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55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55화
* * *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라리사의 꿈이었다.
달빛을 자아 만든 듯한 외모로 다가오는 언니는 죽기 전의 파리하게 질린 모습이 아닌, 한창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나를 보고 빙긋 웃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는 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언니의 감촉이 너무나 생생해 놔주고 싶지 않았다.
“언니.”
내 부름에 라리사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 지을 뿐.
그동안 한 번도 언니가 꿈에 찾아와 준 적이 없었다.
오늘은 나를 축복하기 위해 찾아와 준 걸까.
그렇다면 정말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나는 라리사를 끌어안은 채, 그녀에게 지금껏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나에게 루카를 남겨줘서 고마워. 나는 부족한 점 많은 이모였지만……. 앞으로는 루카를 행복하게 해줄게.”
언니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웃었다. 활짝 웃는 그 미소 너머로, 5월 엠덴의 만개한 꽃밭이 펼쳐졌다.
* * *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그전에는 정신없이 바빠서 결혼식에 대한 싱숭생숭함에 빠질 틈이 없었다 보니, 막상 당일이 되고 나서야 여러 가지 감정이 몰아쳤다.
‘정말 정신없는 연애였지……. 아니, 잠깐. 나 뤼디거랑 연애를 했다고 할 수 있긴 한가?’
선을 봤다 해도 이보다는 더 교제했을 것 같았다.
‘뭐, 연애는 결혼하고 나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나는 가벼이 생각해 넘겼다.
나보다는 뤼디거의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결혼을 먼저 하는 쪽이 옳은 선택 같았다.
신부대기실에서 준비하는 동안, 먼저 준비를 끝마친 왕족 여자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결혼 전에 신부를 축복하기 위해서였다.
다들 두런두런 덕담을 건네는 와중, 죠세핀이 유난히도 조용했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은 듯싶었다.
그래도 경삿날이라고 표정 관리를 하는 모양인데, 언뜻 지나가는 표정이 썩 좋질 않았다.
아마 내 결혼을 기점으로 왕이 죠세핀의 결혼에 더욱 박차를 가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이 최고의 신랑이라 점찍어둔 뤼디거가 이제 품절된다. 왕이 보기에 괜찮은 놈들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그렇다. 그러니 다른 멀쩡한 놈들도 하나둘 사라질까 봐 겁이 난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듯, 툭 하니 죠세핀에게 말을 걸었다.
“가끔은 직접적으로 말해야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눈치 빠른 죠세핀은 주어가 없어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나는 심드렁히 말을 이었다.
“제 경험으로는 보통 직접적으로 말해도 잘 안 들으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여러 번, 노골적으로 말해야 해요. 그렇게 빙빙 돌려서는 절대 인지 못 하실걸요. 아니, 안 하실 거예요.”
이건 예전 생의 경험이다. 전생의 나도 결혼 문제와 관련해서 어지간히도 부모님과 입씨름을 했었다.
“신부에게 축복을 건네야 하는데, 제 쪽에서 조언을 듣고 있네요.”
죠세핀이 쓰게 웃었다. 이런 날 틈을 보인 스스로를 책망하는 기색이었다.
“뭐……. 조언도 듣고 축복도 해주시면 되죠. 그리 팍팍하게 살 필요 있나요.”
넉살스러운 내 대답에 그제야 딱딱하게 굳은 죠세핀의 입가가 풀어졌다. 죠세핀은 마주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게요. 유디트, 결혼 축하해요.”
“고마워요.”
처음엔 서로 상대를 썩 좋게 보지 않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제법 좋은 친척 사이가 되지 않을까. 문득 그런 확신이 들었다.
전생의 부모님은 현재 국왕처럼 결혼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셨고, 나는 내 결혼관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려 했다.
잘생기고, 돈 많고, 키 크고, 목소리 좋고, 몸 좋고, 성격 좋은…….
‘그때 부모님이 그런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했었지? 봐봐, 결국 환생하니까 생기잖아, 그런 남자.’
여전히 ‘성격 좋은’이라는 수식어에는 양심의 가책이 들지만, 다른 것만큼은 완벽했다.
나는 나를 위해 오늘 그 누구보다도 멋들어지게 치장하고 있을 내 신랑을 떠올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뤼디거는 결혼식 전부터 유난히 근육 운동과 피부 관리에 한창이었다. 나한테 보여 주려면 좀 더 완벽하게 관리해야 한다나 뭐라나.
과도한 근육 운동 때문에 예복이 맞지 않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며 재단사가 한 소리 했다지만, 나로서는 더더욱 기대될 뿐이었다.
‘벗겨 먹을 생각을 하니까 손가락이 간질간질하단 말이지.’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입맛을 다셨다. 새 신부가 갖기엔 다소 파렴치한 생각일 테지만 알게 뭔가. 아무도 내 머릿속을 안 보는데.
“……표정이 음흉하다?”
이런, 머릿속을 볼 순 없지만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바로 지적하는 루카의 말에 나는 냉큼 얼굴을 정돈하고는 시치미를 뗐다.
“예쁘게 차려입은 이모한테 표정이 음흉하다니, 실례야, 루카.”
“하지만 사실이 그런걸.”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읊는 건 신사답지 못한 태도랍니다, 마이바움 경.”
“내 나이 때는 순수하고 솔직한 게 좋은 거랬어.”
“누가?!”
“이모가.”
“그게 언제적……. 아, 됐다, 됐어.”
하여튼 고무줄 같은 나이 기준! 이래서 회귀자는 안 된다니까. 나는 혀를 찼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늘은 내 결혼식인데! 좋은 말 해주면 입에 가시가 돋나.
나는 루카를 향해 눈을 흘기며 물었다.
“그래서, 이모 예뻐, 안 예뻐. 솔직한 루카 씨가 말해보시지?”
“그런 건 신랑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뤼디거 씨는 당연히 예쁘다며 눈물 줄줄 흘릴 테니까.”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루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루카는 얼굴을 와락 구기며 투덜거리듯 덧붙였다.
“……예뻐. 예뻐 죽겠다, 아주.”
* * *
식장에 들어서기까지 무척이나 정신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보통 이럴 때 신부 지인들이 대기실에 찾아오곤 하지만, 내 인맥은 모두 친척들에 국한되어 있어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끽해야 버켄레이스 부인이 된 이사벨라 정도? 그마저도 방계 친척으로 얽혔으니 정말로 협소한 인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이가 나를 찾아왔다.
“보아통 왕자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보아통……? 외국 사절단도 왔어요?”
규모 그렇게 안 키운다며! 소박하게 한다며!
내가 일일이 다 점검을 못 하다 보니 주변에 맡겼는데, 그새 일을 이렇게 키워놨다.
어이없었던 나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헛기침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말리나가 총대를 메고 머쓱히 말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오랜만의 왕가의 결혼식 아니냐. 경하할 일은 크게 해야지. 암암. 그렇고말고.”
“그래. 왕가와 공작가 사이의 국혼 아니냐. 보아통만이 아니라 크로이텐에서도 사절단을 보냈다.”
소피아가 말리나를 지원했다.
내 드레스를 고를 때는 그렇게도 반목하더니, 지금은 아주 장단이 잘 맞았다.
“그런데 보아통 왕자비께서 저를 왜…….”
당혹스러운 나는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국빈이라 해도 친하지 않은 사이에 신부대기실에 찾아오는 건 쉬이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들어오시도록 하렴.”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오래지 않아 보아통 왕자비가 대기실에 들어섰다
보아통 특유의 천을 넉넉히 쓴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나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 무례함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얼굴인데…….
“잠깐……. 레아?!”
“호호호! 그래, 나야, 유디트. 결혼 축하해!”
얘가…… 왜 여기 있어?
엠덴 마을에 두고 온 레아가 난데없이 보아통 왕자비가 되어 나타났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눈만 깜빡였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레아는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이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았던 나는 레아를 잡아당기며 질문을 쏟아냈다.
“너, 결혼했어? 언제? 거기다 왕자비라니?”
“네가 빈터발트 공작가 마차를 타고 떠난 그날, 나도 결심했지. 너 못지않은 남자를 잡겠다고. 그런데 네 상대는 빈터발트 가잖아. 빈터발트 가에 버금갈 만한 가문은 왕가밖에 없는데, 럼가트 왕가에 결혼적령기 남자는 없잖아? 그래서 해외로 빠졌지.”
“…….”
그래서 이웃 나라 왕자를 꾀어서 그새 결혼까지 하셨다?
감탄할 만한 행동력이다. 평범한 시골 처녀의 추진력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다.
나는 할 말을 잃었고, 그것은 대기실에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연락이라도 하지.”
“그러게. 내 결혼식에도 안 와 준 매정한 친구 결혼식에, 초대도 안 했는데 친히 찾아와주니 고맙지?”
레아는 우쭐거렸다. 나로선 조금 억울했다.
아니, 결혼식 한다고 말하기나 하든가!
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자, 레아는 깔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뭐, 하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결혼했다 보니 주변에 알릴 새가 없었어. 네가 내 결혼식에 와주지 않았다고 뭐라 하는 건 아니야! 내가 먼저 결혼해 봤는데, 그래도 결혼식에 친구가 있는 게 좋겠더라고. 그래서 네 소식 듣자마자 부랴부랴 왔지.”
결론은 속도위반이란 뜻이렷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엠덴 마을 최대의 아웃풋은 레아가 아니었을까? 이 행동력으로는 뭘 해도 될 애 같았다.
그렇게 레아가 말을 쏟아내고 있는 사이, 레아와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루카가 나직이 속삭이듯 덧붙였다.
“친구가 있긴 있었구나?”
“……나도 지금 알았어.”
나도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레아와 내가 이렇게까지 알뜰살뜰한 사이였을 줄이야.
뭐, 순수한 축하를 위해서 이렇게 찾아왔다기보다는 자기가 왕자비가 된 걸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테지만…….
그래도 결혼식에 친구가 와주는 건, 레아 말대로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덕분에 친척이 아닌 친구 하나쯤은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기도 하고.
“고마워, 레아.”
내 답에 레아가 씩 미소 지었다. 엠덴에서 이것저것 따진다며 혼기 놓친 여자 취급을 받던 우리는 그렇게 마주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