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5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56화
* * *
드디어 결혼식의 순간이 되었다.
준비를 끝마친 나를 선왕이 데리러 왔다. 선왕은 나를 보고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미처 보지 못한 그레타의 결혼식과 좋지 않게 보내야만 했던 바네사의 결혼식을 겹쳐보는 듯 그의 벌꿀색 눈동자가 한참을 흔들렸다.
나는 선왕에게 말갛게 웃으며 다가갔다.
“할아버지.”
“……정말, 정말 예쁘구나. 유디트.”
목이 멘 선왕은 한참을 헛기침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고, 선왕의 주름진 손이 내 손을 잡아 자신의 팔에 올려놓았다.
선왕은 민망함을 감추듯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흥. 이렇게 예쁜 내 손녀를 데려가려 하다니! 내 빈터발트 그놈에게 널 순순히 보내진 않을 것이다!”
순순히 안 보내면…… 결투라도 하시게요? 10초도 안 걸릴 것 같은데?
상대가 누구든 손속에 거침이 없는 뤼디거다. 선왕이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무력을 써서 선왕을 처리하고 날 데려갈 모습이 훤히 보였다.
인정해 준 김에 협조적으로 굴면 좋으련만……. 선왕은 아직도 불퉁하니 결혼 인정 못 하는 장인어른처럼 굴었다.
‘오늘은 그래도 내 결혼식인데……. 설마 지난 연회 시즌2 같은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
뤼디거도, 선왕도 제발 자중해 주기를 바라며, 나는 선왕의 말을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선왕의 손을 붙들고 복도를 지나 식장에 들어섰다.
왕궁의 대연회실을 가득 메운 것은 흰 작약과 연보라색 아이리스였다. 그리고 귀를 먹먹하게 메우는 음악과 쏟아져 내리는 함성.
나는 잠시 홀린 것처럼 멍하니 서서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내 뒤에서 레아가 혀를 차며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왕자랑 결혼했으니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식에서 이렇게 차이가 나 버리면 내가 진 것 같잖아……! 으으. 그렇다고 결혼식을 두 번 할 수도 없고!”
“하하, 두 번 하면 되지요. 세 번도 해도 됩니다.”
말을 받은 것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검은 머리를 잘 길러 묶은 사내였다. 아마 레아의 남편, 보아통의 왕자일 것이다.
“나도 상식은 있는 여자거든요? 그랬다가는 보아통 사람들한테 욕먹는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레아의 상식은 이해하기 좀 힘드네요. 우리가 금실이 좋아 결혼식을 또 한다는데 왜 욕을 먹습니까?”
“가끔은 보아통 사람들이 불쌍해요…….”
보기 좋네. 레아가 왕자와 투덕거리는 모습에 나는 나직이 웃었다.
그래. 나도 이제 내 남편이 될 사람에게로 가야지.
나는 잠시 멈췄던 발을 옮겼다.
화동인 샤를로트와 루카가 옷을 맞춰 입은 채 나란히 서서 내 앞길에 꽃을 뿌렸다.
샤를로트가 방긋방긋 웃는 것과 달리 루카의 얼굴은 거무죽죽했는데, 화동이 되기 싫다며 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모 결혼식에 꽃을 뿌려? 누구 좋으라고!’
‘누가 좋긴? 내가 좋지! 아니면 뭐야, 넌 내가 좋은 게 싫어? 내 결혼식, 역시 반대하는 거지?’
‘아니, 반대가 아니라……. 내가 굳이 꽃을 뿌릴 이유는 없다, 이 말이지.’
‘흑흑, 샤를로트는 해준다고 했는데. 육촌보다도 못한 조카 같으니.’
‘아, 진짜. 알았어! 해준다, 해 줘! 진짜, 샤를로트 걔는 왜 또 그걸 해준다 해서!’
내가 우는소리 하는 것에 두 손 들고 포기했지만, 그래도 역시 탐탁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화동이 그리 중요한 역할은 아니었다.
그저 화동으로 나란히 옷을 차려입은 루카와 샤를로트를 보고 싶어 우긴 것뿐이었다.
‘역시 우기길 잘했단 말이지. 귀여워 죽겠네.’
나는 앞서 걸어가는 작고 둥근 뒤통수를 보며 흡족함에 미소 지었다.
나만 그리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샤를로트와 루카가 앞서 나갈 때마다 다른 귀족들도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탄성을 내뱉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루카의 표정은 더더욱 구겨졌고.
그렇게 긴 융단을 밟아 나갔다. 대연회장이 큰 만큼, 내가 걸어가야 할 길도 길고 길었다.
그 끝에 뤼디거가 서 있었다.
짙은 보라색 융단 위에 흰 예복을 잘 차려입은 뤼디거가 비스듬히 몸을 돌린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뤼디거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뤼디거의 청회색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루카에게 뤼디거가 눈물을 줄줄 흘릴 거라고 말한 건 나였지만, 정말로 울 줄은 몰랐다.
‘무슨 32년간 쌓아뒀던 눈물을 한 번에 쏟아내는 것도 아니고……. 요즘 너무 자주 울지 않아?’
그의 뺨이 눈물로 흥건했다. 뤼디거는 눈물은 눈물대로 흘려 내며 나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눈물을 닦아낼 생각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뤼, 뤼디거 빈터발트가 울어?”
“뭐? 대령, 아니, 준장이 운다고?”
“설마 신랑을 바꿔치기 당한 거 아냐?”
뤼디거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주변이 웅성거렸다.
내 옆에서 날 에스코트하는 선왕의 입 또한 떡 벌어졌다.
어찌나 놀랐는지, 절대 뤼디거에게 나를 순순히 넘기지 않을 거라 다짐에 다짐을 거듭한 그의 손이 저절로 풀릴 정도였다.
그 틈을 타 뤼디거가 냉큼 내 손을 낚아챘다. 솔개가 다람쥐를 채가듯 재빠른 손짓이었다.
“아니, 이런!”
선왕은 뒤늦게서야 아차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뤼디거는 우는데, 나는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나는 웃음을 꾹 참으며 물었다.
“좋은 날 왜 울어요.”
“유디트 씨가 너무 아름다워서요.”
“내가 예쁜데 왜 울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유디트 씨가 제 아내가 된다는 게 믿기지 않 아서요.”
아이고, 이 남자 봐라.
나는 손을 뻗어 뤼디거의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비단 장갑 끝이 그의 눈물로 젖어 들었다.
“이러다 또 눈 붓겠네.”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눈에 힘을 줄 거라 안 부을 겁니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만 뤼디거는 당연히 가능하다는 듯 억지를 부렸다. 나는 나직이 웃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아 깍지를 꼈다.
뤼디거는 내 손을 잡고 보랏빛 융단을 밟아 주례를 봐줄 교황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우리의 미래를 걷듯, 흔들림 한 점 없었다.
교황의 주례사가 이어졌다. 미래에 축복을 내려주는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마주 잡은 손의 맥박이 내 심장을 두드렸다.
“……이에 주례는 유디트 마이바움과 뤼디거 빈터발트의 혼인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을 여러분 앞에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주례가 끝났다.
돌아본 내 위로 모두의 축복이 별빛처럼 쏟아져 내렸다.
마치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을 옮겨온 것 같은 순간이었다. 내 인생만큼은 계속 이런 로맨스여도 좋을 것 같은데.
나는 감격에 겨워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 끝에 루카가 잡혔다. 계속 투덜거리기만 하더니, 주례가 이어지는 새 몰래 울었는지 눈시울이 붉었다.
내가 그리 감격에 젖어 있는 사이, 돌연 뤼디거가 내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쪽 손을 들었다.
‘잠깐, 왠지 익숙한……. 수상한 이벤트의 느낌이……!’
아니나 다를까, 뤼디거가 손을 들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눈?”
때 아닌 눈에 사람들이 또다시 웅성거렸다.
지금이 겨울이긴 하지만, 여기는 실내인데요……!
설마 뤼디거가 왕궁 천장을 들어내기라도 한 건가 싶어 깜짝 놀란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살폈다.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어떻습니까? 이 영광스러운 순간, 유디트 씨에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풍경이 혹시…… 빈터발트의 눈 내리는 설경인가요…….
나는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유난히도 반짝반짝하고 하얀 것들이 사르륵 떨어져 내렸다.
“잠깐……. 이건.”
“빈터발트를 그대로 옮겨올 수는 없어 최대한 비슷하게 해봤는데……. 마음에 드시는지요?”
아니, 그걸 꼭…….
보석으로 해야 해?
지금 하늘에서 내리고 있는 건 바로 다이아와 진주를 갈아 만든 인공 눈이었다.
보석이라는 걸 뒤늦게 안 사람들은 천장을 향해 손을 뻗어 조금이라도 보석가루를 묻히려 애를 썼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남자였다. 돈 귀한 줄 모르고! 내가 좋아하기만 하면 다인 줄 알고!
나는 속으로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 뤼디거의 스케일에 대한 불만을 잔뜩 투덜거렸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뤼디거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반짝한 풍경 속에서 나를 보며 환히 웃을 뿐이었다.
확실히 내가 지금껏 눈에 담아 온 것 중 제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 모르겠다!
나는 따지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정했다.
비록 내 인생의 장르가 로맨스가 아니라 막장 돈 지랄 코미디일지라도, 상대가 뤼디거이기만 하다면 상관 없었다.
나는 뤼디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고개가 내 손에 따라 이끌렸다.
앞으로 있을 일을 짐작했는지, 보석 눈이 내려앉아 반짝이는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감겼다.
나는 그대로 그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과감한 내 태도에 주변이 또다시 환호로 가득 찼다.
중간에 목이 졸리는 듯한 소리도 들린 것 같지만, 뭐, 선왕 아니면 루카겠지.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장르는 바뀌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