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48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48화
공작은 루카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루카의 머리를 토닥이듯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믿기지 않을 만큼, 휘몰아친 겨울바람처럼 방 안을 들쑤신 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루카는 공작이 사라진 문을 향한 채 멍하니 넋을 놓았다.
내가 아는 루카는 공작에게서 한 번도 이런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꾸중도 없었지만…….
처음으로 공작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일까. 루카의 푸른 눈이 새벽 호수처럼 일렁였다.
공작의 기행에 당황한 것은 아들인 뤼디거도 마찬가지였다. 뤼디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상하군요.”
“뭐가요?”
“아버지는……. 유디트 씨가 어머니께 말씀드릴 게 걱정되었더라면, 진실이고 뭐고 애초에 말을 꺼내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냥 루카의 입적 포기를 수긍하고 넘어가지, 구태여 옛날이야기까지 꺼내 가며 빈터발트에 얽힌 비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해 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나 또한 동감이었다. 공작이 생각보다 많은 것에 협조적인 것은 예상 외였다.
바네사와의 계약, 소원의 잔의 기원, 요나스의 죽음…….
마치,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자 지금껏 계속해서 속으로 곱씹어 왔던 것처럼 준비된 답이었다.
그리고…… 공작이 진실을 털어놓고자 한 대상은 내가 아닐 것이다.
나는 공작을 빼닮은 뤼디거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한 듯, 미간에 주름을 잡고 고뇌하고 있는 모습 위로 공작의 낯이 드리웠다.
나는 뤼디거의 어깨에 조심스레 이마를 기댔다. 예전이었다면 펄쩍 뛰었을 텐데, 많이 익숙해졌는지 그의 팔이 자연스레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공작님도…… 혼자서 너무 많은 걸 짊어지고 계셨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전 뤼디거 씨가 이번 일로 많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말입니까? 어째서요?”
뤼디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감정을 숨기려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정말로 자신이 상처 받을 이유가 없다는 듯한 태도에, 나는 당황해서 답했다.
“……공작 부인께서 요나스를 무척 아끼셨다면서요. 그런데 요나스는 그런 공작 부인을…….”
“그런 걸로 상처받지는 않습니다. 어찌 되었건, 어머니의 선택이니까요.”
뤼디거는 고개를 내저었다.
공작 부인이 1회차에서 뤼디거의 죽음을 알고 삶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동요하는 것 같더니, 그사이에 마음을 다잡은 듯 단호할 정도로 냉정한 태도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말씀 말라 했고, 저 또한 말씀드릴 생각은 없지만……. 만약 어머니께서 요나스의 일을 아신다 하셔도 크게 당황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 얘기는.”
“어머니는 요나스에 대해 생각보다 더 잘 알고 계시거든요.”
나는 의문 가득한 눈으로 뤼디거를 바라보았다.
제 친아들보다도 아끼던 이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야? 나라면 배신감에 억장이 무너질 텐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오히려 저는 저보다 요나스가 불쌍하군요.”
“요나스가요?”
“요나스는 가진 게 많았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 이상을 탐했죠. 언젠가는 그 성정이 문제가 될 거라곤 생각했습니다만……. 일이 이렇게 되었을 줄이야.”
“그건 요나스의 업보에요. 뤼디거 씨는 그에게 빼앗기기만 했잖아요. 도대체 누가 누굴 불쌍해하는 건지.”
나는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모친의 사랑도, 후계자로서의 위치도 지금의 뤼디거는 둘 다 필요 없다 말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정말로 필요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필요 없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는 요나스 덕에 이렇게 행복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사실, 그것만으로도 요나스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고말구요.”
그리 말하며 뤼디거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요나스 덕에 나를 만났다 말하는 눈빛에, 괜히 부끄러워진 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러고는 다른 손을 뻗어 여전히 넋을 놓고 있는 루카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이렇게 훌륭한 아들이 있는데, 요나스는 그 존재조차 모르지 않습니까. 그는 정말로 인생을 손해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화제가 저에게로 튀자 루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민망했는지 루카는 뤼디거의 팔을 뿌리치고 멀찍이 달아났다.
“……칭찬해도 소용없거든? 그리고 서로 들러붙지 말고 떨어져! 떨어져!”
루카는 뤼디거와 내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꼴을 보고는 성을 내며 도로 덤벼들었다.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뤼디거는 나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순 없지.”
“내가 아무리 두 사람 사이를 인정했다지만 벌써부터 결혼한 듯 굴지 말라고! 아직 청혼장 안 오갔어!”
루카가 더욱 목청을 높였다.
“청혼장만 오가면 결혼한 듯 굴어도 된단 이야기로군.”
“이익……!”
루카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까 전에는 단지 칭찬에 민망해서였다면, 지금은 약이 올라 혈압이 잔뜩 높아진 듯싶었다.
저런 모습을 보면 정말 선왕하고 똑같다니까. 피는 못 속인다더니. 나는 작게 혀를 내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뤼디거와 루카는 한참 동안 옥신각신했다.
청혼장을 당장 넣니 마니, 지금은 아직 접수가 안 되었니……. 유치한 트집 잡기가 계속되었다.
저렇게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대단하다니까. 나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하여튼 둘이 똑같아, 정말.”
뤼디거와 루카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외쳤다.
“이 고집불통이랑 내가? 인간 적으로 너무한 거 아냐?”
“유디트 씨 말씀은 그렇다면, 제가 루카처럼 어리게 굴었단 말씀입니까?”
“내가 어리게 굴긴 뭘 어리게 굴어? 어른스러움의 귀감이지!”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우기는 걸 어리다고 한단다, 루카.”
“절차고 뭐고 다 무시하는 사람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거든!”
그래. 피를 못 속이는 만큼, 기른 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랜 세월 동안 차근차근 쌓인 기억은 때때로 생각지도 못한 순간 툭 하고 튀어나온다.
핏줄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두 남자가 동시에 나를 바라본 표정이 어찌나 똑같은지.
두 얼굴을 마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싸움은 이모가 붙여 놓고 뭘 그렇게 웃어? 이게 웃겨? 어?”
“하하하하하하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족의 증거가 그곳에 남아 있었다.
* * *
루카가 소원의 잔에 빈 것은 단지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원이었다.
하지만 소원의 잔이 들어준 것은 난데없는 어린 시절로의 회귀였다.
그리고 그 여파는 나에게까지 미쳤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며 인격이 잠식당했고, 뿐만 아니라 루카의 기억도 나에게 흘러들어 왔다. 그것도 소설과 같은 형태로, 불완전하게.
이 모든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공작은 마법의 물건이 의지를 갖는다 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소원의 잔의 안배이자 의지가 아니었을까?
소원의 잔이 가져다 준 것은 루카만의 행복이 아니었다.
1회차에서는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던 뤼디거와 나, 빈터발트 공작 부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미래가 바뀌었다.
특히나 빈터 발트 가는 직계의 대가 끊겼었다.
어쩌면 소원의 잔이 루카의 소원을 들어주는 길에 오랜 세월 성물을 지켜온 빈터발트 가에 대한 의리 또한 겸사겸사 지킨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소원의 잔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이 모든 건 그저 내 추측일 뿐이지만…….’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루카의 수많은 주변 인물 중, 루카의 기억을 나누어 가진 것이 왜 하필 나였을까 하는 것이었다.
루카가 소원의 잔에 소원을 빌던 그 순간, 유일하게 남은 후회와 미련이었기 때문에?
외로워하는 루카에게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루카의 행복을 만들어주기 위한 상대로 소원의 잔에게 선택된 것일까?
유디트로서의 기억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전생의 기억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마 두 인격은 서서히 섞이게 되겠지.
그렇게 된 나는 유디트일까? 아니면 전생의 나일까?
내가 이렇게 변했기에 루카가 행복한 걸까? 원래의 나로는 루카가 행복해질 수 없는 걸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유디트, 혹은 전생의 나. 어느 쪽이든 결국은 분리할 수도, 구분할 수도 없을 만큼 섞여버렸다.
결국 전부 나인데,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분리해 가며 따져 봐야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루카의 행복을 단언하기엔 아직 이르지.’
소원의 잔은 그저 행복해질 수 있는 상황이 되도록 도와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정말로 루카가 행복해지려면……. 그것은 우리 손에 달린 일일 것이다.
나는 그냥 전생과 현생, 두 사람의 기억만큼 루카를 행복하게 해주면 되는 거야.
이 소설을 따듯하고 풋풋한 성장 소설로 바꾸겠다는 내 결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반짝이는 행복을 그리며, 결연히 눈을 빛냈다.
CHAPTER16 이러니저러니 해도 장르는 바꾸었습니다.
며칠 뒤, 선왕의 면회 금지가 풀렸다. 나는 면회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바로 선왕을 찾아뵈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오오, 유디트……!”
선왕은 나를 반기며 활짝 웃었다. 깊게 패인 주름 아래 벌꿀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마주 웃을 수 없었다. 면회가 가능하긴 했지만, 선왕은 여전히 자리보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얼굴은 또 왜 그리 해쓱한지. 침대가 아니라 관에 누워 있다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정작 끌려간 건 난데 말이야…….’
결국은 나 때문에 이리된 것 아니던가. 안쓰러운 맘에 나는 걱정이 묻어나는 눈길로 선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