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53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53화
정말 오랜만이었다. 빈터발트에 있을 때는 그래도 종종 함께 이런 시간을 즐기곤 했는데…….
빈터발트를 떠난 뒤 처음으로 갖는 독대이다 보니, 자리가 좀 어색했다.
소피아가 말했다.
“오늘 내가 추태를 부렸구나.”
“아니에요.”
나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것이 입바른 소리라는 걸 그녀도 알고 나도 알았다.
소피아는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말리나 왕녀님과는 예전부터 썩 사이가 좋지를 않았어. 왕녀님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만……. 안 맞는다 해야 할까.”
소피아는 혀를 찼다.
같은 바네사 추종자라 할지라도 묘한 신경전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말리나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는 않은지, 소피아는 바로 말을 돌렸다.
“결혼 축하한다.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는데.”
“짐작하셨다고요?”
“빈터발트 가에서 33년간 있어 온 나다. 빈터발트의 사내들 성정이라면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지. 뤼디거가 너에게 그리 대하는 걸 보고도 내 모를까.”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뤼디거가 노골적으로 굴긴 했지만……. 소피아가 뤼디거의 일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만큼, 그녀의 답은 예상외였다.
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소피아가 할 이야기가 있다며 사람을 물렸는데, 과연 그것이 무슨 말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때 소피아가 테이블 한구석에 두었던 상자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열어보라는 손짓에 나는 주저하며 상자를 열었다.
“이건…….”
“바네사 왕녀님의 유품이란다. 왕녀님께서 결혼하셨을 때 했던 목걸이지. 이걸 너에게 전해주고 싶었단다.”
상자 안에서 무척 찬란한 빛이 눈을 찌를 듯 빛났다.
예전에 귀한 다이아를 받았을 때도 눈이 부셔 한참 뒤에야 보석을 응시할 수 있었는데, 이번 보석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특히나, 이 보석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바네사 왕녀의 유품이라니……. 그것도 결혼식 예물?’
나는 감히 이 목걸이에 손을 뻗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소피아에게 물었다.
“이걸…… 왜 저에게?”
설마 소피아가 신부 드레스에 목걸이를 해야 한다 주장한 것도 이 목걸이 때문일까.
하지만 여전히 소피아가 나를 왜 그렇게까지 아끼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나는 연보라색 눈을 제외하면 바네사와 닮은 구석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저는 바네사 왕녀님과 아무 사이도 아닌, 그저 눈동자 색이 같은 먼 친척일 뿐이잖아요.”
“그 눈동자 색이 중요한 거야.”
소피아는 단호했다.
“바네사 왕녀님이 마가렛 왕녀님을 닮아 선왕 전하께서 아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니?”
“……네.”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혹여나 공작과 대화했던 것들에 대해 들켰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두 사람이 닮았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과민 반응 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을 조심했다.
“선왕 전하께서는…… 바네사 왕녀님도 어디론가 달아날까 봐 항상 불안해했단다. 그에 답답했던 왕녀님은 결국 결혼으로써 왕궁에서 도망쳤지만…….”
소피아의 목소리가 먹먹히 잦아들었다.
“항상 왕녀님은 자신이 연보라색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하고 바랐단다. 그 눈동자 때문에 저 홀로 이리 답답하게 살아야 한다 한탄했지.”
뒤늦게 선왕의 총애를 받는 나 자신도 그렇게 느끼는데, 당시의 바네사는 더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기력 넘치고 쌩쌩한 선왕이라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쳤다.
“왕녀님께서 항상 하던 말씀이 있었단다.”
“무슨…….”
“만약, 다른 연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사람을 만난다면 잘해주라고 말이야.”
‘그 아이는 내가 지닌 굴레를 넘어, 나로 인한 굴레까지 모조리 가져가 줄 테니까. 불쌍한 아이야.’
소피아가 작게 읊조려 덧붙인 말에 순간 말문이 탁 틀어 막혔다.
아마 바네사는 짐작했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도망치면서도 선왕의 집착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또 다른 연보라색 눈동자의 존재가 등장한다면 그에게까지 번질 것임을.
바네사는 선왕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으니까.
또 다른 바네사. 또 다른 그레타로서 내가 여기 있지 않던가.
하지만 마냥 다른 사람의 대체품으로 취급되는 것에 답답해하고 마음 졸이기엔, 나는 꽤나 머리가 굵어져 있었다.
‘게다가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도록 항상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
나는 루카와 뤼디거를 떠올렸다. 항상 나를 나로서 봐주는 그 두 사람이 있기에, 나는 선왕의 일도 그저 골치 아픈 추억 정도로 웃어넘길 수 있었다.
‘뤼디거가 고집으로는 선왕에 지지 않아 다행이지……. 아, 그래서 바네사는 도피처로 빈터발트를 택한 걸까.’
실제로 공작이 제 입으로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 생각하니 진짜 어지간한 핏줄이다 싶긴 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있자, 소피아가 재촉하듯 보석을 내 쪽으로 밀며 말했다.
“그러니 이 유품의 정당한 주인은 너란다, 유디트.”
나는 조용히 바네사의 목걸이를 받았다. 받으면서도 의아했다.
바네사의 무엇이 그렇게 소피아를 붙들고 있는 걸까?
소피아의 모든 행동과 결정의 기반은 바네사에게 놓여 있었다.
그런 내 심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소피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바네사 왕녀님을 그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구나.”
“그렇다기보다……. 음, 솔직히,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 거짓말을 하기엔 너무나 궁금했다.
“하하……. 병아리는 알에서 부화한 뒤 제일 처음 본 것을 어미로 인식한다지?”
소피아가 나직이 웃었다. 바네사를 그리는 그녀의 눈이 꿈을 꾸는 듯 몽롱해졌다.
“마찬가지였단다. 내 인생에 있어서 온갖 좋은 것들을 제일 처음 건네주신 건 바로 바네사 왕녀님이었거든. 칭찬도, 신뢰도, 선물도, 기쁨도……. 왕녀님 이전에 그 누구도 나에게 주지 않았던 것들이지.”
바네사와의 추억을 되짚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때의 기쁨마저 불러일으킨 듯 나직이 젖어 있었다.
두루뭉술한 대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되었고 납득 또한 되었다.
확실히, 제일 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 준 이라면 잊을 수 없는 법이다.
나에게 또한 그런 존재가 있었다.
내 언니, 라리사.
나 또한 라리사로 인한 복수심으로 루카를 괴롭히고 빈터발트에 복수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소피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소피아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요나스에 대해 알게 된 것 같구나.”
“……네?”
순간 심장이 철렁였다.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아니겠지. 떠보는 걸 수도 있다. 나는 재빨리 표정 관리를 했지만 늦은 뒤였다.
소피아는 나직이 웃음 지으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요나스가 공작의 피를 잇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다.”
자, 잠깐. 그 사실을 왜 그렇게 태연하게 말해? 소피아는 모르고 있는 거 아니었어?
당황한 내가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이어지는 소피아의 말은 더욱 놀라웠다.
“며칠 전, 막시밀리안과 만났다지.”
“……네.”
“그래……. 아마 무슨 대화를 했는지, 나에겐 비밀로 하라고 했을 거야. 그렇지?”
“…….”
와, 족집게네, 족집게야……. 소피아는 연달아 충격 발언을 펑펑 터트렸다.
“그 남자 하는 일이야 빤하지.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빈터발트 사내들 성정이라면 손바닥 들여다보듯 뻔하다고.”
그래도 그렇지, CCTV라도 달아놓은 것도 아니고…….
설마 막시밀리안, 우리한테는 소피아에게 입단속 하라 해놓고는 집에 가서 미주알고주알 다 말한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된다 싶으면서도 소피아가 너무 훤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나스의 일은 어떻게 알고 계신 거예요?”
“루카 입적이 취소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내가 아는 공작은 루카가 핏줄이건 말건 쉬이 놔줄 사람이 아니지. 내가 요나스를 아꼈으니까. 그런데도 루카의 입적을 포기했다는 건…… 루카의 혈통을 들켰기 때문이야. 안 그러니?”
정답이다. 완벽한 사실은 아니었지만 본질에 근접했다.
뛰는 공작 위에 나는 소피아가 있을 정도로, 그녀는 공작의 모든 생각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다면 부인께서는 알고 계셨던 거예요? 요나스가 공작님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소피아가 웃었다. 항상 진중하고 무표정하던 그녀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밝고 경쾌한 웃음이었다.
“당연하지. 바네사 왕녀님과 나 사이에 비밀은 없었어. 수족이 모르는 머리의 일이란 존재하지 않지 않니.”
머리가 울렸다.
“그러면…… 공작님께 일부러 숨기신 건가요? 공작님은 공작 부인께서 요나스의 출신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알고 계시던데.”
“당연하지. 그게 내 소소한 복수인걸.”
웃음을 멈춘 소피아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냉담했다. 그림자를 사람으로 옮겼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녀에게선 건조하고 서늘한 응달의 메마른 향이 났다.
정색한 그녀의 낮에 내가 잠시 할 말을 잃은 사이, 그녀는 찻잔을 들어 입을 한 모금 축였다.
“나도 계속 숨길 생각은 없었단다. 그 사람이 나에게 왕녀님과 그런 거래를 했다 솔직히 털어놓았다면, 나도 털어놓을 생각이었지.”
그러나 공작은 자신과 바네사 사이의 계약을 계속해서 숨겼다. 소피아가 알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하지만 그 사람, 은근히 소심하고 사서 걱정하는 습관이 있거든.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낼 거라 생각했는지, 끝내 말을 안 하더구나.”
‘그’ 공작을 저렇게 평할 수 있는 것도 재주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북부 공작을 말 한마디로 평범하고 소심한 사내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나도 입 다물고 있었지. 뭐…… 그쪽이 먼저 숨겼으니 나도 굳이 말할 필요 없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