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27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27화
“좋습니다. 저부터 할까요.”
연인이라는 말에 신이 난 뤼디거는 순순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가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엄숙히 말했다.
“유디트 씨 옷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제가 고르게 해주십시오.”
조금의 딜레이도 없는 것이 마치 준비된 말 같았다.
아니, 내 패션 센스가 그렇게 구려? 나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벌써 판을 포기할 수는 없다. 원대한 욕망이 있던 나는 고진감래를 기리며 힘겹게 대답했다.
“……좋아요.”
하지만 나만 곤란할 순 없지.
“저한테 선물 사올 때, 양손에 들 수 있을 정도로만 사오기.”
지금까진 하인들을 시켜 줄줄이 상자째 날라 왔지만, 이제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선물의 한도가 대폭 준 탓일까. 뤼디거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뤼디거는 한참 끝에 신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래. 이 정도로 포기하긴 그 또한 이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점점 내기, 아니, 게임의 양상은 블러핑전으로 변해갔다.
“유디트 씨는 제가 선물을 드렸을 때 따지지 않기.”
“좋아요. 뤼디거 씨는 선물 사올 때 이유 하나씩 대기.”
“좋습니다. 유디트 씨는 저와 같이 주말마다 공놀이 해주기.”
“좋아요.”
그렇게 한참의 대화가 핑퐁이며 진행됐다. 그사이에 너무 많은 약속이 쌓여, 나중에는 종이에 일일이 써둬야 할 정도였다.
나는 계속해서 눈치를 보며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이쯤 되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벼르던 회심의 한 수를 던졌다.
“좋아요. 그럼 입맞춤은 한 달에 한 번만 하기.”
“좋습……. 네?”
습관처럼 좋다고 말할 뻔한 뤼디거는 뒤늦게 나의 제안을 곱 씹고는 화들짝 놀랐다.
“이, 입을 맞춰도 되는 겁니까?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이요? 아니, 물론 입맞춤만으로도 과분하지만, 그래도…….”
사귀는 사이에, 청혼까지 해놓고는 입 맞추는 게 과분한 건 또 뭐야?
나는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뤼디거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패닉에 빠진 뤼디거는 쉬이 답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나는 기세등등하게 턱을 치켜 들었다.
“이건 못 들어주겠죠?”
“반칙입니다. 너무합니다.”
뤼디거의 얼굴이 곤혹스러움으로 뒤덮였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눈에 띌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확실히 알았다. 뤼디거는 이런 종류 꼼수 쓰는 게임은 하면 안 돼. 완전 쥐약이라니까?
혹시나 해서 해본 건데 역시나였다.
나는 히죽히죽 웃고 싶은 심정을 애써 누르며, 짐짓 엄하게 엄포를 놓았다.
“반칙이긴요. 그래서, 좋아요? 아니면 벌칙?”
“……벌칙이 무엇이든 감내하겠습니다.”
뤼디거는 결연히 고개를 숙였다. 출정 명령을 받아도 이것보단 덜 엄숙할 것 같았다.
아, 정말. 은근히 놀리는 재미가 있는 남자라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뤼디거 앞에 우뚝 서서 말했다.
“자, 고개 들어봐요.”
“네.”
“눈 감아요.”
“네.”
뤼디거는 고분고분 내 말을 따랐다.
내가 뭘 하려고 하는지 짐작은 할까. 내가 아는 뤼디거라면 전혀 못 할 듯싶었다.
나는 가만히 뤼디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항상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웠던 그의 얼굴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누구 애인인지, 내리깔린 짙은 속눈썹이 유난히도 길었다.
정말 부럽네. 나는 속눈썹도 색이 엷어서 아무리 길고 풍성해 봤자 눈에 잘 안 띄는데.
‘잘생기긴 정말 잘생겼단 말이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보게 되었다.
자, 잠깐. 이거 본방으로 들어가려니 생각보다 외모 파괴력이 만만치 않은데……?
하지만 이러다가는 평생 호호 웃으며 손만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입맞춤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과분하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뤼디거의 말만 들어도 각이 나왔다.
그게 아니라면 첫 키스 분위기 조성을 위한 한 달 프로젝트 같은 말도 안 되는 허황한 짓을 꾸미든가.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았다!
‘좋아. 유디트. 네가 행동해야 해. 너밖에 없다.’
그래도 뤼디거의 얼굴을 보면서는 차마 못 할 것 같았다.
나는 두 눈 질끈 감고 그의 입술이 있을 거라 짐작되는 곳에 내 입술을 내리눌렀다.
다행히 위치가 틀리진 않은 모양인지, 내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여린 살이 살과 맞닿는 느낌이 들기가 무섭게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나는 그에게서 입술을 뗐다.
원래 생각한 건 이런 단순한 뽀뽀가 아니라 막……. 그런 거였는데.
이 단순한 뽀뽀만으로도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어휴. 애인하고 뽀뽀 한번 트려고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네.’
내가 부끄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눈을 뜬 뤼디거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먼저 입 맞춰놓고 부끄러워한다는 건 왠지 자존심이 상 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뻔뻔스레 툭 말을 뱉었다.
“벌칙이에요.”
“…….”
뤼디거가 뭐라고 반응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그는 멍한 눈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괜히 나댔나 싶었던 나는 괜스레 찔려 덧붙였다.
“그냥 장난이었어요. 벌칙이라 해서 뭐 거창한 걸 할 리 없잖아요. 제가 당신 딱밤을 때리겠어요, 뭘 하겠어요?”
해봤자 내 손만 아프겠지…….
나는 구시렁거리며 뤼디거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충격이 심한 모양이었다.
뤼디거가 과연 벌칙으로 뭘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까지 충격받을 건 없잖아!
뤼디거가 너무 충격받아서 내가 더 충격이었다.
어쩌면 뤼디거는 첫 뽀뽀는 사귀기 시작한 뒤 6개월 뒤, 달빛이 가득한 밤 테라스에서 와인 한 잔과 함께, 라고 로망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결혼식장에서 엄숙한 주례사 이후라든가.
그리고 내가 한 일은 바로 그 첫 뽀뽀에 대한 로망을 산산조각 낸 거고.
‘그리 생각하니 좀 미안한데…….’
내가 그렇게 미약한 죄책감에 휩싸여 있는 사이, 뤼디거의 초점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러더니 돌연 뤼디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눈높이가 역전됐다.
커다란 산처럼 앞에 드리워진 뤼디거의 덩치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저…….”
하지만 내가 뒷걸음질 치는 만큼 뤼디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쫓기는 사람처럼 뒷걸음질 치는 속도가 빨라졌다. 뤼디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냥감을 쫓는 사냥개처럼 나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지금 이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던 나는 뤼디거를 진정시키려 입을 열었다
“뤼디거 씨, 잠, 잠깐…… 읍!”
하지만 뤼디거의 입술이 내 말을 고스란히 삼켰다.
뤼디거의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덫에 걸린 사냥감처럼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무력하게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싫은 기분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내 손이 나도 모르게 그의 팔뚝을 잡았다. 마치 매달리듯이. 실제로 순간 다리가 풀려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뽀뽀 한 번에 당황해서 숙맥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돌변하는 건 반칙이잖아……!
능숙한 입맞춤은 아니었다. 서툴고, 투박하고…….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몇 번의 숨이 얽혔을까.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쯤 해서 놔줄 만도 했지만, 그는 꽤 집요했다. 마치 사탕을 처음 혀에 댄 어린아이 같았다.
그는 내 혀끝에 다디단 과육이 있는 것처럼 좀처럼 놓아주질 않았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나는 뤼디거에게서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어느새 벽 끝까지 온 걸까. 비틀거리는 내 등에 벽이 닿았다.
나는 벽에 기댄 채 숨을 몰아 쉬었다.
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떠 뤼디거를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질척한 입맞춤을 건넨 당사자인 뤼디거가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 궁금했다.
하지만 내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대로 뤼디거가 나를 다시 한 번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내 가슴에 맞닿은 그의 가슴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의 심장 고동 소리가 내 심장까지 울렸다.
그렇게 나를 부둥켜안은 채 한참을 씨근덕거리던 뤼디거는 나직이 속삭였다.
“저를 이렇게까지 휘두르는 사람은 단언컨대 인생에 있어 당신 하나뿐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에 걸리는 바람 소리처럼 내 귓가를 간질였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가슴을 떨리게 했던 중저음이다. 그걸 이런 순간 들으니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뤼디거가 원체 단단히 끌어안고 있던 덕에 바닥에 주저앉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신에게 휘둘리는 이런 제 자신이 낯설지만…….”
뤼디거의 코끝이 내 이마를 간질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뤼디거와 시선이 마주쳤다.
살얼음 낀 겨울 호수 같은 청회색 눈동자에 내가 고스란히 비쳤다.
“나쁘지 않은 기분입니다. 아니, 오히려 좋아요. 지금껏 흑백으로만 보던 삶에 색이 덧입혀진 것 같습니다.”
그리 말하며 뤼디거는 빙긋 웃었다. 입가에 스며든 미소가 마치 레모네이드를 머금은 듯 청량했다.
아까 그런 짐승 같은 입맞춤을 했던 사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활짝 웃고 있는 그는 이제 막 첫사랑을 깨달은, 여름 햇살 아래의 열여섯 살 소년처럼 보였다.
그 때문일까.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순종적으로 내 손에 이끌렸다.
그리고 입술이 또 한 번 가까워졌다. 두 번째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