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49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49화
선왕은 여전히 나를 마주한 것이 믿기지 않는지 내 손을 와락 부여잡았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남아 있는 상처에 닿았다. 선왕은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고운 손은 또 왜 이럴꼬. 그 놈들이 그랬느냐? 그 몹쓸 것들이 너를 고문이라도 한 게야?”
나직이 흘러나오는 선왕의 목소리는 지옥의 전주처럼 살벌했다. 그의 핏발 선 눈이 내 손을 꼼꼼히 훑었다.
상처는 거의 아물어서 이제 흔적만 남았지만, 선왕의 눈에는 피라도 철철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이건 제가 도망치다가 실수해서 그래요. 큰 상처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큰 상처가 아니기는!”
선왕은 나직이 탄식했다.
그러는 사이, 선왕의 시선이 내 왼손 약지에 끼워진 라벤더 다이아몬드 반지에 닿았다.
안 그래도 뤼디거를 못마땅해하는 선왕이 아니던가.
선왕이 열 받아서 또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한 번 더 혈압이 오르면 정말 큰일 날지도 모르는 만큼, 나는 황급히 반지를 가리며 손을 움츠러트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당장 그 반지 빼라느니, 인정 못 한다느니 고래고래 외칠 줄 알았는데 선왕은 시선을 비스듬히 흘리며 우물우물 물을 뿐이었다.
“거…… 반지는 또 왜 그 모양 그 꼴이냐. 원래는 좀 더 그럴듯했던 것 같은데.”
나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탈출을 시도하면서 금장이 다 닳아 없어졌다 보니 초라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이아의 빛만큼은 여전했다.
‘내가 그렇게까지나 힘들게 쟁취해서 지금의 행복이 있다는 느낌이란 말이지. 뿌듯하기도 하고.’
나는 선왕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뤼디거를 언급했다.
“뤼디거 씨가 새것으로 바꿔준다 했지만……. 전 이게 유난히 애착이 가네요. 이런 건 의미가 더 중요하니까요.”
뤼디거가 거론되었지만, 선왕은 오히려 침통해하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입만 달싹이던 선왕이 한참 끝에 말을 꺼냈다.
“그 빌어먹을 놈 덕에 널 구할 수 있었다 들었다.”
너무 작게 말해서 처음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선왕이 뤼디거를 두둔하다니?
‘왜 이러지……. 답지 않게.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는데…….’
나는 의아해하며 선왕의 낯을 살폈다. 해쓱하긴 하지만 죽을 사람 같지는 않은데…….
내가 걱정하거나 말거나, 선왕은 내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침통히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지켜주겠다고 했는데, 이 왕실에서 네가 납치당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내가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구나.”
죄책감 어린 목소리에는 통한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이전과 같이 정정하지 못함을 인정한 노인에게서는 패배감과 무력감이 느껴졌다.
나는 다급히 선왕을 위로했다.
“할아버지 때문이 아니에요. 그 불한당들이 폭약까지 써가며 왕궁의 시선을 돌렸잖아요. 그들이 그럴 줄은 아무도 몰랐어요.”
“아니다. 그런 건 전부 허울 좋은 핑계다. 내가 널 왕궁에 가두어 둔 건, 왕궁에서라면 안전하리란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네가 빈터발트의 타운하우스에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겠느냐.”
“…….”
“또 내 손으로, 내 고집으로 똑같은 실수를 할 뻔했구나. 만약 널 잃었다면 내 얼마나 후회했을지…….”
선왕의 주름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할머니와 바네사 왕녀를 떠올렸는지,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짙게 물들었다.
바네사 왕녀는 선왕이 자신을 아끼는 것이 단지 그레타 왕녀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선왕으로서는 그레타 왕녀와 별개로 바네사를 아꼈을 터였다.
나를 걱정하는 그의 마음이 진심인 것처럼.
예전에는 선왕이 왜 그렇게 빈터발트라면 치를 떨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좀 알 것 같았다.
바네사가 애를 낳다 죽은 것도 죽은 것이지만, 그녀가 요나스를 임신한 시기를 생각할 때 공작이 왕녀에게 섣불리 손을 댔다고 착각하기 딱 좋았다.
아니면 바네사를 추행한 후 그 사실로 바네사를 협박해 억지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든가.
내가 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철도 부설권을 제안한 것이 빈터발트 가가 아니라 선왕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였다.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막시밀리안이 소원의 잔에 소원을 빈 게 아니냐는 말이 암암리에 돌 정도로, 철도 부설권은 빈터발트 쪽에 유리한 계약이었다.
그래서 생각도 못 했다.
‘철도 부설권이 그저 바네사를 위해, 그리고 바네사의 아이를 위해 선왕이 걸어둔 안전장치였을 줄이야.’
선왕은 철도 부설권을 대가로 지불하면서 일부러 빈터발트 가에 목줄을 매어둔 것이었다.
‘공작을 믿지 못한 거지. 실제로 바네사 왕녀를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니까 그게 선왕의 눈에 더 잘 보였을 테고. 혹시나 공작이 바네사 왕녀를 홀대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한 끝에 내어둔 묘수가 아니었을까?’
선왕이 그렇게까지 했지만, 바네사는 출산을 하다 죽고 만다.
얼마나 허탈했겠는가. 아마 빈터발트를 향해 고개도 돌리고 싶지 않은 심정일 터였다.
그렇게 빈터발트라면 치를 떨었던 그가 어깨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
“내가…… 빈터발트 놈이라면 정말 믿을 수가 없지만…….”
선왕은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그놈. 그놈은 제법 패기가 괜찮았어. 집요하고, 근성도 있고. 무릇 사내라면 제 여자다 싶은 상대를 얻기 위해 그런 고집 정도는 부려줘야지. 권력에 빌빌 기는 게 아니라.”
선왕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니까 선왕이 말하는 그놈이 뤼디거 말하는 거 맞지? 설마 지금 이거…… 우리 사이를 허락해 주는 거야? 정말로?
믿을 수 없었던 나는 입만 벙긋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이제 무슨 낯으로 너의 결혼을 방해하겠느냐?”
선왕은 쓰게 웃으며 읊조렸다.
그리 말하는 선왕의 기세가 한 풀 꺾여 있어, 마냥 반색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심정으로 선왕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할아버지…….”
“어허. 이럴 땐 그냥 알겠습니다,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또 마음 바꾸면 어쩌려고.”
선왕은 껄껄 웃으며 짓궂게 덧붙였다.
선왕의 웃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토록 단단했던 자존심과 고집이 무너졌기 때문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하여튼 그토록 바라던 결혼의 허락이었다.
선왕이 반대한다 하더라도 뤼디거와의 관계를 재고할 생각은 없었지만, 선왕이 허락해 주니 막상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와락 선왕을 끌어안았다. 비단옷을 펑퍼짐하게 걸쳤지만 팔에 닿는 그의 체구는 많이 말라 있었다.
내가 갑자기 끌어안아 깜짝 놀란 듯 선왕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내 등을 토닥였다. 그 손길이 무척 다정하고 따듯하여,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선왕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할 수 있어 정말 기뻐요.”
“내 미리 말해두지만 축복하는 것은 네 인생뿐이야. 그 빈터발트 놈의 앞길에는 저주를 내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거라.”
선왕은 짐짓 엄하게 말했다. 뤼디거에 대한 못마땅함이 여전히 서려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많은 감정을 목 너머로 삼켜 넘긴 나는 이제 반대로 선왕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주름진 손을 꼭 어루만지며, 나는 당연하다는 듯 선왕에게 물었다.
“결혼식에 제 손 잡고 등장해 주실 거죠?”
“물론이지.”
“그러려면 빨리 쾌차하셔야 해요. 아셨죠?”
“내가 늦게 쾌차하면 결혼식이 늦어지는 것이냐?”
선왕이 짓궂게 눈을 흘기며 물었다. 나는 나직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루카가 손잡아 주기로 했어요.”
“이런. 아군인 줄 알았는데 믿을 놈 하나 없구나!”
선왕은 탄식과 함께 자신의 이마를 찰싹 쳤다.
한 꺼풀 내려놓은 그는 자신만 만했던 이전에 비해 다소 기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휘어진 눈매에서는 예전과 같은 아집이나 도망칠 곳 없이 몰린 조급함 같은 것들은 사라져 있었다.
* * *
선왕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빈터발트 공작 부부도 수도에 와 있겠다. 약혼은 건너뛰고 그대로 바로 결혼 준비에 돌입했다.
선왕이 또 언제 어떻게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며, 기회가 닿았을 때 돌이킬 수 없게 도장을 찍어 놔야 한다는 것이 뤼디거의 요지였다.
그에는 나 또한 동감이고.
그렇게 뤼디거와의 결혼에 박차가 가해졌다.
나를 소개하는 연회도 정신없었는데, 이제는 결혼식이다. 챙겨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럴 때일수록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로라의 능력이었다.
빈터발트의 용접꾼은 그사이에 럼가트 왕가에서도 알아주는 수완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일사천리로 일을 해치우는 로라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고마워, 로라.”
“뭘요. 이쯤이면 거뜬하죠!”
“그래도 항상 너한테만 부탁해서 미안하네.”
“마님께서 다른 사람한테 부탁했다면 되레 자존심이 상했을걸요. 이 나를 두고! 싶었을 거예요.”
로라는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자기 일에 긍지가 있는 만큼, 내가 결혼이라는 큰 경사를 온전히 자신에게 맡겼다는 사실이 뿌듯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일이 적다는 건 아니었다.
이제 십 대 후반인 로라를 혹사하는 것 같은 죄책감에 나는 최대한 로라를 도울 방안이 뭐가 있을까 떠올려 보았다.
‘그래. 손이 부족해 보였지.’
지금도 왕궁의 시녀들과 함께 일하며 이런저런 부탁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시녀인 만큼 맘껏 일을 시키긴 힘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그 모든 일을 너 혼자 처리하긴 좀 힘드니까, 밑에 애들을 좀 붙여줄게. 몇 명이나 필요하니?”
“솔직히 손이 스무 개는 있었으면 좋겠어요.”
“좋아, 열 명.”
내 말에 로라의 둥근 눈이 크게 떠졌다. 화색을 감출 수 없는 듯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콧잔등의 주근깨도 들썩였다.
“정말요? 그 정도면 저, 하녀장 급이나 다름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