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37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37화
그 귀한 라벤더 다이아를 고작 밧줄 끊는 데 사용한다고 뭐라 할 사람도 있겠지만, 알게 뭔가.
‘뤼디거가 하나 더 사주겠지. 아니, 애초에 준비해 둔 반지 여분이 있을 거야. 적어도 하나. 아니, 둘. 어쩌면 라벤더 다이아 관련해서 독점 사업을 벌였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리 실없는 생각을 했다.
방에 한가득 라벤더 다이아를 쌓아놓고 있을 뤼디거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났다.
우스운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상황의 긴장감과 압박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밧줄을 끊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손이 몇 번이고 헛돌며 밧줄 대신 다른 손가락을 긁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한 올 끊어냈다 하더라도 아직 남아 있는 밧줄은 두툼했다.
차근, 차근……. 적어도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끊을 수 있을 것이다.
희망찬 기대를 품으며, 나는 열심히 밧줄 끊기에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방 안으로 들어오던 햇빛 줄기가 점점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곧 있으면 밤이 찾아올 것이다.
시간이 지나는 것에 비해 밧줄은 여전히 견고했다. 마음이 초조해진 나는 이를 악물고 반지로 밧줄을 긁었다.
하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느낌이 처음과 달랐다.
몇 시간 동안 밧줄과 마찰하다 보니 뾰족했던 장식이 어느새 뭉툭해진 모양이었다.
“젠장……. 제발 좀 돼라…….”
나는 반지의 뾰족한 부분을 손끝으로 더듬어 찾으며 간절히 빌었다. 막막한 상황에 욕설이 절로 나왔다.
그때, 갑자기 돌멩이 하나가 내 앞으로 데구루루 굴러왔다.
아무도 없는 방이다. 난데없이 굴러온 돌멩이의 행방을 찾기 위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 방의 유일한 창문에 누군가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역광이 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가 없는 상대였다.
“……루카!”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외칠 뻔했지만, 상황을 깨닫고 간신히 말하기 전 목소리를 죽일 수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루카는 바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창에 밧줄이 드리웠다.
꽤 단단하게 매었는지, 루카는 밧줄을 타고 방 안으로 내려왔다. 어린 루카에게 꽤 높은 높이일 텐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이사벨라가 알려줬어.”
“이사벨라가? 살아 있어?”
“간신히. 프란츠가 이모를 납치해 갔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혼절했어.”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루카의 말을 듣는 순간, 안도감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부상으로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도 이사벨라가 끝까지 나를 생각했다는 사실에 순간 울컥하며 목이 됐다.
“왕궁이 난리 났어. 폭도가 소란을 피우는 사이에 왕궁 한가운데서 이사벨라가 총상을 입고 이모가 사라졌으니까.”
왕궁을 공격했다는 프란츠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도 루카가 빨리 날 찾은 건 다행이었다. 왕궁에도 내가 여기 있다는 소식이 들어갔을 테니까.
“빈민굴은 찾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바로 찾아온 거야?”
“빈민굴은 익숙하니까.”
“…….”
원작에서 프란츠의 눈을 피해 빈민가에 숨어 있을 당시의 이야기인 걸까.
루카는 담담히 말했지만 실제로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소설을 읽어 알고 있는 만큼, 나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도…… 네가 직접 오기엔 너무 위험했을 텐데.”
“하지만 내가 아니면 빈민굴의 길잡이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어. 걱정 마. 삼촌이 내 뒤를 쫓아 근위병들을 이끌고 오고 있으니까.”
“뤼디거 씨가? 그나저나, 루카 너…….”
나는 루카가 자연스레 뤼디거를 삼촌이라 불렀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빈정거릴 때를 빼놓고는 단 한 번도 삼촌이라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일단 빠져나가자. 괜히 프란츠에게 붙들리면 곤란해.”
하지만 루카는 그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말을 돌렸다.
마냥 이야기하고 있기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에는 나 또한 동감이었다.
루카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더니, 능숙한 솜씨로 내 팔을 단단히 옥죄던 밧줄을 끊어냈다.
내가 지금껏 노력한 것이 허무하게도 밧줄은 금방 풀렸다.
오랫동안 한 자세로 있어서 그런지 팔이 저릿저릿했다.
나는 팔을 주무르며, 내가 계속해서 쥐고 있던 반지를 보았다.
내 핏자국과 흙먼지 때문에 더러워진 반지는 역시나 예상대로 뭉툭하니 장식이 다 닳아 있었다.
‘그래도 뭐, 낄 수만 있으면 되지, 뭐.’
나는 다시 반지를 손가락에 꼈다. 금장은 닳아 없어졌지만, 라벤더 다이아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내 손을 바라보던 루카가 돌연 눈썹을 휘어 올렸다.
“손가락은 또 왜 이래?”
내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루카의 눈빛이 희번덕였다.
그제야 나는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손이 빨간 볼펜으로 이리저리 그은 듯 엉망이었다.
생채기가 났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 나는 머쓱하게 답했다.
“나도 나름 도망치려고 노력했거든.”
“…….”
루카의 작고 오밀한 입매가 못마땅하게 딱 다물렸다.
하지만 지금 이런 것으로 말다툼할 때가 아니었다. 한숨과 함께 하고 싶은 말들을 목 너머로 삼킨 루카는 다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곤 나를 재촉했다.
“그 손으로 밧줄 잡을 수 있겠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밧줄이 없어도 돼.”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루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밧줄을 향해 턱짓했다.
“괜한 짓 하지 말고 빨리 올라가.”
“……네.”
나는 얌전히 밧줄을 잡았다. 거친 밧줄의 표면이 손가락의 상처를 파고 들었다. 쓰라렸지만 이 정도면 참을 만했다.
나는 밧줄을 단단히 잡고 벽을 구두 굽으로 디뎠다. 그래도 체중을 밧줄이 분산해 줘서 훨씬 괜찮았다. 나는 한 발짝, 한 발짝 창문을 향해 내디뎠다.
그렇게 창문 가까이에 도달했을 찰나, 갑자기 단단히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왜 이렇게 혼잣말을 수군수군해! 허튼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좋을……. 아니, 넌 뭐야!”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내는 루카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찰나의 순간 루카의 눈빛이 변했다. 루카의 뒤에 있던 나는 루카가 허리춤에 있는 칼을 꽉 쥐는 걸 보았다.
‘설마……. 예전에 기차에서 암살자가 등장했을 때처럼 공격하려고? 안 돼……!’
나는 바로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그러고는 루카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
루카가 나를 제치고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나는 루카를 꽉 붙든 채 상황을 살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고, 머리는 차게 식었다.
왕족과의 결혼이 다급한 프란츠로서는 나는 최대한 살려두려 할 테지만, 루카는 아니다. 여차하면 루카라도 보내야 했다.
다행히 사내 혼자뿐이었고, 상대는 프란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협상의 여지가 있어.’
나는 바싹 마른 입을 축이며, 최대한 침착하게 운을 뗐다.
“프란츠가 돈을 주기로 했나요?”
“애는 봐주겠어. 당장 꺼지지 않으면…….”
“그게 얼마든 전 더 줄 수 있어요. 지금 왕가에서 수색령을 내린 걸 알고 있나요? 결국 잡혀서 감옥에 갇힐 거예요. 감옥에 갇히는 건 그나마 괜찮은 선택지죠. 뤼디거 빈터발트라는 이름은 들어보셨나요? 그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걸요. 그러느니 절 도와주고 한몫 단단히 챙기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나는 재빨리 그의 말을 끊었다.
내가 그를 회유하는 모습을 보며 루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루카에게 의지가 되기 위해, 그리고 상대에게는 허세를 위해 애써 여유로운 척했지만, 사실은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과연 이 사내가 프란츠를 배신할 것인가…….
다행히 내 말이 전혀 영향이 없진 않았는지, 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사내는 조금 주저하며 물었다.
“……당신 말을 어떻게 믿지?”
좋아. 미끼를 물었다!
나는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을 꾹꾹 참으며, 태연함을 유지한 채 한쪽 귀걸이를 풀었다.
흑진주가 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귀걸이. 양손이 묶인 상태에서는 푸는 것조차 막막했던 그 귀걸이가 너무나도 쉽게 내 손에 툭 떨어졌다.
나는 그 귀걸이를 사내에게 던졌다.
“선수금이에요.”
허공에서 귀걸이를 낚아챈 사내는 나직한 휘파람과 함께 귀걸이를 훑어보았다.
“그것만 해도 프란츠가 당신에게 건넨 돈 이상은 할 거예요. 이게 끝나고 나면 그 이상으로 드리죠.”
평소 보석으로 무장시킨 뤼디거의 씀씀이 덕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비상금도 아니고…….
한참 귀걸이를 살펴보던 사내가 다시 손을 내밀며 덧붙였다.
“다른 쪽 귀걸이도 내놔. 그러면 당신 말을 따르지.”
“좋아요.”
나는 바로 반대쪽 귀걸이도 풀어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씩 웃으며 귀걸이를 제 품 안에 넣었다.
“저 창으로 도망칠 거면 빨리 하는 게 좋을 거야. 프란츠가 곧 찾아올 테니까. 해가 질 때쯤 돌아온다고 했거든.”
어쩐지, 나가 있었구나. 그래서 내일이니 뭐니 하면서 시간 여유를 주는 척한 거였군.
대충 상황을 파악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뤼디거 빈터발트! 개 같은 놈이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았군!”
그때, 성을 내는 프란츠의 목소리가 저 멀찍이서 들렸다.
내 앞에서는 죽어도 신사인 척 하더니, 조금만 시선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저렇게 바로 본성을 드러낸다.
사내와 나, 그리고 루카는 서로 시선을 마주 보았다.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할 것은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