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25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25화
“애초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라고요?”
나는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되물었다.
“루카를 그렇게 좋아하고 계신 것 같지는 않았는데요. 그리고 설령 좋아하시더라도…….”
“그런 건 아니에요. 빈터발트 경에게는 미안하게 됐네요.”
루카 이야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샤를로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샤를로트의 얼굴에 순간 앳된 표정이 어렸다. 말을 해도 좋을지 말지 잠시 고민하는 낯이었다.
재촉할까, 아니면 좀 더 기다릴까.
괜히 재촉했다가 도로 입을 다물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침묵을 택한 나는 가만히 샤를로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끝에 샤를로트가 말했다.
“제가 빈터발트 경과 결혼하면 아바마마께서 굳이 죠세핀 언니를 결혼시키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네?”
여기서 왜 죠세핀 이야기가 나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멍청히 되물을 뿐이었다.
“죠세핀 언니는 결혼하기 싫어해요. 말리나 고모님처럼 살고 싶어 하죠. 가족들과 함께요.”
뤼디거와의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고, 은연중에 뤼디거를 다른 여자와 엮어주려 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애초에 결혼 의사가 없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아바마마의 생각은 달라요. 그래도 책임져 줄 남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거든요. 그래서 죠세핀 언니를 믿음직한 상대와 결혼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샤를로트 왕녀님이 루카와 약혼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아바마마가 죠세핀 언니를 결혼시키려는 건, 저를 책임지기 위해서거든요.”
샤를로트는 쓰게 웃었다. 열 살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지친 웃음이었다.
“절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신경 쓸 일이 많기에, 죠세핀 언니를 그런 식으로 다른 이에게 맡기려 하는 거예요. 한마디로 저와 언니 중, 저를 택한 거죠. 제가 막내니까……. 제가 어리니까.”
그건 샤를로트 탓이 아니다.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차마 말을 하지는 못했다.
생각보다 순순히 샤를로트의 진심을 듣게 되었지만, 마음이 편해지기는커녕 돌덩이가 들어 앉은 것처럼 더욱 묵직해질 뿐이었다.
“죠세핀 언니는 분기별로 드레스를 사지 않아도, 그저 가족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거예요. 하지만 아바마마 생각은 그렇지 않죠. 언니가 분기별로 드레스를 사고, 보석을 맞추며 항상 부유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빈터발트 대령을 신랑감으로 점찍은 거고……. 빈터발트 가가 부유하긴 하잖아요.”
그리 말하며 샤를로트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잡아 올렸다.
한껏 어른스러운 척하고 있지만 본질은 아이이기 때문일까, 미처 숨기지 못한 순수함이 언뜻언뜻 보였다.
“다행히도 빈터 발트 대령이 레이디 마이바움에게 청혼한 덕에 죠세핀 언니가 자유로워지긴 했지만…… 당분간일 뿐이죠. 아바마마는 다른 신랑감을 찾을 거예요.”
샤를로트는 양손으로 찻잔을 쥐었다.
손이 어찌나 자그마한지, 양손으로도 찻잔이 전부 감싸이지 않았다.
샤를로트는 찻잔 바닥이 보일 정도로 내려간 찻물의 표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곤 마치 마음을 다잡듯 결연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제가 빈터발트 경과 약혼하게 되면, 저를 책임져 줄 가문이 생기는 것이니 아바마마께서도 죠세핀 언니를 결혼시키고자 안달하진 않으실 거예요. 그래서 제가 빈터발트 경과 약혼하고자 하는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다.
자기는 괜찮다며 말갛게 웃는 얼굴과 마주하니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자기희생적인 태도는 지나치게 어른스러웠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원작에서는 그저 영민하고 똑똑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샤를로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네가 그 모든 걸 책임지려 할 필요 없다고, 너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그 누구도 네 희생을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은 그저 타인의 입장일 뿐이었다.
타인이 한마디 말을 얹는 건 쉽지만, 과연 샤를로트의 마음에 얼마나 닿을까.
지금껏 가족을 위해 자신이 무얼 하면 좋을지 곱씹고 곱씹어 왔을 열 살 소녀를 섣부른 말로 상처 주고 싶지 않았던 나는 한참 동안 말을 골랐다.
그러는 사이 샤를로트가 자책 어린 말을 중얼거렸다.
“만약 제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 없이, 언니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었을 텐데…….”
“죠세핀 왕녀님은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예요.”
“……알아요. 저도.”
“왕녀님은 좀 더 뻔뻔해지셔도 돼요. 뤼디거 씨가 루카를 데리러 왔을 때, 루카가 어땠는 줄 알아요? 절 엄마라고 불렀어요. 결혼도 안 한 처녀를 엄마라고 우겨서 데려갈 속셈이었다니까요?”
나는 과장스럽게 말했다.
그런 내막에 대해 처음 듣는 샤를로트는 안 그래도 둥근 눈을 더 크게 뜨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빈터발트 경이 그랬다고요? 그 때문에 처음 사교계에 레이디 마이바움이 빈터발트 경의 엄마로 소개된 건가요?”
근데…… 다시 생각해도 참 괘씸하네.
뤼디거 씨가 내 말을 믿어줘서 바로 해명할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잘못했다가는 완전 못된 이미지로 낙인찍힐 뻔했잖아.
뭐, 루카가 회귀했다 치면 그런 선택을 한 것도 이해되지만…….
하여튼 잘 풀려서 천만다행이다. 그런 복잡한 생각들을 웃음으로 감춘 채,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모로는 루카를 지켜줄 명분이 없는 것도 있었고요.”
“……빈터발트 경은 사랑받고 있네요.”
“샤를로트 왕녀님도 사랑받고 있는걸요.”
샤를로트는 배시시 웃었다. 죠세핀과 가족들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샤를로트는 슬쩍 내 눈치를 봤다. 속내를 털어놨기 때문일까. 처음보다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착각은 아닌지, 이내 샤를로트가 숨겨왔던 사실을 고백하듯 조용히 속삭였다.
“제가 지금껏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한 말들을 레이디 마이바움 당신에게 말한 것은, 당신이 저와 무척 비슷한 입장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왕녀님과요?”
“네.”
샤를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샤를로트가 비슷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끽해야 떠오르는 것은 집안의 막내라는 것 정도?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샤를로트는 담담히 말했다.
“아바마마도, 언니들과 오라버니도 모두 저를 보며 어마마마를 그리거든요. 제가 어마마마와 그렇게 닮았나 봐요.”
“아…….”
나는 나직이 탄식했다.
타인의 그림자를 항시 지고 있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로 인해 받는 것이 오로지 호의뿐일지라도.
내가 사랑받는 까닭을 타인에게서 찾게 되는 것은 나도 모르는 새 자존감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다 큰 성인인 나도 문득 그런 무력함에 빠져드는데, 샤를로트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삐뚤어졌다 해도 이해가 갈 만한 일이었다.
“다들 절 너무 애지중지해서……. 그래서 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고자 노력해요.”
하지만 샤를로트는 너무 곧고 선량한 아이였다.
샤를로트는 부당함 대신 의젓함을 배웠고, 모든 것이 주어진 상황에서도 절제를 배웠다.
루카가 어른처럼 구는 것은 회귀했기 때문으로 추측되지만, 샤를로트가 어른처럼 구는 것은 그만큼 주변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니 더욱 안타까웠다.
샤를로트의 발그레한 뺨에는 솜털도 채 가시지 않았다. 무릎 위에 곱게 놓인 손은 내 손바닥만 했다.
과연 죠세핀은 샤를로트가 이리 생각하는 걸 알고는 있을까.
샤를로트와 만나보라 부탁한 것은 빅토리아였지만, 우선은 죠세핀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샤를로트에게 어색한 미소로 화답했다.
* * *
“면담 요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녀님.”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지 모르겠군. 어지간한 일이라면 언니가 다 해결해 줄 텐데 말이야.”
인사에 답하는 죠세핀의 말투가 뾰족했다.
왕족 회의에서 잠시나마 내 편을 들었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얘는 왜 이렇게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하지만 굳이 이유를 알 필요는 없다.
그녀의 호의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나는 천연덕스레 웃으며 말했다.
“제 일이라면 빅토리아 왕녀님께서 해결해 주시겠지만, 안타깝게도 제 일이 아니라서요. 샤를로트 왕녀님에 관한 일이에요.”
샤를로트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죠세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샤를로트의 때 아닌 행동에 마음을 졸인 건 죠세핀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죠세핀이 날카롭게 물었다.
“샤를로트가 왜? 그러고 보니 걔가 루카와 약혼하겠다 했던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제 고작 열 살 어린애인걸.”
“샤를로트 왕녀님께서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죠세핀 왕녀님께서는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고는 차근차근 샤를로트에게 들은 것에 대해 죠세핀에게 전했다.
내가 말을 할수록 죠세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하……. 콩알만 한 꼬맹이가 어디서 어른 행세를 하려고…….”
죠세핀은 기가 찬 한숨을 내뱉었다.
샤를로트를 떠올리며 골머리를 싸매는 그녀에게서 나도 모르게 라리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일단은……. 샤를로트가 루카와 약혼하고자 하는 걸 저지해야 하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 또한 동감입니다. 하지만 일단, 왕녀님께서 샤를로트 왕녀님과 대화를 해보셔야 할 것 같네요. 제가 말씀드리고자 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이만.”
목적을 끝마친 나는 미련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엔 빈터발트 가의 꼬인 가정사만 해결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점점 럼가트 왕족들까지 케어하고 있다 생각되는 건 내 착각일까.
하지만 어쩌겠어. 이쪽도 따지고 보면 내 가족인데.
그리 생각하며 내가 죠세핀의 방을 나서려고 한 순간, 뒤에서 죠세핀의 목소리가 나를 붙들었다.
“잠깐, 그대에게 할 말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