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57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1화
외전 1. 뤼디거 빈터발트
“삼촌!”
뤼디거 빈터발트는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았다.
마차에서 몸을 내민 어린 조카가 울부짖는 목소리가 마차와 함께 저 멀리로 흐릿하게 사라졌다.
그는 바로 마차를 뒤로한 채, 저와 제 조카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들개 떼처럼 달려드는 암살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암살자들은 돌연 등장한 뤼디거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저희의 수를 믿고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뤼디거 빈터발트! 네놈 혼자 우리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보느냐!”
“못할 것도 없지.”
“자신만만하구나. 네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이 수를 전부 이겨내진 못할 것이다.”
버켄레이스에서 보낸 암살자들은 백여 명에 가까웠다. 백여 명이면 1개 중대의 규모나 다름없다.
사병으로 생각해도 적지만은 않은 수였고, 암살을 업으로 하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이만한 수의 암살자들을 고용하는 데에는 돈깨나 들었을 것이다. 버켄레이스 백작가라 할지라도 감당하기 쉽지는 않았을 텐데.
‘버켄레이스에서 나와 루카를 처리하기 위해 단단히 칼을 간 모양이로군.’
지금 뤼디거를 둘러싼 암살자들은 서른여 명. 초반에 그들을 쫓던 암살자 수에 비하면 많이 줄었다.
하지만 뤼디거 홀로 상대하기 쉬운 수는 아니었다.
아마 뤼디거는 오늘 여기서 죽을 것이다.
‘하지만 호락호락 죽어줄 생각은 없지.’
뤼디거는 무덤덤하게 암살자들을 훑어보았다. 수가 밀릴 때는 그 무엇보다도 기선 제압이 중요했다.
“버켄레이스에서 개를 푼 줄 알았더니, 정치가를 보낸 모양이로구나.”
“뭐!”
“암살자라며 온 놈들이 입만 나불대는 걸 보니 수준이 빤하다 이 말이다.”
“이 자식!”
뤼디거의 도발에 암살자들이 발끈했다. 뤼디거는 마른입을 축이며 그들을 향해 여유롭게 이죽거렸다.
“결국 네놈들 모두를 죽이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닌가. 이보다 더 쉬울 수도 없지.”
“개자식, 저게 다 시간 끌기 위한 작전이다! 1팀은 마차를 쫓고, 남은 3팀과 6팀은 나를 엄호해 저 자식을 죽인다!”
눈치가 느리진 않군. 뤼디거는 속으로 혀를 차며 총의 그립을 단단하게 쥐었다.
뤼디거가 적을 응시한 것과 그의 총구가 적을 노리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탕!
제일 먼저 마차를 향해 쫓아가던 암살자가 고꾸라졌다. 뤼디거는 연달아 총을 쏘았고, 그가 쏘는 족족 암살자가 쓰러졌다.
“마차를 쫓게 할 순 없지.”
뤼디거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탄창을 갈았다.
“내가 여기 남은 건 네놈들 꼬리를 아주 끊어버리기 위해서인데 말이야.”
암살자들은 뤼디거를 공격했지만, 뤼디거는 나무를 엄폐물 삼아 숨었다. 그러고는 마차를 쫓는 암살자들을 계속해서 저격했다.
“젠장……! 일단 뤼디거부터 처리한다! 마차는 바로 쫓으면 돼!”
뤼디거가 순순히 그들을 보내 주지 않으리란 걸 깨달은 암살자는 바로 타깃을 뤼디거로 바꿨다.
뤼디거로서는 바라던 바였다.
뤼디거는 머릿속으로 제가 가진 탄창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서른. 화력이 빠듯하군.
그다지 여유가 있진 않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뤼디거는 서늘한 눈빛으로 저를 향해 몰려드는 암살자들을 노려보았다.
총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것은 암살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십 개의 총구가 뤼디거를 겨누었다.
이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총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 * *
탕!
마지막 총성이 울렸다.
숲의 새들은 이미 한차례 소란스러운 틈을 타 모두 날아갔던 터라, 이제는 급작스러운 총성에 날아 도망칠 새들도 없었다.
화약 연기가 새어 나오는 총구가 바닥으로 향했다. 총은 뤼디거의 손가락을 타고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졌다.
뤼디거는 발을 옮겨 근처의 고목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흔들리며 큰 체구가 불안하게 비틀거렸다.
뤼디거는 나무에 기댄 채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등이 나무를 타고 주르륵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뤼디거의 주변에는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뤼디거는 가물거리는 눈으로 시체의 수를 셌다.
‘둘……. 아니, 셋 놓쳤나.’
그는 나직이 혀를 찼다. 그가 완벽히 처리했어야 했는데……. 루카가 잘 도망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한스를 믿는 수밖에 없겠군.’
뤼디거는 나무에 등을 기대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에 한 발, 팔에 한 발, 복부에 세 발……. 이미 살긴 글러먹은 상태였다.
‘이것이 내 인생의 끝인가.’
뤼디거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제 삼십여 년의 인생을 반추해 보았다.
후회는 없다. 아쉬움도 없다.
군인으로 살면서 단 한 번도 침대에서 누워 맞는 평온한 죽음을 상상해 본 적 없다.
팔다리 멀쩡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딱히 애정도 충심도 없는 조국을 지키다 죽는 것보다야, 빈터발트의 차기 후계자를 살리고 죽는 쪽이 훨씬 만족스러웠다.
뤼디거의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가며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난 삼촌이랑 같이 살고 싶어……. 삼촌, 날 사랑하면 내 말을 들어줘, 제발. 응?’
사랑하니 절 두고 가지 말라며 울부짖던 루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듯 생생했다.
그걸 기점으로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루카와 처음 만난 순간.
루카가 처음으로 말을 탔을 때의 발그레한 볼.
루카가 처음으로 자허토르테를 먹었을 때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났는지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넋을 놓고 먹었다.
‘결국 그다음 날은 배탈로 고생했었지…….’
뤼디거의 입가가 피식, 저도 모르게 들썩였다.
루카는 세상을 밝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이였다. 인생에 있어 열정을 느끼지 못하는 뤼디거 그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사랑으로 느낄 줄 아는 그런 아이였다.
그래. 루카라면 뤼디거 그보다야 이 세상을 좀 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거다.
‘훌륭한 빈터발트의 후계자가 될 거야.’
그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을 내어주는 것 정도는 괜찮다.
어차피 미련 없는 인생 아니던가.
다만 후회로 남는 것은…….
‘거짓말이나마 사랑한다고 해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상처받은 듯한 루카의 낯을 떠올리며 뤼디거는 씁쓰름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그는 죽을 사람이었다. 차라리 완벽하게 정을 떼는 쪽이 루카가 앞으로 살아가는 것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도 루카가 그렇게까지 배신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지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두 번째인가.
처음은 아마……. 루카의 또 다른 혈육인 이모 유디트가 자신을 돈 받고 팔았다는 걸 알았을 때였지.
뤼디거는 불현듯 유디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루카가 앓고 있는데 조금도 신경 쓰지 않던 그녀는 악독한 이모, 그 자체였다.
그 모습에 뤼디거는 저답지 않게 버럭 화를 냈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뤼디거 그는 타인에게 기대하는 일이 없는 만큼, 불공정하거나 제 기준에 맞지 않는 일과 맞닥트려도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
분노라는 단어는 뤼디거에게 있어 사랑만큼이나 멀디먼 감정이었다.
그랬던 뤼디거가 첫 만남에서 유디트에게 화를 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루카의 주변을 맴도는 유디트와 부딪쳤고, 그때마다 뤼디거는 목청을 높이곤 했다.
그녀와 마주하기만 하면 평소의 냉정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들끓는 화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를 똑바로 노려보는 연보라색 눈동자. 그 눈동자와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하며 불이 붙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죽어버렸지…….’
하이에나처럼 루카의 주변을 맴돌던 그녀가 한참을 보이지 않기에 혹여나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알아봤더니, 돌아온 것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부고였다.
죽음의 이유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 부고를 받아보았을 때, 뭔지 모를 마음 한구석이 서늘히 식었다.
마치, 내 인생에 있어서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을 유일한 것을 나도 모르는 사이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이었다.
당시의 뤼디거는 그런 스스로를 비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차기 빈터발트 후계자에게 짐이 될 수도 있는 여자다. 그리 없어진 것을 개운하게 여겨도 모자랄망정 상실감이라니.
하지만 유디트 마이바움은 그 뒤로도 그의 기억 속에 자리한 채 때때로 그를 비웃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잘난 척해서 죽지도 않는 사람인가 싶었더니, 당신도 결국 죽는 건 마찬가지였군요?’
뾰족한 목소리가 환영처럼 뤼디거의 귀를 어지럽혔다. 그 비웃음에 뤼디거는 저도 모르게 나직이 웃고 말았다.
유디트 마이바움은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할 여자였다. 그리고 뤼디거 그 또한 그러했다. 그의 손에 묻은 피를 생각하면, 천국을 입에 담는 것이 사치였다.
‘그녀와는 지옥에서 만날지도 모르겠군.’
그리 생각하니 죽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았다. 죽어서도 심심하진 않을 테니까.
이제 곧 죽기 때문일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에 위로를 받았다.
유디트 마이바움은 진절머리 나는 여자지만…….
그녀가 조금만 더 루카를 미워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녀와 잘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뤼디거는 죽음의 끝에 선 순간 인정했다. 나는 유디트 마이바움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노라고.
오히려…….
뤼디거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런 그를 맞이한 것은, 오로지 새하얗기만 한 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