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24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24화
“…….”
“…….”
회의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비혼주의자라는 건 그래도 어느 정도 연애관과 결혼관이 서 있는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었다.
열 살 어린애가 아니라.
루카가 아무리 자기가 비혼주의자라고 주장해 봤자 ‘난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야’ 정도의 취급밖에 받지 못할 뿐이었다.
그 사실을 루카도 뒤늦게 깨달았는지, 루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필사적으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루카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와주진 않았다.
‘그러게 누가 내 연애 방해하래? 꼴 좋다, 김 루카!’
스물일곱의 이모가 열 살 조카에게 품기에 치졸한 꿍꿍이였지만, 이건 전적으로 루카의 업보였다.
“빈터발트 대령도 비혼주의자라고 들었지만, 결국은 레이디 마이바움에게 청혼하지 않았던가. 상황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니까, 경도 잘 생각해 보게.”
샤를로트는 느긋하게 대꾸했다.
얘도 역시 선왕의 피를 이은 왕족이라는 걸까. 루카의 거부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것에서 확고한 자기 주관이 느껴졌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 약혼이라니. 너에겐 너무 이르다, 샤를로트.”
국왕이 질겁하며 샤를로트를 말렸다.
그러고는 홱 고개를 돌려 선왕을 간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맨날 사고만 치는 아들놈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두 사람을 보고 있자 하니 누가 아버지고 누가 아들인지 혼란스러웠다.
“하여튼 아바마마, 제발 고정하시옵고 럼가트를 위한 결정을 내려주시옵소서.”
“내가 언제는 럼가트를 위하지 않은 것처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을 낸다!”
탕탕!
선왕이 무어라 말을 맺기 전, 왕이 의사봉으로 폐회를 선언했다.
이대로 회의를 계속 진행했다가 샤를로트와 루카의 약혼이 확정될까 불안했는지, 회의를 파하는 국왕의 행동은 무척이나 재빨랐다.
선왕은 제 아들의 답지 않은 기세에 입만 떡 벌리고 있었다.
항상 기죽어 지내던 아들의 때 아닌 반항기라도 목도한 얼굴이었다.
애초에 주제부터가 엉망이었던 왕족 회의는 그렇게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채 흐지부지 끝이 났다.
회의를 끝마치고 일어서는 왕족들의 표정은 구겨진 종이처럼 우글우글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충격 발언의 여파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로지 샤를로트, 그녀만이 인형처럼 예쁜 미소를 지은 채 방긋방긋 웃을 뿐이었다.
* * *
본디라면 왕도 선왕의 제안을 받아, 뤼디거와 내 결혼을 훼방 놓을 생각으로 만만이었을 것이다.
죠세핀의 신랑감으로 여전히 뤼디거를 탐내고 있었으니까.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 것 같지만 목소리에 미련이 뚝뚝 묻어나니 눈치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두 끝난 일이다. 샤를로트가 끌려 나온 일에 잔뜩 분개했기 때문이다.
나와 뤼디거를 찢어놓으려다가 애꿎은 샤를로트가 루카와 결혼하게 생겼으니, 훼방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샤를로트의 일로 다른 왕족들도 등을 돌렸다.
결국 선왕은 왕의 도움도,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된 상황이었다.
국왕에게 한 소리 들은 일로 잠시 기세가 주춤하긴 했지만, ‘그’ 선왕이 아니던가.
주변 눈치를 보는 일은 그다지 오래가지는 않았다.
선왕은 금세 기를 회복하곤 계속해서 나와 뤼디거를 방해하기 위한 방안을 찾느라 머리를 굴렸다.
‘으, 답답해.’
마음만 같아선 뤼디거와 사랑의 도피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랬다가 선왕의 트라우마가 재발하기라도 하면……. 할머니를 그렇게 보낸 일로 이를 갈고 있는데 나를 호락호락 놔줄 리가 없어. 군인을 풀어서라도 쫓을걸. 게다가 루카의 보호자가 둘 다 증발하잖아. 프란츠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어휴. 내가 봐준다, 봐줘.’
내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걸 알기는 할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알아줄 사람들이 아니었다.
물론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생각도, 가만히 있을 생각도 없었다.
뤼디거의 청혼을 받은 뒤 그 마음은 더 확고해졌다.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뤼디거는 더한 짓을 할 거야.’
그것은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역시 일단 프란츠를 처리해야 해……. 이사벨라가 물어온 정보를 어떻게 사용할까.’
역시 제일 쉬운 건 로이텐의 경우처럼 강제로 뤼디거와 결투하게 하는 건데…….
지금까지 봐온 결투는 별생각 없이, 자기 기분에 거슬리면 맘대로 저지르는 일처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나름 귀족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니 아무 이유 없이 맘대로 결투를 시킬 수도 없거니와, 프란츠가 거절 못 하는 상황이 되도록 판을 까는 것도 일이었다.
‘확 그냥 나를 미끼로 삼아? 어차피 버린 평판인데…….’
그렇게 고민하는 도중, 갑자기 빅토리아가 찾아왔다.
평소의 여유로움이 감도는 분위기와 달리 빅토리아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대가 좀 도와줘야겠어.”
“제가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빅토리아가 나를 도와주면 도와줬지, 내가 빅토리아를 도울 만한 일이 무엇인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빅토리아에게 지금껏 도움받은 일이 많기도 하고……. 무슨 일이든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야겠다. 나는 흔쾌히 답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요.”
“그럼……. 샤를로트와 이야기를 좀 나눠줄 수 있겠는가?”
“샤를로트 왕녀님이요? 제가요?”
나는 깜짝 놀랐다.
빅토리아의 고민 상대가 샤를로트라는 건 크게 이상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대화를 부탁한 건 전혀 짐작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 좀처럼 루카와의 약혼을 포기하지 않을 기세야. 고집을 부리더라고. 그렇다고 루카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데…….”
빅토리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손끝으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초조한 듯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에서도 상대가 은근히 눈치를 보게 만드는 것 같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어. 그런데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안 해.”
“하지만……. 제가 이야기를 나눈다고 과연 될까요? 솔직히 전 몇 번 얼굴만 마주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사이잖아요. 샤를로트 왕녀님과는 왕궁 연회 전에 딱 한 번 말을 건네본 게 전부였어요.”
“우리는 친형제라서 더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걸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친하지 않은 자네에게 더 쉽게 말할 수도 있겠지.”
빅토리아는 그리 말했지만 나는 회의적이었다.
오히려 내가 어쭙잖게 나섰다가 괜히 도화선에 불붙이게 되는 꼴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날 거듭 설득했다.
“게다가 자네는 루카 빈터발트의 모친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현재 샤를로트가 루카와의 약혼을 주장하고 있으니, 자네가 나서는 쪽이 좋아 보이네.”
저기, 마치 시어머니 입장에서 깽판을 놓으라는 뜻처럼 들리는데요…….
“좀 험하게 굴어도 괜찮네. 그 고집을 뚝 꺾어주기만 하면 돼.”
아니, 그렇게 예쁘고 착한 왕녀에게 어떻게 험하게 굴어요!
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빅토리아를 바라봤지만, 빅토리아는 때 아닌 샤를로트의 반항기에 충격을 받은 듯 멍할 뿐이었다.
“원래 착한 아이인데……. 왜 갑자기…….”
나직한 한숨과 함께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내젓는 그녀에게선 짙은 피로감이 절로 느껴졌다.
그토록 빅토리아의 심려가 크다 보니, 나는 일단 말은 해보겠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루카가 그렇게 샤를로트와의 약혼은 말도 안 된다 야단법석을 피웠는데, 루카를 생각해서라도 이 약혼은 막아야겠지……. 어휴. 나는 이렇게 협조적인데 말이야.’
나는 혀를 찼다. 내가 이러했다며 루카에게 생색을 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정말로 약혼시킬 생각이었냐며, 이모가 돼서 당연히 막아야 하는 것 아니냐 뻔뻔스레 주장할 루카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 * *
눈앞에서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는 샤를로트를 보며,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였다.
빅토리아의 말대로 자리를 마련하긴 했는데, 막상 마주 앉으니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 난감했다.
그때 샤를로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큰 언니가 부탁했나요?”
“네?”
“레이디 마이바움께서는 이렇게 나서는 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잖아요.”
그리 말하며 차로 입을 축이는 모습은 열 살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어른스럽다고는 생각했지만, 사고 능력이나 눈치가 어른 뺨치네…….’
나는 긴장했다.
그러고는 샤를로트를 열 살 어린애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루카도 그랬다. 어른스러운 아이들을 아이처럼 대하고 설득하려고 해봐야 씨알도 먹히질 않는다.
그냥 어른이다 생각하고 반응하는 게 속 편했다.
‘그렇다고 해서 빅토리아가 바라는 대로 너는 우리 루카랑 어울리지 않아! 이럴 수도 없고……. 일단 왜 루카와 약혼하고자 하는지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이야.’
나는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의뭉스레 답을 넘겼다.
“샤를로트 왕녀님을 걱정하는 사람이 어디 빅토리아 왕녀님뿐일까요. 주변이 시끌시끌하답니다.”
“그렇게 당황할 일인가요? 어차피 언젠가는 벌어질 일인걸요.”
“그것도 다 시기가 있는 법이지요. 사람도 언젠가는 죽지만, 그것이 당장 내일이라면 당황하기 마련이지요. 왕녀님의 주변 사람들은 지금, 마음의 준비가 채 되지 않은 상황이실 거예요.”
나는 넌지시 샤를로트의 분위기를 살폈다.
살짝 내리깐 속눈썹 아래 연녹색 눈동자가 알 수 없는 빛으로 일렁였다.
“샤를로트 왕녀께서는 갑자기 왜 약혼에 긍정적인 태도이신가요? 선왕께서 그리 말씀하셨기 때문인가요?”
“물론 그것도 있지만……. 애초에 생각하고 있던 일이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