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44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44화
허리를 스친 총상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기억이 되돌아오며 몰아친 정보들로 인한 두통이 더 날 괴롭게 했다.
그마저도 이틀 뒤에는 완전히 가셨고.
하지만 뤼디거와 루카가 연신 호들갑을 떨어대니, 나는 꿈쩍없이 요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야 운신이 가능해진 나는 자유를 만끽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로라가 그런 내 시중을 들었다. 로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납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일까. 로라도 나 혼자 두는 것에 좌불안석하며 전전긍긍했다.
‘당분간은 얌전히 지내는 게 주변 사람들 정신 건강에 좋겠네.’
정작 납치는 내가 당했는데, 트라우마는 주변 사람들의 몫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납치당한 일로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선왕이었다.
“그러고 보니 선왕 전하께서는 좀 괜찮으시니?”
“그래도 많이 괜찮아지셨다고 해요. 한 3일쯤 지난다면 면회가 가능할 거라고 들었어요.”
정보에 능통한 로라가 바로 대답을 했다.
내가 납치당한 사실을 들은 선왕은 혼절할 정도로 충격을 많이 받았다.
그래도 의식이 돌아와 다행이었지만, 한동안은 면회도 금지된 채 요양에 힘써야만 했다.
‘잘못하다간 정말 뤼디거 말대로 되겠는걸…….’
크로켓 경기장에서 선왕에게 누가 더 오래 버티나 해보자는 듯 도발했던 뤼디거의 말이 떠올랐다.
조금 고집을 꺾어주시면 좋으련만. 마음이 불편했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오늘은 빈터발트 공작님이 방문하시기로 했지?”
“네. 아직 시간 여유는 있어요.”
“원래는 내가 찾아봐야 하는데.”
나는 곤혹스레 눈썹을 모았다.
내가 왕족이 되었지만 그래도 방계일 뿐이었다. 실질적인 위치는 공작인 막시밀리안 쪽이 더 높은 만큼, 그를 오라 가라 하는 것이 실례였다.
하지만 내가 그를 만나고자 약속을 잡으려 하니, 공작이 직접 왕궁으로 찾아오겠다는 것이 아닌가.
며칠 전 납치 사건에 휘말린 나를 배려하는 건가 싶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배려라니. 빈터발트와는 정말 거리가 있는 단어였다.
공작의 방문에 대해 내가 꺼림칙해하자, 차를 우리고 있던 로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대꾸했다.
“조금이라도 건강한 쪽이 움직이는 거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로라, 네 월급은 빈터발트에서 나오거든?”
“뭐 어때요. 공작님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것도 아닌걸요. 게다가 제가 만약 잘리면 마님께서 거둬주실 거잖아요. 저만큼 일 잘하는 하녀 구하기 힘들어요.”
“그건 그렇지만.”
실력이 뒷받침되는 자신감은 정말 당해낼 수가 없었다. 태연자약한 로라의 대꾸에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뤼디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그날, 우리 셋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처음에 빙의했다고 생각했다는 것부터, 루카의 기억 일부분이 나에게 흘러들어 온 것 같다는 것까지.
루카와 나 사이에서도 미처 밝히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밝혀지며, 진실의 미싱 링크들이 하나둘 짜 맞춰져 갔다.
‘소원의 잔이 정말로 소원을 들어주는구나. 그냥 옛날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나도 그게 정말 소원을 들어줄 거라곤 생각지 않았어. 그냥…… 허무해서 혼잣말을 건넨 것뿐이었는데.’
‘소원의 잔에 빈 소원이 뭐였어?’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때의 대화를 떠올린 내 입가에 쓴 미소가 걸쳐졌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건 모든 이들이 품는 소망일 테지만, 루카의 입에서 나오는 행복은 유난스레 더 아린 곳이 있었다.
지금의 루카는 행복할까.
아마 빈터발트 공작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그 작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죄책감과 책임감이 조금은 가벼워질 것이다.
공작이 날 만나려고 하는 건 갑작스레 프란츠에게 납치된 일과 더불어 내가 루카의 엄마가 아닌 이모였다는 것, 그리고 뤼디거와의 관계 등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서일 터였다.
하지만 내가 공작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루카 때문이었다.
루카는 하루빨리 자신의 이름 뒤에 붙어 있는 빈터발트라는 성을 벗어버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루카. 네가 빈터발트의 피를 잇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네가 차기 빈터발트 공작이 되는 쪽이 좋다고 생각한다. 굳이 성을 버릴 것까지야.’
‘아니. 이건 삼촌을 삼촌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야. 이제 프란츠도 죽었으니 내가 빈터발트에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어. 계속해서 빈터발트의 이름을 쓸 필요도, 염치도 없어. 그리고 성을 버리는 게 아니야.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뿐이지. 루카 마이바움으로.’
‘루카.’
‘겨울 숲의 주인이 된 건 내 인생에 한 번만으로 족해.’
루카가 원체 강경하게 주장하니 그 말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내가 가문을 잇게 될 텐데, 상관없나?’
‘그게 나랑 무슨 상관……. 잠깐.’
‘네가 나와 유디트 사이를 인정해 주기만 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내가 굳이 너를 찾아간 것도, 왕가와의 억지 결혼을 해가며 가문을 잇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태연스레 건넨 뤼디거의 말에 루카의 눈동자가 갈등으로 점철된 채 크게 흔들렸다.
‘인정해 주기는…… 할 테지만, 내가 가문을 버리기 위해서 억지로 인정하는 건 아니야! 이건 별개라고!’
고뇌 끝에 루카의 허락이 떨어졌다. 루카가 그간 우리 사이를 방해하기 위해 얼마나 성심성의를 다했는지를 떠올리면, 정말 감격해 마지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네 의지가 그렇다면……. 가문의 후계에 관한 일이니 아버지께 보고와 허락이 필요하다.’
‘때마침 수도에 내려와 계시니, 내가 찾아뵙고 담판을 짓도록 할게. 소원의 잔에 대해 밝히고 사과드릴 것도 있고…….’
‘잠깐. 너 혼자 공작님을 만나러 간다고?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돼?’
‘우리야 이제 네 정신 연령이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걸 알지만…….’
‘별반 다를 바 없다?’
‘……우리보다 높을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하여튼 타인이 보기엔 여전히 열 살 어린애잖아. 너 혼자 공작님을 대면하게 하는 건 역시 마음이 불편해. 나도 같이 가도록 해.’
‘몸도 안 좋은 게. 그냥 쉬고 있어.’
‘차라리 제가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유디트 씨께서는 루카 말대로 쉬고 계십시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루카의 보호자로 빈터발트에 온 것은 저잖아요. 그러니 제가 함께 가는 게 옳아요.’
당연했다.
나는 루카가 물러서지 않는 것만큼이나 강경히 나섰고, 결국 뤼디거와 루카는 한숨과 함께 그러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루카는 그날 바로 공작을 찾아가 모든 은원을 해결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내 상태가 걱정된다며 공작과의 만남을 일주일을 미뤘다.
‘공작이 찾아오겠다고 한 건 의외였지만…….’
이번에 만나면 요나스의 핏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텐데, 공작은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공작이 좋아하는 사람이 소피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삼십여 년간 제 자식이라고 생각한 아들이 제 자식이 아니었다는 건 제법 충격적이지 않겠는가.
‘괜히 공작의 심기가 불편해졌다가 그 불똥이 루카에게 튀기기라도 하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유하게 분위기를 이끌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 공작이니만큼 자신은 없지만…….
그렇게 공작과의 대화를 어림짐작하며 골머리를 앓는 사이, 공작이 방문하기로 한 시간이 되었다.
나는 응접실에서 루카와 함께 공작을 기다렸다. 먼저 자리하고 있는 것 정도가 그나마 내가 차릴 수 있는 예의였다.
그리고 딱 약속한 시각이 되자 공작이 등장했다. 뤼디거 또한 함께였다.
나는 뤼디거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내가 깨어난 일로 한시름 덜었는지, 파리했던 안색이 많이 좋아져 있었다.
나란히 서 있는 공작과 뤼디거는 정말로 똑 닮아 있었다. 뤼디거가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될까.
하지만 그것이 마냥 기껍지만은 않을 정도로, 공작의 기세는 벼려놓은 칼과 같았다.
공작은 나와 마주하기가 무섭게 고개를 숙인 채 무뚝뚝하게 사과를 건넸다.
“저희 가문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셨다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리고 말씀 편히 해주세요. 왕족이라고는 하나 방계. 공작님에 비하면 아직 한참 모자랍니다.”
“그럼 내 말을 편히 하도록 하지.”
존대는 그저 형식적인 말이었는지, 그는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빨리 말을 도로 놓았다.
공작은 자리에 앉았다. 한평생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여본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 그의 태도에서 뚝뚝 묻어났다.
“안 그래도 자네의 소식을 듣고 처와 함께 수도로 내려온 길일세.”
소식이라면 내가 왕족이라는 것과, 요나스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타인이라는 것이었으리라.
공작과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몇 번이나마 대화한 적 있는 루카도 이런 상황이 어색한 듯 잔뜩 뻣뻣하게 긴장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사이에도 많은 일이 있었더군. 내 둘째 아들이 그대에게 청혼했다지? 깜짝 놀랐지 뭔가.”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인데요…….
입으로는 놀랐다 하지만 그의 낯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했다.
“그런데 그 뻔히 아는 일에 관해 이야기할 생각 같지는 않아 보이고……. 그래서 나에게 할 말이 뭔가?”
아니, 당신 아들이 청혼했다는데 반응이 그게 뭐예요?
며느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다른 아들의 아내가 된다는데, 정말 그걸로 끝이에요?
하지만 공작은 정말로 그에 대해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론 결혼 반대니 뭐니 할 만큼 뤼디거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안 그래도 선왕이 반대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데, 시가인 그쪽에서 이리 나서주면 내 처지에서는 환영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래도 되는 걸까. 나는 뤼디거를 흘끔 보았다.
뤼디거는 익숙한 일인 듯 언제나처럼 덤덤했다.
‘뤼디거 씨를 겪으며 빈터발트 식 화법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난 멀었구나. 공작은 한술 더 뜨네…….’
막시밀리안에게선 조금이라도 쓸모없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는,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 기회에 귀찮은 일들을 모두 처리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이 사람은 정말 타인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구나. 그게 뤼디거든, 나든, 루카든.
소피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공작인 그보다야 조금 더 격한 반응을 보여줬을까? 화를 내든가, 기뻐하든가…….
‘아, 이제야 알겠다. 왜 공작이 부러 왕궁까지 찾아오겠다고 했는지.’
그는 나를 배려한 것이 아니라, 괜한 이야기가 소피아에게 들어가지 않도록 사전 차단을 하러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