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17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17화
루카의 말이 마냥 거짓이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만큼 루카의 말 한마디에 서린 무게가 무거웠다. 뼛속에 새겨 몇 번이고 곱씹었을 듯한 진심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뤼디거의 절절한 고백에 담긴 진심을 거짓이라 치부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 말하던 그의 속삭임이 그저 그의 삶의 방식에 짜 맞춘 고백일 뿐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뤼디거를 변호했다.
“하지만 루카……. 너무 네가 아는 것만으로 뤼디거 씨를 판단하는 건 아니니?”
“…….”
“사람이 사람을 모두 알고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야.”
설령 루카가 그의 복중의 진심을 전부 털어내어 들었다 하더라도, 아직 뱉어내지 않은 단 한 줌의 진심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이 과연 그 사람의 전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처음,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다 여겼다.
그들의 행동을, 대사를, 결심을 분석하여 그 사람이라면 이럴 것이다 지레짐작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짐작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들어맞은 적이 없었다.
모두 겉핥기였을 뿐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쓰인 활자만으로 그들을 모두 파악하기엔, 사람은 너무나도 다면적이었다.
‘나부터가 스스로의 속내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 확신할 수도 없는데.’
만약 루카가 단 한 번 배신의 기억으로 뤼디거에 대해 불신을 갖게 된 것이라면…….
나는 한참을 주저하다 말을 덧붙였다.
“설령 네가 미래를 안다 해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다 해도. 사람의 속내까지 모두 아는 건 아니야.”
루카가 회귀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입 밖으로 직접 꺼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루카의 낯을 살폈다. 부정의 기색 대신 자리하고 있는 것은 일렁이는 심란함이었다.
지금껏 따박따박 받아치던 루카의 입이 처음으로 다물렸다.
침묵에 되레 더 초조해진 나는 이불을 그러쥐었다. 두툼한 이불을 쥔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침묵의 무거움을 미처 견디지 못한 내 시선이 밑으로 떨구어졌을 때, 루카가 돌연 물었다.
“이모는 아저씨한테 밝혔어?”
“……뭘?”
“이모의 비밀.”
비밀이란 말을 듣기가 무섭게 심장이 철렁였다.
딱히 내가 빙의했다는 사실을 뤼디거에게 숨기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고백할 생각이기도 했고.
하지만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뇌리에 남아 계속해서 신경 쓰였다.
게다가…….
“그걸 알면 아저씨가 어떻게 할 거 같아?”
“…….”
“별생각 없을걸?”
그렇다.
내가 짐작한 뤼디거의 반응 또한 루카의 답과 같았다.
뤼디거는 내가 빙의를 했든 말든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가 처음 만난 순간의 유디트 씨는 누구입니까? 당신입니까? 그러면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제가 사랑한 것은 당신인걸요.’
뤼디거가 나에게 할 법한 말이 귓가에 선연히 들렸다.
그는 깊게 묻지 않을 것이다.
과연 그것이 나를 믿기 때문일까, 아니면 배려해서일까.
모두 아니다. 단지 흥미가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사랑한다 생각한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 다른 존재라는데 그렇게까지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마치…… 조금의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그게 정말 사랑이라고 생각해?”
루카는 정확히 내 두려움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애써 생각지 않고 있었던 사실이 수면으로 드러났다.
만약 뤼디거가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한참의 고뇌 끝에 나 또한 뤼디거와 같은 답을 택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나와 추억을 쌓아 올린 당신이라고.
융통성 없고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데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다소 답답한 당신이라고.
그런데도 내가 계속해서 찜찜한 것은, 뤼디거에게는 그 고뇌의 순간조차 없을 거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아냐. 이런 건 모두 내 짐작일 뿐이야. 방금 내 입으로 루카에게 말했잖아. 내가 아는 것만으로 뤼디거 씨를 판단하면 안 된다고.’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벌써 그의 반응을 짐작하여 답까지 내리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실제로 그의 반응이 내 추측대로 흘러갈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데도 혹시나 하게 되는 것은, 역시나 나에게도 오만한 구석이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뤼디거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그를 많이 사랑하니까. 그를 항상 지켜봐 왔으니까.
“아…….”
그제야 나는 루카가 뤼디거에게 왜 그리도 배신감을 느꼈는지, 그가 사랑을 모른다 믿어 의심치 않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멍하니 루카를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정말로 뤼디거 씨를 좋아했구나, 루카.”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루카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짚는 듯 푸른 눈이 짙은 심해처럼 물들었다.
열 살 어린애가 숨기기엔 너무나도 깊은 감정이 앳된 얼굴 아래서 요동쳤다.
‘뤼디거를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더 상처받았고……. 그리도 확신하는 거로구나.’
그런 루카가 안쓰러웠던 나는 손을 뻗어 루카를 끌어안았다.
가문의 후계자 싸움과 같은 더러운 일의 진상을 파헤치기에는 지나치게 작은 어깨였다.
그러고 보니 루카는 제 또래 중에서도 왜소한 편이었다. 하도 어른스러운 척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루카를 제대로 마주 끌어안아 준 적이 무척이나 드물었다.
평소라면 바르작거리며 품에서 벗어나려 했을 텐데, 지금은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그것이 내 질문에 대한 무언의 긍정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루카의 등을 토닥이는 한편, 나는 원작의 내용을 한 문장씩 떠올렸다.
암살자와 맞닥트린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토록이나 끈질긴 것은 처음이었다.
호위로 데려온 이들이 하나둘 낙오되고, 루카와 뤼디거가 타고 있는 마차 단 하나만이 남았다.
이대로는 언제 암살자들에게 둘러싸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루카는 도대체 언제 암살자들이 자신들을 따라붙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거듭되는 암살 시도 때문에 학교로 가는 날과 길을 비밀리에 택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이 길로 가는 걸 안 걸까?
몇 발의 총알이 마차를 뚫고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루카의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때, 루카의 맞은편에 있던 뤼디거가 창문 밖을 보았다.
그러고는 품의 피스톨을 점검하더니, 마차의 의자 밑에 있는 탄창까지 허리춤에 둘렀다. 뤼디거가 마부석을 향해 외쳤다.
“한스! 여기서 나는 내린다.”
“삼촌?”
루카는 의아히 물었다.
이곳은 나무가 울창한 숲이었다. 아무도 없는,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뒤를 쫓는 암살자들뿐이었다.
뤼디거는 루카의 질문에 답을 주는 대신 제 할 말만을 했다.
“먼저 학교로 돌아가라, 루카. 나는 여기서 추적을 끊고 가겠다.”
“하지만!”
뤼디거가 홀로 암살자를 상대할 생각이라는 걸 깨달은 루카는 크게 반발했다.
뤼디거가 뛰어난 군인이자 게릴라전에도 능하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지금은 그 이상으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루카는 뤼디거를 설득하려 했다.
“아냐. 삼촌. 우리 같이 가자. 응? 이대로라면…….”
“합리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반발하지 마라, 루카.”
“어떻게 반발하지 않을 수가 있어!”
루카는 직감적으로, 지금 뤼디거와 떨어지면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예언같이 날아온 확신이었다.
“차라리 여기서 암살자를 같이 해치우자. 내, 내가 도와줄게. 나 그래도 검술도 배웠고, 사격도 배웠잖아. 응?”
“네 실력으로는 짐만 될 뿐이다.”
“어떻게……. 어떻게 삼촌을 두고 가. 암살자들도 곧 따돌릴 수 있을 거야.”
“상황을 냉정하게 봐라. 내가 너에게 가르친 것들을 기억해.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루카가 애걸복걸했지만, 뤼디거는 매정할 정도로 단호하게 루카의 말을 잘라냈다.
뤼디거의 선택은 조카를 구하기 위해 암살자와 대적하는 삼촌, 그 자체였다.
뤼디거가 자신을 위해 희생하려 한다. 여긴 루카는 뤼디거의 냉정한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매달렸다.
“삼촌이 나 책임진다고 했잖아. 계속 나랑 함께해 준다고……. 나 혼자 살라는 듯이 말하지 마!”
“상황은 항상 바뀐다. 그에 익숙해져라, 루카. 그리고…… 이게 바로 내가 책임을 지는 방식이다.”
“이런 책임은 필요 없어!”
“네가 필요 없다는 것과는 별개다. 그리고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 널 설득할 시간이 없어.”
어린 루카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일그러졌다. 어린 조카의 오열 앞에서도 뤼디거는 냉정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애초에 뤼디거는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삼촌은 나를 친아들처럼 여기는걸. 다 나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그리 곱씹곤 했다.
루카는 평범한 부모 자식 사이가 어떤지 몰랐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부모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착한 아이가 되어 뤼디거의 기대를 만족시키고자 했다.
뤼디거가 시키는 일이라면 공부든 승마든 무엇이든 했고, 뤼디거가 주는 것을 그저 받기만 했다. 뤼디거에게 반발하는 것은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던 루카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어 뤼디거의 말에 반박했다.
뤼디거를 사랑하니까.
유일한 가족이니까…….
그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난 삼촌이랑 같이 살고 싶어……. 삼촌, 날 사랑하면 내 말을 들어줘, 제발. 응?”
“사랑? 난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다, 루카. 너 또한 마찬가지야.”
하지만 돌아온 것은 유난히도 매몰찬, 나뭇가지 사이를 스쳐지나온 겨울바람 같은 답이었다.
뤼디거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루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문장이 미처 완성되지 않고 하나씩 흩어졌다. 루카는 몇 번이고 곱씹어서야 뤼디거의 말을 되새길 수 있었다.
날……. 사랑한 적 없다고?
아, 아니야. 삼촌이 날 설득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걸 거야. 거짓말이야.
믿고 싶지 않았던 루카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거, 거짓말하지 마. 날 보내려고 거짓말하는 거지? 삼촌은 날…… 자기 자식처럼 생각한다고 했잖아.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