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40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40화
CHAPTER 15 겨울 숲에 봄은 오는가
그 뒤로 유디트의 삶이 이어졌다.
풋풋한 열 살 무렵.
나는 라리사의 손을 잡고 오월제를 보러 갔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라리사만을 좋아했다. 라리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라리사에게 말 한마디라도 붙여보려 노력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볼을 불퉁히 부풀린 채 라리사에게 투덜댔다.
“나도 예뻤으면 좋겠어.”
“왜?”
“언니가 예쁘니까, 다들 언니만 좋아해.”
“하지만 유디트, 너도 참 예뻐. 네 연보라색 눈동자는 봄에 제일 일찍 피어오른 제비꽃 같단다.”
“정말?”
“그럼.”
라리사와 나는 시선을 마주했다.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 우리는 손을 잡고 오솔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내가 유디트였다는 걸 자각하고 나니 지금까지 유디트의 기억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저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한 촛불 빛에 의지해 더듬더듬 살펴보았던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유디트의 가족들에 대해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내 일처럼 일렁였지만, 내 가족에 대한 것들은 안개 속에 가려진 것처럼 흐릿했던 것 또한 내가 유디트였기 때문이리라.
그 뒤로도 장면이 지나갔다.
라리사가 예쁘게 차려입고 그린할텐 백작가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라리사의 배가 부풀었고, 루카가 태어났다.
그리고…….
잦아들어 가는 숨결, 흐려지는 눈빛.
엄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전염병에 설상가상으로 언니, 라리사마저 걸려버렸다.
마을에서 제일가는, 아니, 남부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던 라리사의 얼굴은 시든 꽃처럼 생기를 잃어 갔다.
그런 라리사의 모습에 그녀를 간호하고 있던 내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나는 원망스레 라리사를 질책했다.
“이게 전부 언니가 엄마의 병 간호를 전부 도맡아 했기 때문이야. 내가 진즉 번갈아 하자고 했잖아. 그리도 괜찮다 고집을 부리더니, 결국 이게 뭐야?”
말은 그리 매정히 하면서도, 내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하하……. 면목이 없네.”
“나 볼 면목이 없으면 얼른 쾌차해. 별것도 아닌 병이니까 금방 나을 수 있어.”
나는 불안한 마음은 모두 모르는 척 외면한 채, 짐짓 센 척 말했다.
내 간호에도 불구하고, 라리사는 하루가 다르게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같은 병으로 죽은 엄마를 제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라리사,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이 자신이 이승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임을 직감적으로 느낀 것일까.
라리사는 힘겹게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희미한 미소가 병색이 완연한 그녀의 얼굴에 걸쳐졌다.
“루카를 잘 부탁해, 유디트.”
“미쳤어? 왜 나한테 루카를 부탁해. 난 결혼도 안 했다고. 미혼인 동생한테 그게 할 말이야?”
“정말 미안한데,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아니, 본인이 살아남을 생각을 해야지! 나한테 미뤄둔다고 되는 일이야, 이게? 내가 루카를 어떻게 키울 줄 알고! 막, 어, 나 같은 망나니로 키운다?”
“너처럼만 자라도 걱정이 덜할 텐데.”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하하…….”
라리사의 웃음은 힘이 없었다.
허파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허무한 웃음. 마치 숨결과 함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소름 끼쳤던 나는 필사적으로 애걸복걸했다. 심지어 협박도 했다.
“난 절대 루카 예뻐 못 해. 구박할 거야. 걔 때문에 언니가 얼마나…….”
절벽 위의 꽃 같았던 언니.
하지만 루카의 탄생 이후 마을에서의 취급이 알게 모르게 변했다는 사실은 눈치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루카 학대하는 거 보기 싫으면 정신 차려……. 자, 잠깐, 언니! 언니! 정신 차려!”
라리사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나는 몸서리를 치며 발작적으로 라리사를 부르짖었다.
하지만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라리사의 눈꺼풀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툭, 라리사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하얗게 질린 손은 미동도 없었다.
이미 흐려지고 먹먹해진 시야 속에서, 나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절망스레 외쳤다.
“언니!”
* * *
처음엔 라리사를 생각해서라도 루카를 어떻게든 키워보려고 했다.
방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재산도 없는 내가 루카까지 건사하는 건 퍽 힘이 들었다.
하지만 점점 상황이 바뀌었다. 방치가 학대로 변하기 시작했다.
자란 루카의 얼굴이 활짝 피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루카는 누가 봐도 장래가 기대되는 예쁜 아이였다.
문제는, 그 얼굴 어디에도 언니의 흔적은 없다는 것이었다.
언니의 인생을 말아먹은 그 개 같은 남자의 얼굴이 이렇게 생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스물일곱이 되었고, 오월제 한 달 전, 무슨 모종의 이유 때문인지 동갑이었던 스물일곱의 전생의 기억이 덧씌워졌다.
기억의 혼선.
그리고 갑자기 기억이 뒤죽박죽된 이유는…….
‘루카의 회귀 때문이겠지.’
루카가 회귀한 것은 빈터발트 가에 내려오는 가보, 소원의 잔 덕분인 것으로 추론되었다.
루카의 소원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루카가 회귀하며 모종의 이유 때문인지 루카의 기억이 나에게 흘러들어왔고, 나는 그것을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 터였다.
그렇다면 소설 속 묘사와 내가 느낀 것들, 그리고 유디트의 상황에 괴리감이 있는 것도 이해가 됐다.
소설은 루카의 시선으로 한 번 왜곡된 기억이었으니까.
루카에게 있어서 나는 변명의 여지없는 못된 이모였다.
실제로 루카에게 못 할 짓을 하기도 했고.
루카에겐 죄가 없는데, 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이기적인 행동으로 루카를 상처 줬다.
루카가 보고 온 미래의 나는 과연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한 걸까.
소설로 읽었을 땐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악녀의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치부해 넘겼던 것들이 나 자신의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절대.’
유디트가 했다고 생각한 그 모든 짓이 사실은 나 자신이 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들끓었다.
감히 내 입으로 루카에게 사랑을 거론했던 것이 무척이나 뻔뻔스레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루카에게 미안하다고, 미안했다고 사과 한마디 안 했었네……’
눈을 뜨면 루카에게 잘못했다고 하자. 내가 생각이 짧았다고.
용서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정말로 미안하다고…….
* * *
눈을 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정신을 놓았는지 안구가 뻑뻑했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아아. 왕궁으로 돌아왔구나.
안도한 나는 그제야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으음…….”
“유디트…… 씨?”
내 바로 곁에서 뤼디거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해서 날 지킨 모양이었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가까스로 고개를 돌리며 설핏 웃었다.
“뤼디거 씨…….”
“유디트 씨!”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가 무섭게, 뤼디거는 내가 죽었다 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 내 이름을 부르짖었다.
인제 보니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두 뺨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코끝은 벌겠다.
눈을 뜨자마자 울고 있는 뤼디거와 마주하니, 그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뤼디거는 내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 채 허공에서 잠시 멈추었다.
내 손가락에 전부 붕대가 감겨 있기 때문이었다.
뤼디거는 내 손을 힘주어 잡는 대신, 마치 새끼 새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레 붙들고 오열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산처럼 굳건하던 남자가 허물어졌다.
뻔뻔스레 말도 안 되는 말을 그럴듯하게 내뱉으면서도 조금의 양심의 가책도 없는 냉정한 남자다.
그런 그가 세상이 무너졌다 해도 짓지 않을 것 같은 낯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 바보!”
“루카…….”
뤼디거의 곁에 루카도 있었던 모양이다. 루카가 바락 외쳤다.
“총을 쏘는데 그걸 멍하니 보고 있으면 어떻게 해! 피하든가 해야 할 거 아냐!”
“농담이지? 그 거리에서 쏜 총을 어떻게 피해.”
“평소엔 근성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하더니!”
“그거야 널 설득하려고 한 말이고. 게다가 애초에 믿지도 않았잖아.”
루카와 한차례 푸닥거리를 하고 나니 내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게 생생히 실감이 되었다.
루카는 한시름 덜었다는 듯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쉬고 있어. 의사 불러올게. 이모도 깨어났으니까 삼촌도 눈 좀 붙이고 오라고.”
“하지만 내가 자고 오는 새에 유디트 씨에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런 일 없어! 무슨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루카가 어처구니없어 하며 바락 면박을 주었다. 열 살 조카와 서른두 살 삼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대화였다.
‘나랑 루카가 대화할 때도 이런 느낌인 거겠지……. 나이랑 관계가 뒤바뀐 듯이…….’
나는 픽 웃었다.
내 일일 때는 복장 터질 것 같았는데, 남의 일이라 생각하니 이보다 더 웃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루카의 말 중에서 조금 걸리는 게 있었다. 나는 바로 물었다.
“그런데…… 뤼디거 씨, 지금껏 안 잤어요?”
“잠만 안 잔 줄 알아?”
루카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자기가 쏜 총알이 프란츠를 관통해 이모한테 맞았다고 착각했거든. 자기가 이모를 죽였다며 자살하려고 관자놀이에 총을 가져다 대는 걸 말리느라 나랑 근위병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삼촌이 쏜 총알은 프란츠에게 박혀 있고, 이모는 그저 프란츠가 쏜 총알이 스쳤을 뿐이라는 걸 설명하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