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45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45화
‘그러면 그렇지. 누가 누굴 배려해?’
나는 치미는 한숨을 목 너머로 삼켰다.
하지만 공작의 의도가 그렇다면 오히려 안심이다. 좋아. 원하는 대로 핵심만 털어놓자.
나는 빙긋 웃은 채, 공작이 원하는 대로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렇다면 실례를 무릅쓰고 바로 본론을 꺼내도록 할게요. 빈터발트 공작님, 루카의 빈터발트 입적을 거둬주세요.”
“뭐?”
공작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누가 북부 공작 아니랄까 봐 한기가 풀풀 풍겼다.
공작은 더 캐묻지 않은 채 이어질 내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대화가 아니라 내가 그에게 보고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압박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것에 기가 죽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루카 때문이 아니던가.
압박감을 털어낸 나는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루카는 빈터발트의 후계자가 되고 싶지 않아 해요.”
“후계자? 빈터발트야 뤼디거가 이으면 되는 일이지. 자네에게 청혼했다 하니 철도 부설권도 안심이고. 하지만 루카는 요나스의 아들이니 입적은 당연한 것 아닌가. 자네의 가문인 마이바움은 작위가 없으니 굳이 입적을 무르고 마이바움으로 돌아갈 이유도 없을 테고.”
공작의 의문은 당연했다. 내가 그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루카가 불쑥 끼어들었다.
“화근의 싹을 남겨둘 필요는 없으니까요.”
“화근의 싹?”
“네. 저, 공작님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에요.”
루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물끄러미 루카를 바라보는 공작의 얼굴이 마치 거울에 성에가 낀 것처럼 차갑고 냉정히 돌변했다.
청회색 눈동자가 북풍처럼 루카를 훑었다. 한참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일을 아는 사람은 나 하나뿐인데, 어떻게 알았지?”
“……!”
숨을 들이켰다.
요나스가 제 핏줄이 아니라는 걸 공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설마…….
“애초에…… 알고 바네사 왕녀님과 결혼하신 건가요?”
“물론. 그게 조건이었으니까.”
내 물음에 공작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비밀이 들통났는데도 조금의 찔림도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되레 당당하기까지 했다.
공작은 옆에 있는 뤼디거에게 눈짓을 했다.
“뤼디거.”
“네.”
뤼디거는 하녀들을 물리고, 주변을 점검했다. 붙은 귀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서야 뤼디거는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왕실에 새어 나가면 곤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공작은 루카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묻겠다. 요나스가 내 핏줄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제가 소원의 잔을 써서 회귀했고, 과거에 공작님께서 남긴 일기를 본 적이 있다 하면 믿으실 건가요?”
“…….”
루카가 결연히 답했다. 공작을 빤히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가 첨예하게 빛났다.
과연 공작은 루카가 회귀했다는 말을 믿어줄 것인가?
뤼디거야 우리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계속해서 함께하며 이상한 점이 있다는 걸 눈치챘기에 회귀나 빙의 같은 말들도 쉽게 믿어주었다. 하지만 공작과는 그런 신뢰가 존재하지 않았다.
농담하는 거냐며 질책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공작은 오히려 피식 웃음 지었다.
“소원의 잔이라.”
그는 이내 껄껄 소리 내 웃었다. 뤼디거 또한 공작이 소리 높여 웃는 것을 처음 봤는지, 얼굴을 괴이쩍게 일그러트렸다.
한참 끝에 공작이 웃음을 멈추었다. 꽁꽁 껴 있던 성에가 전부 녹았다. 루카를 바라보는 공작의 시선은 일렁이는 겨울 바다처럼 요동쳤다.
“그렇지. 넌 럼가트의 피를 이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군.”
“믿어……주시는 건가요?”
“믿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공작은 흔쾌히 답했다. 누가 뤼디거 부친 아니랄까 봐, 심각한 이야기를 흔쾌히도 수긍해 넘긴다. 오히려 너무 쉽게 받아들여 얼떨떨할 정도였다.
공작은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깊은 숨을 내뱉었다.
지금껏 홀로 지켜온 비밀의 공유자가 나타났기 때문일까. 공작에게 작은 틈이 보였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지금이라면 궁금했던 것들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공작의 눈치를 보며, 지금껏 풍문으로만 들어온 이야기에 대해 넌지시 운을 뗐다.
“요나스를 가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조건이었다면……. 바네사 왕녀님과 결혼하신 것이, 세간의 평대로 현 공작 부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함이었나요?”
“궁금한 게 많군.”
공작이 날카롭게 받아쳤다. 나는 물러서지 않은 채 그를 마주 쏘아보았다.
내가 그리 나올 줄 몰랐던 것일까. 공작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좋아. 오래된 이야기를 하나 해줄까.”
옛날이야기라니?
하지만 공작이 입을 떼기가 무섭게 나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제 누이를 끔찍이 아꼈던 한 사내가 있었다네. 그는 제 누이가 가출한 뒤, 그 누이를 닮은 딸을 옭아맸어. 마치 새장 속의 새처럼.”
누구라고 말은 안 했지만, 상황은 뻔했다. 할머니와 선왕, 그리고 바네사의 이야기였다.
“딸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네. 그래서 대신 반항을 했지. 그녀는 아버지 몰래 방탕한 생활을 했고, 그러는 사이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애를 임신해 버렸어.”
“…….”
“그 사실이 아버지에게 알려지면 그녀는 탑에 갇힐 게 뻔했네. 그렇게 될 수는 없었지. 그녀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했어. 그렇게 방안을 모색하던 와중, 그녀는 자신의 충직한 시녀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존재를 떠올리게 되었다네.”
소피아, 그리고 막시밀리안 본인이었다.
“시녀의 세상은 딸을 중심으로 돌아갔지. 아무리 대단한 부귀영화가 펼쳐진다 하더라도, 딸이 없다면 시녀에겐 의미가 없었다네. 그렇기에 그 시녀를 사랑하는 사내는 그녀를 멀찍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말이야.”
공작은 자기 이야기를 할 때도 마치 남 일인 것처럼 건조하고 무뚝뚝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소피아에 관한 이야기를 건넬 때는 본인조차 모르는 미소가 입가에 서려 있었다.
“그 사내는 대단히 부유했고, 딸의 아버지에게 대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내였다네. 딸은 그를 이용하기로 했어. 자신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그의 아이로 해 달라. 그리고 나에게 청혼하여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 그렇게만 해준다면 자신은 죽은 척 몸을 숨기고, 그렇게 자신이 떠나고 난 뒤에 제가 낳은 자식을 인질 삼아 시녀를 아내로 삼을 수 있게 될 거다. 그렇게 주장했지.”
“그렇다면…….”
“사내는 시녀와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네. 그래서 그에게 내민 여자의 떨리는 손을 잡았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자는 자식을 낳다가 죽고 말았다네. 그녀가 그토록 누리고자 했던 자유는 무척이나 짧았고……. 남은 것은 그녀와의 약속의 잔재뿐이었지.”
나는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충직한 시녀를 팔아서라도 도망치고자 했던 결과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허무했다.
“자네들도 짐작했다시피, 이 이야기가 바로 나와 바네사 왕녀, 그리고 내 아내 소피아 사이의 관계라네. 어떤가. 이 정도면 답이 되었는가?”
“……충분히요. 그렇다면 요나스를 후계자로 삼은 것도 바네사 왕녀님과의 약속이었나요?”
“아니. 요나스를 후계자로 삼은 건 단지 소피아가 그러길 바랐기 때문이네.”
“요나스가 공작님의 자식이 아닌데도요?”
“소피아는 왕녀의 뱃속 아이가 내 아이라고 믿고 있거든. 왕녀의 자식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며, 요나스가 정통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강력히 주장했지.”
“…….”
공작이 소피아를 사랑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문의 피를 잇는 것보다도 소피아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을 택하다니.
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공작의 뒤에 서 있는 뤼디거를 걱정스레 흘끔 바라보았다.
뤼디거는 요나스가 저와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해도 형인 것은 변함없다 하였지만, 실제로 아버지가 그 모든 것을 알고도 방치했다는 사실에는 머릿속이 심란할 것이다.
뤼디거의 내리깐 속눈썹 아래 드리운 눈동자는 과연 무슨 생각을 담고 있을까.
내가 그렇게 뤼디거의 안색을 살피고 있거나 말거나, 공작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나로서는 빈터발트를 루카가 잇든, 뤼디거가 잇든, 아니면 자네와 뤼디거 사이의 아이가 잇든 아무 상관없네. 다만 루카의 입적 취소는 안 돼.”
“……루카가 요나스를, 아니, 바네사 왕녀를 닮았기 때문인가요? 그저 공작 부인을 위해서?”
“당연하지.”
태연자약한 반응에서는 그 이상의, 그 이하의 이유도 없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정말이지…… 최악의 부모였다.
소피아에게는 어떤 남편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뤼디거와 루카에게 있어서는 좋은 부모도, 조부도 되지 못했다.
솔직히 이전까지는 굳이 빈터발트의 입적을 포기하겠다는 루카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나서서 입적을 물러 달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작님은…… 루카와 뤼디거 씨에 대해 정말 아무런 애정도 없군요. 두 사람을 위한 선택은 머릿속에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아요.”
“이모…….”
공작에게 대놓고 대드는 내 모습에 루카가 걱정스레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강경히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루카가 조부모님과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빈터발트에 입적하는 것을 찬성한 거예요. 하지만 당신 밑에서 루카는 절대 행복해지지 못할 것 같네요.”
물론 나도 믿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여차하면 왕족인 내 신분을 이용해서라도 루카를 빼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작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 그리 생각한 순간 공작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루카가 빈터발트의 소원의 잔을 이용해 소원을 이루었다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 값은 갚아야지.”
“그건……!”
말도 안 된다. 나는 바로 외치려고 했지만, 이어지는 공작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루카 빈터발트. 네가 가문의 보물인 소원의 잔을 사용함으로써, 그 보물은 가치를 잃었다. 그에 대한 배상을 위해서라도 너는 빈터발트에 남아 있어야지 않겠느냐.”
“보물이 가치를 잃었다니요? 그 무슨…….”
“말 그대로네. 소원의 잔이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딱 한 번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