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43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43화
나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내가 아는 내 1회차의 모습은 완전한 기억이 아니었다. 루카의 시점이 대부분에, 누락되거나 왜곡된 정보도 많았다.
그래서 내가 라리사의 복수를 할 생각으로 프란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저……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는 라리사를 떠올렸다. 언니와의 추억은 지금도 내 가슴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만약 내가 전생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여전히 라리사의 죽음에 매몰되어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모는 프란츠가 날 죽이면서까지 빈터발트 가를 차지하려고 한다는 사실은 몰랐고……. 그 때문에 견해 차로 싸우다가 결국 프란츠에게 살해당했지.”
“뭐?”
“프란츠가 나를 죽이려고 한 계획 하나를 완전히 어그러트렸다고 하더라고. 난 하나도 몰랐어. 나중에 프란츠가 주절주절 말해줘서 그제야 알았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어.”
루카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다 했지만, 나는 심장을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순간 심장이 철렁이며 안도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래도 나, 루카를 죽이려고 한 건 아니었구나. 정말 다행이다…….’
사실 내가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짓 중 제일 신경 쓰였던 것이 바로 돈 때문에 프란츠와 손을 잡고 루카를 죽이려고 한 것이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인간적으로 도저히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생각이 들었어. 이모가 날 증오하지 않게 되었다 하더라도 날 좋아하는 건 아니었을 텐데. 왜 날 위해 프란츠와 싸웠던 걸까. 그토록 싫어하는 빈터발트, 그냥 못마땅한 조카와 함께 망쳐버리면 좋았을 텐데…….”
“…….”
“난 그래서 이모를 그리 미워하지만은 않아. 이모도 힘들었을 걸 아니까. 그리고…….”
루카의 작은 손이 내 손을 쥐었다.
혹여나 붕대를 감은 손가락의 상처가 아플까, 손날을 만지작거리는 루카의 손끝에서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루카는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루카의 시선은 마치 사랑하는 여동생을 바라보듯 자애로웠다.
“이제는 오히려 이모에게 고마워. 이모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 줘서,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루카.”
울음기에 목이 맸던 나는 간신히 루카의 이름을 뱉어냈다.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루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와락 끌어안는 품속 어깨는 여전히 작고 여렸지만, 지금은 든든한 고목처럼 나를 감싸 안았다.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열 살짜리 조카는 나를 달래듯 내 등을 다독였다.
그렇게 끌어안은 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슬며시 서로를 안은 팔에 힘이 빠지고 떨어져 나갔다.
감정이 북받쳐서인지 주룩주룩 눈물이 났다. 나는 훌쩍이며 손등으로 눈가를 연신 훔쳤다.
그때, 무척이나 자연스레 손수건을 건네는 손이 있었다.
“여기.”
“아…….”
맞아, 뤼디거가 있었지!
나는 그제야 이 자리에 뤼디거가 함께하고 있었으며, 그를 앉혀두고 영문 모를 소리를 줄줄 늘어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카랑 대화하는 것에 골몰하느라 완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우리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나는 황급히 내 머릿속을 되짚어보았다.
빈터발트에 내가 적의를 품고 있었다는 말이라든가, 오해받을 여지의 말들은 많았다.
평소였다면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가렸을 텐데, 루카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필사적인 마음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털어놓은 뒤였다.
루카 또한 난처한 낯이었다.
나는 불안스레 뤼디거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 뤼디거가 오해하기라도 하면 상황이 곤혹스러워진다. 하지만 뤼디거는 언제나와 같은 매끄러운 낯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이렇게 된 거 그냥 전부 털어놓자.’
결심한 나는 결연히 운을 뗐다.
“뤼디거 씨. 사실 제가 지금껏 뤼디거 씨에게 숨기는 게 있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네?”
태연한 뤼디거의 반응에 나는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도대체 뭘? 얼마나? 어떻게?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런 당황스러움이 얼굴에 드러난 것일까. 뤼디거는 나직이 웃으며 덧붙였다.
“유디트 씨도, 루카도 제각각 숨기는 게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그럼……. 왜 묻지 않았던 거예요?”
“묻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정말? 단지 그것 때문에?
내 표정이 퍽 이상했는지, 뤼디거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
“제가…… 착각했던 겁니까?”
“아뇨. 맞아요. 지금까지는 말씀드릴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일단 모든 게 끝나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갑자기 프란츠를 감시하라느니 뭐라느니 이해 안 가는 부탁을 했는데도, 뤼디거는 아무런 질문 없이 부탁을 들어주었다.
뤼디거는 설핏 웃으며 읊조리듯 말했다.
“유디트 씨의 일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다만, 유디트 씨가 말하기 싫은 진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것을 억지로 끄집어내려다가 혹여나 유디트 씨에게 상처라도 주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모든 진실이 행복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니까요.”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깊은 청회색 눈동자 속에 생각보다 많은 배려가 스며 있었다.
그 사실이 내 입술을 마르게 했고, 내 심장을 뛰게 했다.
“타인은 이런 절 무관심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유디트 씨에게 알려드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으니까요. 전장의 참혹함 같은, 굳이 알 필요 없는 것들 말입니다.”
그리 말한 뤼디거는 잠시 숨을 내쉬었다. 뤼디거의 시선이 나를 스쳐 루카에게로 향했다.
뤼디거는 루카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요나스의 출생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이 어찌 되었든, 저는 요나스를 형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에게 우애를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만…….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니 루카는 제 조카입니다. 피가 이어지고 말고의 진실이 아닌, 제 마음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루카. 네가 부정할지라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마저 부정하게 할 수는 없다. 넌 내 하나뿐인, 그리고 유일한 조카야.”
뤼디거는 단호히 말했다.
일말의 물러섬도 없는 태도에서는 루카가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특유의 고집이 절로 느껴졌다.
그 점이 루카를 찌른 것일까.
반발심이 치솟았는지 루카가 버럭 외쳤다.
“부정할 생각은 없었어!”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겠군.”
“그러면…….”
“계속 삼촌이라고 불러주렴. 그게 더 기쁠 것 같구나.”
태연한 뤼디거의 답에 루카의 입이 몇 번을 열렸다 닫혔다.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 어안이 벙벙한 낯이었다.
루카가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자, 뤼디거는 특유의 담담한 얼굴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면 이모부도 괜찮고. 나는 여전히 환영이다.”
“무슨 헛소리야!”
루카가 발끈했다. 바락 외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훨씬 좋아져 있었다. 루카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트집을 잡긴 하지만, 예전처럼 필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내가 삼촌이라 불러준다 해서 이모부가 되는 걸 허락한 건 아니야!”
“그럼 허락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으윽…….”
루카가 신음을 흘렸다. 뭘 시키든지 해낼 용의가 만만인 뤼디거의 낯에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봐도 투덕거리는 삼촌과 조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뼉을 치며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 자. 그 문제는 차차 정하는 거로 하고. 일단…… 루카와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뤼디거 씨에게 알려드리는 게 먼저인 것 같네요.”
“지금 말입니까?”
“네. 뤼디거 씨는 아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니, 루카?”
루카 또한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는 큼큼, 작게 헛기침을 했다. 막상 작정하고 말하려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넌지시 둘러서 이야기한 적은 많아도, 이렇게 처음부터 고백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루카는 한참 끝에 조심스레 운을 뗐다.
“사실 나는…….”
* * *
[그의 복수와 함께 겨울도 끝이 났다. 그의 인생을 할퀴려고 눈을 번뜩이는 승냥이 떼들도 사라졌다모두가 탐을 내던 겨울 숲은 원래의 자리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이제 곧 봄이 올 것이다. 만물이 피어오르고, 생명이 싹을 틔우며, 행복이 넘실거리는 봄.
루카는 그 봄을 움켜쥐려는 듯 손을 뻗었다.
오래 검과 총을 잡아 딱딱하고 거칠어진 손바닥은 온데간데없고, 작고 고사리 같은 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그 손을 양쪽에서 마주 잡은 두 손이 있었다. 가늘고 여린 여자의 손과 원래의 제 손만큼 크고 거친 사내의 손이었다.
루카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얼어붙은 겨울 숲에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루카는 환희로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