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16화
“참 나, 내가 그 단어를 몰라서 안 쓴 줄 알아? 내 눈엔 예의를 차리는 거로 안 보이니까 안 쓴 거지. 그리고 아저씨. 아저씨는 또 갑자기 왜 이모한테 치근대는 거야? 원래 안 그랬잖아!”
루카의 화살이 뤼디거에게로 향했다.
뤼디거는 갑자기 치근댄다는 오해와 누명을 뒤집어써 당황스러웠는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깜빡였다.
“…….”
저거 저거, 뤼디거 정색하는 거 봐라.
하긴. 뤼디거로서는 모욕적이었으리라.
치근거린다는 단어는 뤼디거라는 사내와 백팔십도 먼 곳에 있을 만한 단어였다.
게다가 상대가 상대이지 않은가.
차마 루카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입만 꾹 다물고 있는 뤼디거 대신, 내가 총대를 메고 그의 명예를 옹호했다.
“뤼디거 씨가 치근대긴 뭘 치근대. 또, 또 루카 너 과장되게 말한다.”
“이모는 차라리 끼어들질 마. 하, 진짜. 저렇게 눈치가 죽에 쓰려야 없는데 뭔 연애를 해서 결혼을 하겠다고.”
루카가 씩씩거렸다. 속이 답답한 듯 눈을 부라리는 꼴이 가당치도 않았다.
나는 기가 차 헛웃음을 지으며 루카의 이마에 따콩, 작게 꿀밤을 먹였다.
“으이구. 열 살 꼬마가 뭘 안다고 건방지게. 이모랑 삼촌이 친한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나랑 뤼디거 씨가 맨날 루카는 내가 키웁니다, 당신은 루카의 삼촌 자격이 없어요 하며 치고받고 싸우면 어쩌려고?”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아까 읽으라는 동화책은 다 읽었어? 검사한다고 했지?”
“그건 아까 다.”
“그래, 좋아. 어디 한 번 확인해 보자.”
나는 루카가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루카의 등을 떠밀었다.
동화책을 가져오라는 손짓에 루카는 투덜대었지만, 결국 순순히 책을 들고 왔다.
나는 루카를 소파 옆에 앉히고, 얼마나 잘 읽는지 점검해 보았다.
루카는 호언장담한 대로, 심드렁한 목소리로 동화책의 내용을 술술 읽었다.
딱히 글자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데 이렇게 잘 읽는 게 말이 되나? 루카는 천재일까?
하긴, 소설 속 주인공이니 뛰어난 건 당연할지도…….
루카의 재능에 감탄한 나는 다른 동화책도 꺼내 루카에게 읽게 시켰다.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는 새 뤼디거와 왕녀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기억 저 너머로 멀리 쓸려갔다.
그리고 내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그런 이야기를 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 한 번 더 말해야 했는데. 정말 중요한 건데. 흑흑.
* * *
기차에는 일등석 승객들을 위한 식당 칸이 따로 있었다.
테이블보가 깔리고 와인을 서브하는 소믈리에가 따로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곳으로 갈 필요는 없었다. 기차 칸 하나를 통째로 객실로 쓸 정도의 VVIP가 아니던가.
식사 시간이 되면 승무원이 우리 객실까지 요리를 가져와 세팅해 준다.
‘이게 바로 건물주, 아니, 기차주의 위력인가…….’
하지만 마냥 감탄하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암살자가 바로 이렇게 식사를 가져오는 승무원으로 가장해서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암살자가 정확히 언제 등장하는지가 소설에 서술되지 않았다는 거다.
기차 여행의 신기함에 들떠 있는 와중 갑작스레 들이닥친 변고 정도로 서술되었을 뿐…….
그나마 저녁 식사였다는 서술이 있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나는 식사 시간마다 긴장을 놓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소화가 되지 않아 단단히 체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으으으…….”
더부룩한 속을 문지르며 앓아 누운 나를 보며, 루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아니, 벽돌처럼 딱딱한 빵도 잘 먹던 사람이 갑자기 웬 위장병이야?”
“나도 내가 쇠도 씹어 먹을 수 있을 줄 알았어…….”
“참 나. 비싸고 좋은 음식 다 소용없네.”
“으으으…….”
루카의 툴툴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소파의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늘어졌다.
뤼디거 앞에서 하기엔 체통 머리 없는 짓이라는 걸 알지만, 괴롭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소화제가 있어 챙겨 먹었지만, 효과가 딱히 좋지는 않았다.
그러면 어쩌나. 그냥 앓는 수밖에. 아쉬운 대로 민간요법이라도 써야지.
나는 내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누르며 참았다.
그런 내 곁에 루카가 쪼르르 와 물었다.
“많이 아파? 소화제 먹었는데도? 그다음 역에서 의원이라도 부르면 안 되나?”
“괜찮아. 이러고 있으면 또 괜찮아져.”
“그거 누른다고 돼요? 그런 말 처음 듣는데.”
루카의 눈이 미심쩍다는 듯 가늘어졌다.
그 눈에 담긴 걱정이 느껴지지 않을 리 없다.
그래도 이모라고 챙기려고 드는 게 기특하네.
웃고 싶었지만 웃을 기력도 없었다.
나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게 다 민간요법이야.”
이 세계 민간요법은 아니지만, 인체 구조는 엇비슷할 테니 여기서도 먹히겠지. 아니면 플라세보 효과라도.
그리 생각하며 손을 꾹꾹 누르고 있는데, 갑자기 뤼디거가 다가오더니 대뜸 내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여기 말입니까?”
뤼디거의 커다랗고 각진 손 사이에 내 손이 사라질 듯 감싸이더니, 이내 꾹꾹 누르는 고통이 나를 엄습했다.
내 손으로 조물조물 누를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세기에 절로 비명이 나왔다.
“아야, 아!”
“아……. 여기 아닙니까?”
뤼디거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그는 머쓱한지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혼자서 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도와드리려 했는데……. 제가 잘못 눌렀나 봅니다.”
“아뇨. 거기 맞아요. 세게 눌러서 아픈 게 아니라 원래 체하면 그 부분이 아픈 거예요.”
“그렇습니까? 유디트 씨는 아는 것도 많군요.”
뤼디거는 감탄스러워하며 덧붙였다.
얘 점점 나에 대한 이상한 기대와 신뢰 같은 게 쌓여가는 것 같은데…….
그래도 좋게 봐주는 거니 좋다 해야 할지, 괜히 부담스럽다 해야 할지…….
나는 쑥스럽게 웃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습관적으로 내 손을 다시 눌렀는데, 그새 손에 힘이 빠졌는지 누르는 힘이 약했다.
절로 뤼디거의 손으로 시선이 갔다.
아까 저 손으로 꾹꾹 눌러줬을 때 시원하긴 했지.
어차피 뤼디거도 도와줄 생각으로 왔고. 그러니까 부탁해도 부려먹는다거나 그런 게 아니야.
열심히 합리화를 한 나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런 건 아니고……. 저, 뤼디거 씨. 이왕 도와주시러 오셨으니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하다 보니 손에 힘이 빠져서.”
“……내가 해줄게. 아저씨는 저리 가요.”
하지만 뤼디거가 대답하기 전, 루카가 먼저 끼어들며 내 손을 낚아챘다.
그러곤 열심히 조물조물하는데, 내 손바닥만 한 손으로 아무리 주물러봐야 별 느낌이 없었다.
힘 빠진 내 손으로 주물러도 이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처음엔 루카가 기특해서 시켜 보기는 했는데, 일단 체기를 내려보내는 게 먼저 아니겠는가.
나는 열심히 내 손을 주무르는 루카의 곱슬곱슬한 황금빛 머리칼의 가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보며 픽 웃었다.
“루카 너는 힘이 없어서 좀.”
“내가 힘이 없긴 뭐가 없어?”
“으으으…….”
내가 앓는 소리를 내자 루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뤼디거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입술을 삐죽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자리를 찾게 된 뤼디거는 흘끗 나를 곁눈질하며, 아까보다 많이 약한 힘으로 내 손을 살살 눌렀다.
그래도 루카가 누르던 것에 비하면 훨씬 시원했다. 마디진 손끝이 야무지게도 꾹꾹 눌렀다.
아무래도 장갑이 불편했는지, 이내 그가 장갑을 벗었다. 그의 손의 열기가 내 손을 타고 넘어왔다.
묘한 안정감에 나는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순간, 뤼디거와 내 눈이 마주쳤다.
육군 대령에, 귀족 집안 도련님에게 손이나 주무르게 시키고, 정작 나는 편하게 골골대고 있으니 눈치가 보였다.
괜스레 머쓱해진 나는 슬쩍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덧붙였다.
“뤼디거 씨한테 이런 일 시키자니 염치가 없네요.”
“아닙니다. 기차에 의원을 진즉 배치하지 않은 제 잘못입니다.”
“소화제도 있고 그 정도면 됐죠, 뭐.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도 아니고.”
그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어색함을 달래고 있는데, 똑똑, 하고 누군가가 객실 문을 두드렸다.
내 손을 주무르던 뤼디거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내 손을 계속 주무르며 무심히 말했다.
“들어오게.”
상대가 당연히 자신보다 신분이 낮으리라 확신하는 말투였다.
아니나 다를까. 객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것은 승무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