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3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3화
설레긴 개뿔이. 거짓말인 거 티 다 난다.
뤼디거의 말만 들으면 내가 이름을 허락한 게 아니라 교제라도 허락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뤼디거의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들뜬 기색이 있었더라면, 나도 설마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의 고저도 없는 덤덤한 목소리란!
입 발린 소리를 잘 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꿋꿋이 하는 게 웃겼다.
입술에 꿀 바른 듯한 말과는 한없이 거리가 멀 것 같은 사람이 무뚝뚝한 낯으로 오그라드는 발언을 할 때마다 돋는 닭살에 내 팔이 남아나질 않았다.
원작의 이미지도 그 괴리감에 한몫했다.
루카 입장에서 서술된 소설에서 뤼디거는 한없이 어른스럽고 무게 있고 과묵한 남자였다.
게다가 군인 출신이니만큼 직업에서 느껴지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지 않은가.
애초에 타인에게 아첨 따위를 할 필요가 없는 남자기도 했고.
뭔가 나한테서 얻어낼 게 있나?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빙 돌아가는 전법을 쓸 리가 없는데…….
그냥 바라는 게 있으면 바라는 게 있다 말하고, 그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불하는 것이 뤼디거 빈터발트의 스타일이었다.
잘생긴 외모도 그렇고, 이렇게 가끔 툭툭 내뱉는 말도 그렇고.
여러모로 원작의 그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이상한 발언에 신경 쓸 만한 기력이 없었다.
나는 소파에 늘어지듯 기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 내가 계속 피곤해하는 건 잠을 제대로 못 잔 탓도 있었다.
왜냐면 이번 빈터발트 행 기차에서 암살자가 등장하는 이벤트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큰 문제가 생기진 않고, 바로 뤼디거에게 제압되어 실패하지만…….
그래도 막상 눈앞에서 펼쳐질 총격전을 생각하니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나마 암살자가 등장하는 신이 여행 중반이라서 다행이지. 초반부터 들이닥쳤으면……. 어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겨울 숲의 주인」의 초반 부분은 상당히 힐링물로 흘러간다.
이모 유디트의 학대를 받았던 루카가 빈터발트에 가서, 삼촌과 조부의 지원 아래 의젓한 소공자가 되어가는 과정이 대부분이다.
복수극다운 면모가 보이는 건 그 이후였다.
원래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졌을 때의 낙차가 큰 법 아니던가.
겨울 숲은 루카를 제일 높은 곳으로 올려놓고는, 행복의 절정의 순간에서 바로 등을 떠밀어 버린다.
뤼디거의 죽음, 그리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이어지는 암살 시도…….
이번 기차 여행에 있을 암살 시도는 앞으로의 수많은 수난을 암시하는 떡밥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별문제 없이 흘러갈 이벤트지만, 여기서 그 암살자를 생포하면 앞으로의 일이 수월하게 풀릴지도 몰라.’
정황상 뤼디거의 사촌 프란츠가 보낸 암살자가 확실한데, 제압하는 과정에서 죽어버리는지라 배후를 추적할 물증을 잡지 못했다.
그랬던 만큼 만약 그를 생포할 수만 있다면…….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암살자의 생포는 일단 염두에 두고 있는 정도로만 하자. 괜히 처음부터 나대다가 루카가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 * *
큰 소리를 내며 경적을 울린 기차의 바퀴가 느릿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창밖의 풍경이 서서히 바뀌었다.
오래지 않아 루카가 돌아왔다.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별일 없었어.”
루카는 툴툴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대답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일에 관해 입을 꾹 다무는 모습을 보면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조금 서운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 끌려 와서 이러고 있는데.’
그래도 생활 자체는 풍족하고 여유로운지라, 마냥 루카를 원망하기도 좀 그랬다.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만 빼면 완벽한 백수의 삶이 아닌가.
유디트로서의 한 달을 살아본 경험이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 세계에서 평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냥 편한 일이 아니라는 걸 똑똑히 체험했기 때문이다.
세탁기 없이 세탁하고 가스레인지 없이 요리하고 청소기 없이 청소하는 삶을 계속 사는 것과, 그 모든 걸 하녀가 해주는 암살 위협이 있는 삶…….
뤼디거와 만나기 전에는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며 정신승리 했지만, 역시 한번 몸이 편해져 보니 그때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짧고 굵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나는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했다. 얼마나 회로가 가열차게 돌아갔는지, 머리에 뜨끈뜨끈 열이 날 정도였다.
그러는 와중 기차가 노이할트를 빠져나가고, 곧 탁 트인 호숫 가에 햇빛이 비쳐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 창 한가득 들어왔다.
나는 창밖의 풍경에 취해 한참을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보니 질렸다.
나는 뤼디거와 루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뤼디거는 객실에 꽂혀 있던 신문을 꺼내 읽고 있었고, 그 옆에 앉은 루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닮지 않은 삼촌과 조카 사이였지만, 진지하게 신문을 보는 모습만큼은 똑 닮았다.
뭘 알고 저렇게 심각하게 보고 있는지. 나는 심드렁히 물었다.
“재밌니, 루카?”
“그냥 읽는 거지, 뭐.”
루카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대꾸했다.
그 모습이 자못 심각해 보여, 나는 킥킥 작게 웃었다.
그런데……. 루카가 글을 읽을 줄 알았던가?
유디트가 기억하는 루카는 글자도 제대로 못 뗀 상태였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도 빈터발트에 도착한 다음 글을 배우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글은 또 언제 뗀 거야? 나한텐 그런 말 없었잖아.”
“……글자 정도는 읽으니까. 그냥 읽는 거야.”
루카는 태연히 받아쳤다. 하지만 내가 물어본 순간 스치고 지나간 아차 하는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게다가 읽는 연습을 한다고 하기엔 시선 처리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마치 줄줄이 글을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
의심스러운 것이 한둘이 아녔지만, 뭐라 캐물을 말이 없었다.
루카의 교육을 솔선수범해서 방치한 게 다름 아닌 유디트, 이 몸이었으니까.
“한 번 읽어봐. 얼마나 잘 읽나 보자.”
“음…….”
루카는 눈썹을 찌푸리고 양손으로 신문을 탁 틀어잡았다.
그 모습만 보면 이제 막 글자를 뗀 아이가 열심히 글 읽는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 능숙하게 신문을 읽던 모습과 비교되어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루카가 떠듬떠듬 입을 뗐다.
“물, 거품……? 이 된? 빈터발트 안주인의 꿈? 요나스 빈터발트의 죽음, 그 진실은?”
뜬금없이 거론된 빈터발트의 이름에 나는 루카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루카,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읽어봐.”
“진짠데.”
“……뭐?”
뭔 신문에서 그런 가십거리가 나와? 요나스가 나라에서 한자리하는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그냥 공작의 후계자였을 뿐인 불한당이었는데.
어이가 없어진 나는 루카에게 신문을 달라 손을 내밀었다. 루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나에게 신문을 건넸다.
나는 빠르게 신문 1면의 머리 말만 훑었다. 유디트의 기억 덕에 능숙하게 읽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빈터발트의 후계자, 역시 뤼디거 빈터발트가? 우려되는 군부와 공작가의 긴밀한 유대 관계』
이 정도는 양반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가관도 아니었다.
『요나스의 여자들이 말하는, 요나스 빈터발트』
『사교계의 별, 지다!』
나는 황급히 신문을 구기듯 접었다. 그러고는 루카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어린애가 이런 거 보면 안 돼.”
무슨 신문이 온통 가십과 추측으로 도배가 되어 있어. 나는 투덜거리며 뤼디거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런 게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신문이라는 이름도 부끄러운 것이기는 합니다만, 귀족 중에도 즐겨 읽는 사람이 많은지라.”
어쩔 수 없이 객실에 비치해 놨단 말이렷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애가 옆에서 그런 신문을 읽고 있는데 그냥 방치한 일에 대한 변명은 되지 않았다.
나는 손에 들린 잘 타는 쓰레기를 돌돌 말아 탁자를 탁탁 내리쳤다.
“그래도 그렇지, 옆에서 애가 이런 걸 읽고 있는데 그냥 두면 어떻게 해요? 정서 교육상 안 좋잖아요.”
“음……. 이 정도는 다들 읽고 자라는지라……. 미처 신경을 못 썼습니다. 죄송합니다.”
뤼디거는 내가 뭐라고 할 줄 몰랐다는 듯 조금 당혹스러운 낯을 띠며 어물어물 말을 흐렸다.
하긴. 생각해 보면 1950년대 미국에서는 어린이용 장난감 세트로 우라늄이 포함된 원자력 에너지 실험 세트를 출시하지 않았던가.
가십 신문 정도야 그에 비하면 양반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 해서 루카에게 그 신문을 다시 들려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책자가 꽂혀 있던 잡지꽂이를 뒤적거렸다. 다행히 루카가 읽을 만한 걸 찾을 수 있었다.
얇은 양장에 금박으로 장식된, 화려한 색채의 동화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