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2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26화
나는 느릿하게 돌아보았다. 죠세핀의 호박색 눈동자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죠세핀은 잠시 생각에 골몰했다. 나는 오도카니 선 채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생각을 정리한 죠세핀이 한참 끝에 운을 뗐다.
“내가…… 자네를 도와주면 어떻겠는가.”
“저를요?”
“그래. 자네와 빈터발트 대령이 잘될 수 있도록 말이야.”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껏 나를 못마땅해했던 그녀가 갑자기 도와준다니, 순순히 믿기가 힘들었다.
“전 왕녀님께서 절 별로 달가워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요.”
“여전히 달갑진 않아. 아니, 오히려 처음보다 더욱 싫어졌지. 자네는 너무 쉽게 많은 것을 얻었거든.”
“왕녀님처럼 세상에 모든 걸 다 가지신 분도 타인이 무언가를 쉽사리 얻는 것이 못마땅하신가요?”
“타인이 얻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지. 자네가 얻은 것은 내가 그리도 바라 마지않던 자유고.”
그러고 보니 샤를로트가 말하길, 죠세핀이 독신으로 살고자 한다 했지…….
그러니 선왕이 부득불 끼고돌려 하는 내가 얄미웠던 걸까.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절 도와주신다고 하신 거죠?”
“나는 나 나름대로 목표로 하는 게 있으니까. 그걸 위해선 빈터발트 대령과 자네가 잘되는 쪽이 좋거든.”
죠세핀은 주절주절 제 사정에 대해 말하기를 원치 않는 것 같았지만, 내 나름대로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샤를로트가 루카와 약혼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선상의 일이겠지.
최대한 독신으로 사는 왕족의 수를 줄이려는 것일 터였다.
더군다나 나와 얽힌 것이 뤼디거이기 때문에, 그녀로선 최대한 이 청혼이 성사되는 쪽이 이득이었다.
“뭐, 굳이 내 도움이 필요 없다면 상관없지만. 필요 없다는 도움까지 줄 정도는 아니거든.”
딱 잘라 말하는 그녀의 태도가 제법 냉정했다.
나는 골몰했다. 죠세핀의 도움이 필요 없다 내치기엔, 내 코가 석 자였다.
‘하지만…… 어떤 도움을 요청하면 좋을까? 나중에 도움 줄 일이 있다면 부탁하겠다고 미뤄 둘까?’
고민 끝에 무언가가 퍼뜩 떠올랐다. 좋아. 이거라면…….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지만 상황을 헤아려 보니 꽤 괜찮았다. 아니, 완벽했다.
“그러면…….”
한참의 고민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혹여나 밖에 말이 새 나갈까, 그녀의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였다.
내 이야기를 들은 죠세핀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
그녀는 자신이 들은 것을 다시 한 번 곱씹더니,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심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죠세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 제안을 수상쩍어하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풀풀 풍겼다.
“자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당신은 제가 이 자리를 쉽게 얻었다고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답니다.”
나는 빙긋 웃었다.
이 일이 잘만 풀리면 프란츠를 완벽하게 몰락시킬 수 있을 터였다. 그 미래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 * *
사정을 알게 된 죠세핀과 빅토리아가 샤를로트를 앉혀두고 거듭 설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샤를로트가 계속해서 신경 쓰였던 나는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나는 죠세핀에게 부탁한 일에 대한 답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도중, 불쑥 찾아온 로라가 돌연 눈치를 주었다.
“마님, 산책 시간이에요!”
잠깐, 이건……!
익숙한 신호다. 나는 산책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라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내 시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은 걸까. 로라가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간신히 체통만을 챙긴 채 그길로 쏜살같이 왕궁의 버려진 정원으로 달려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구두 굽이 바닥을 박차고, 나는 정원에 도달하는 그 순간까지도 쉼 없이 뛰었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으슥한 왕궁 정원 한구석에 오도카니 서서 날 기다리고 있는 낯익은 뒷모습. 뤼디거였다.
“뤼디거 씨!”
나는 정원수 밖으로 새 나가지 않고 오로지 뤼디거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뤼디거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개가 한 달 동안 출장 나갔다 돌아온 주인을 맞이하듯, 그의 얼굴에 애정이 가득 번졌다.
지난번과 같은 낡은 작업복 차림새는 아니었다. 물론 평소의 장교복도 아니었다.
이번엔 평범한 제복 차림새로 존재감을 죽이려 한 모양이지만, 역시나 실패다.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남자가 나를 향해 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유디트 씨.”
“저도요. 그런데…… 혹시 무슨 일 있나요?”
“네. 유디트 씨가 무척 보고 싶었습니다.”
아……. 나를 보고 싶었구나.
그래서, 그게 끝?
뤼디거는 말간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답했다.
어찌나 당당했는지, 나도 모르게 그렇구나 할 뻔했다.
“아니, 보고 싶을 때마다 오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비밀통로인데…….”
“그래서 저도 수백 번 참고 한 번 온 겁니다.”
수백 번 참았다니 할 말이 없네……. 나는 뤼디거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뭐, 어차피 온 거. 쓸데없는 일로 실랑이하며 시간 낭비하기는 싫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래도 이렇게 뵈니 좋네요.”
때마침 시야에 벤치가 잡혔다.
그러고 보니 원래 여기에 벤치가 없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내가 달려온 탓에 뒤늦게 쫓아 온 로라가 저 멀찍이서 우리를 발견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로라는 벤치와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눈을 찡긋했다.
설마 로라가 가져다 둔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역시 로라라니까.’
나는 로라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이고는, 뤼디거의 팔을 잡고는 벤치로 향했다. 뤼디거는 고분고분 나를 따랐다.
내가 의자에 앉기 전, 뤼디거가 황급히 품에서 손수건을 꺼 내더니 내가 앉을 자리에 깔았다.
이런 걸 보면 참 예의도 바르고 상식적인데……. 어쩌다 그런 앞뒤 안 보는 직진 전차남이 되어버린 걸까. 참 알 수가 없었다.
뤼디거는 손수건만 깔아주고는 멀뚱히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같이 앉아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뤼디거는 바로 내 옆에 얌전히 착 앉았다.
그런데…… 미묘하게 거리가 가깝다?
저 큰 덩치가 팔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까지 다가와 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큼.”
뤼디거도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했는지, 머쓱한 듯 헛기침을 했다.
비스듬히 돌린 표정은 긴장한 것처럼 딱딱했다.
곤란한데…….
이러면 골려주고 싶단 말이지.
장난기가 돈 나는 슬쩍, 뤼디거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뤼디거의 팔이 바로 딱딱하게 부풀었다. 힘이 들어갔다고 바로 팔 근육이 긴장하다니.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뤼디거의 허벅지를 토닥였다.
딱히 음흉한 속내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내 손이 닿는 제일 가까운 곳이 허벅지였을 뿐이다!
하지만 머리를 기대는 것만으로도 긴장하던 뤼디거가 허벅지의 접촉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그는 마치 의자에 앉혀놓은 레고처럼 딱딱하게 변했다.
나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만나니까 좋네요……. 그러고 보니 청혼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거죠?”
“그, 그렇습니다.”
뤼디거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청혼에 관한 이야기도 여기서 제일 처음 나왔었는데……. 감회가 새롭네요.”
“그, 그렇습니다.”
평소엔 또박또박 잘도 대꾸하던 뤼디거가 고장 난 것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이야, 내가 살다 살다 플러팅 머신이 고장 나는 꼴도 보네…….
신기했던 나는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그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도대체 그런 청혼은 어떻게 생각한 건지, 다른 이들이 도와준 건지…….
처음에는 계속해서 그렇습니다로 일관하더니, 조금 있으니 한 마디씩 멀쩡한 대답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청혼 말입니까? 유디트 씨를 생각하니 절로 떠올랐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당신이 제 청혼을 받았다는 걸 알게 하고 싶었고 말입니다. 그리고 유디트 씨 당신에겐 보라색이 정말 잘 어울립니다. 고귀하고 우아한 색이죠.”
“도와주다뇨. 저는 그들에게 의뢰를 맡겼을 뿐입니다. 그들은 적법한 대가를 받고 받아들인 것일 뿐이고요.”
근황에 관해 원하는 답을 받았는데, 왜 이리 불만족스러운 것일까?
사람 심보라는 것이 참으로 고약하여, 뤼디거가 멀쩡해지니 그를 다시 당황하게 하고 싶은 욕심이 치민 모양이다.
오랜만에 연인을 만난 사람이 할 법한 생각은 아니지만…….
아니, 뤼디거가 당황했다고!
엄청 희귀한 일이란 말이야!
나는 어떻게 해야 뤼디거를 또다시 당황하게 할 수 있을지 골몰했다.
그때,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요즘 머리가 아주 팽팽 잘 돌아간단 말이야.’
아무래도 탁구공처럼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주변 상황에 맞추기 위해, 나 또한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니는 쪽으로 진화한 모양이다.
너무 엉큼한가 싶었지만 뭐 어때. 목적만 달성하면 됐지.
나는 혹여나 뤼디거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않게 조심하며 슬쩍 화두를 꺼냈다.
“우리 오랜만에 이렇게 만나기도 했으니, 서로에게 바라는 점을 말해보는 건 어때요?”
“바라는 점 말입니까?”
“간단한 거라도 좋아요. 서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좋습니다. 그냥 바라는 걸 말하면 되는 겁니까?”
“음…….”
나는 일부러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막 생각났다는 듯, 활짝 웃으며 제안했다.
“이건 어때요? 들어줄 수 있으면 패스. 들어줄 수 없으면 벌칙과 함께 게임 끝! 인 거죠.”
“그런데 이건 내기에 포함 안 되는 겁니까?”
내가 내기라면 기를 쓰고 말리던 일이 떠올랐는지 뤼디거가 물었다.
하, 하지만 그건 어린 루카가 내기에 맛들였다가 도박으로 빠질까 싶어서였고. 이건 상황이 다르다고!
자기 합리화를 끝마친 나는 뻔뻔스레 답했다.
“원래 연인 사이엔 내기 같은 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