그 졸렬한 성정을 생각했을 때 그가 후계를 포기한 루카와 뤼디거를 순순히 둘 리가 없다.
‘하여튼 양보해 줄 가치가 없다니까.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마음씨를 착하게 먹어야 해.’
그나저나 루카가 빈터발트의 이름으로 해야만 한다는 일은 무엇일까.
역시 프란츠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이려나…….
그 일이 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루카가 뤼디거와 나 사이를 결사반대하는 이유가 먼저였다.
후계권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면 역시 그것 때문인가?
나는 마음속 한켠에서 고이 잠들어 있던 의문을 조심스레 꺼냈다.
“혹시…… 내가 문제야?”
“뭔 소리야?”
“내가…… 뤼디거 씨한테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지? 밥도 제대로 안 챙겨주는 이모가 허우대 멀쩡한 삼촌하고 결혼하는 게 싫어서……!”
아, 말하다 보니 점점 서러워지네.
나도 모르게 목소리 끝이 파르르 떨렸다.
루카의 얼굴이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구겨졌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한참을 곱씹던 루카는 이내 어처구니없어하며 외쳤다.
“또, 또, 또 이상한 망상 한다. 그런 거였으면 애초에 대놓고 말했어!”
루카의 고사리 같은 손이 제 허벅지를 철썩철썩 내리쳤다. 그 기세가 얼마나 살벌한지, 철썩 소리가 날 때마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긴……. 루카라면 주제를 알라거나, 몰락 귀족이 공작가와 결혼이라니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느냐는 등, 노골적으로 내가 문제라고 말했을 것이다.
배려해서 말을 돌리는 성격은 아니니까.
그러면 왜?
내가 짐작한 모든 이유가 지워졌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마. 내가 아저씨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때 말했던 그대로야. 아저씨는 누군가에게 정을 줄 만한 인간이 아니라고.”
루카가 이리도 확신하는 이유.
현 상황과는 맞지 않는 근거.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 하지만 그렇기에,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루카 너는 왜 그렇게 뤼디거 씨를 못 믿는 거야? 뤼디거 씨는 너를 진심으로 책임지려 하고 있어. 너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알아.”
루카가 픽 웃었다.
흩어질 듯한 웃음은 유난히도 짙게 마음에 남았다.
알고 있다고?
뤼디거가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걸 아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 단언하는 거야?
소리 없는 내 질문에 답하듯 루카가 중얼거렸다.
“그래. 죽을 수도 있겠지. 그 사람한테 중요한 건 사는 것도, 제 죽음 뒤에 남겨질 사람도 아니라 그저 자기 삶의 방식일 뿐이니까.”
속눈썹을 내리깐 채 조용히 읊조리는 루카의 낯이 무척 낯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루카?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입이 딱 달라붙어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루카는 눈꺼풀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이 마치 깨진 유리처럼 날카롭게, 그리고 서글프게 빛났다.
“그 사람은 사랑을 몰라, 이모. 이모는 분명 상처받게 될 거야. 나는 이모가 그러지 않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