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60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4화
외전3 3년 후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뭐 별달리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결혼한 뒤로 3년이 지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1년에 빈터발트와 릴라니벨, 블루옌을 오간 것이 시간을 순식간에 삭제시킨 원인 같았다.
뭐……. 다시 생각해 보니 바쁘긴 바빴다.
빈터발트에서 뤼디거가 가문의 일을 처리하는 동안 나 또한 가문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빈터발트 공작 부인으로서뿐만 아니라, 마이바움 가의 현 가주로서도 신경 쓸 일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블루옌에서는 선왕의 장단에 맞춰주는 것 말고도 사교계 일로 정신이 없었다.
뭔 놈의 참여할 행사가 그리도 많은지! 산더미처럼 쌓인 초대장을 솎아내는 것도 일이었다.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는 때가 바로 이 릴라니벨에서 머무는 시간이었다.
릴라니벨은 선왕이 말한 대로 짙은 포도의 보랏빛이 매혹적인 도시였다.
빈터발트의 새하얀 설원도, 수도의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코끝에 포도 향이 항시 감도는 릴라니벨은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처음 뤼디거가 찾아와 루카가 나를 엄마라 주장하며 입씨름을 하던 당시, 목가적인 환경과 성에서의 부유한 환경, 소박한 생활과 사치하는 생활이 대립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 극단적인 양쪽의 생활 모두 손에 쥐게 되어버렸다.
‘역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릴 때 욕심을 가득히 담아야 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그렇게 나는 자기계발서에나 나올 법한 생각을 곱씹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름은 비가 적게 내려서 그런지 포도가 유난히 달았다.
로라가 아마 기가 막히게 맛있는 와인을 담가주지 않을까. 나는 기대에 입맛을 다셨다.
하녀장이 된 로라는 릴라니벨에 온 이후 또 다른 취미를 붙였다. 바로 와인 제조였다.
빈터발트의 주방을 책임지는 어머니의 피가 어디로 간 건 아닌지, 로라는 혀끝이 예민하고 미각 센스가 좋았다.
뒤늦은 재능을 발견한 로라는 포도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베리류 과일을 숙성시켜 제법 많은 조합을 시험해 보았다.
특히 작년에 제비꽃 향이 유난히도 싱그럽게 코끝을 맴도는 와인을 만들어 좋은 평을 받았다.
로라는 그 와인에 내 이름을 붙여주었다. 남사스러웠던 나는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로라는 강경했다.
“아니, 제비꽃을 떠올린 건 마님 덕분이라니까요? 제 영감의 근원에 이래라저래라 하시는 건 아무리 마님이라 할지라도 월권이에요!”
그렇게 주장하더니, 대뜸 예술가를 섭외해 내 이름이 새겨진 라벨을 디자인했다. 그러고는 와인에 그 라벨을 붙여 그대로 선왕과 뤼디거에게 선물해 버렸다!
그런 로라의 행동력에 약간 질린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당연지사 선왕과 뤼디거 두 사람은 뛸 듯이 그 와인을 반겼고……. 너무 딱 맞는 이름이라며 연신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뤼디거는 그 와인을 만든 로라를 칭찬하며 어마어마한 상여금을 내렸고, 로라는 생각지 못한 목돈을 단단히 챙길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비꽃 향 와인은 유디트라는 이름을 달고 왕가에 납품되게 되었다.
당연지사 그로 인한 로열티도 로라의 차지였다.
나도 행동력으로는 딱히 게으름을 부린다거나 회피한다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떠올린다’는 것과 ‘행동한다’는 것 사이에 고민한다는 선택지가 없는 사람들이다 보니 이래저래 따라잡기 버거운 면이 있었다.
그래. 애초에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내가 이길 수 있을 리 없는 것이었다.
이래서 쓸데없이 행동력 좋은 사람이란……!
선왕은 그 와인을 특히나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작년에 만들어진 와인을 독점하기 위해 한차례 뤼디거와 기 싸움을 하기도 했다.
* * *
“내 최근 잠이 들기 전에 그 와인을 한잔하지 않으면 도통 잠을 잘 수가 없느니라. 이 늙은이가 불면증으로 뒈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양보하는 게 좋을 게다, 준장.”
“왜 제가 선왕 전하께서 뒈지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선왕과 미래의 공작이자 럼가트의 육군 준장의 대화라고는 믿을 수 없는 다소 유치하고 저급한 말이 오갔다.
“하! 뻔뻔하기 그지없는 네놈이라면 그리 말할 줄 알았지. 하지만 우리 착한 유디트는 어떨까? 네놈의 치졸한 행태 때문에 내가 죽는다면 과연 네놈에 대한 애정이 뚝 떨어질까, 안 떨어질까?”
“떨어진 애정은 제 얼굴로 다시 붙이면 됩니다.”
“흥! 지금은 네놈이 제 얼굴을 과신하고 있지만, 나중에 나이를 먹었을 때 어리고 파릇파릇한 미남들이 등장하면, 과연 그때도 우리 유디트가 네놈을 좋아해 줄까?”
“…….”
지금껏 뻔뻔스럽기 그지없던 뤼디거의 얼굴이 그 순간 날카로운 못을 박은 벽처럼 파스스 금이 갔다.
선왕은 뤼디거에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는지 으쓱대며 말했다.
“그에 비하면 난 그 애 할아버지지. 피가 이어져 있단 말이다. 혈육을 홀대한 원한은 평생 갈 게다.”
굳이 따지면 친할아버지도 아니거니와, 고작 3년 전에 만난 먼 친척일 뿐이지만…….
선왕이 나에게 해준 걸 생각하면 절대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이쯤 돼서 뤼디거가 반박했을 터였다. 하지만 선왕이 어리고 파릇파릇한 미남 운운한 것을 고스란히 믿었는지, 나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무리 내가 뤼디거 얼굴이 좋다고 했다지만 말이야, 결혼한 남편을 두고 젊은 남자에게 눈 돌릴 정도는 아니라고!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뒤범벅이 된 뤼디거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와인일 뿐인데, 별의별 말이 다 오간다. 이제 슬슬 이 둘 사이를 중재해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뤼디거 씨는 브랜디 파잖아요. 와인은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선왕 전하께서 원하시니 넘겨드려요.”
“하지만!”
“그리고 할아버지. 지속적인 음주는 건강에 좋지 않아요. 최근 들어 자주 쓰러지신다면서요.”
“이제 내 나이가 곧 구순이다. 죽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때까지 하고 싶은 것이나 실컷 하다 가는 게 행복 아니겠느냐. 숨넘어가는 시점에 ‘그럴 줄 알았으면 아낌없이 와인을 즐기는 것인데…….’ 하며 후회하고 싶지는 않느니라.”
“더 오래 사셔야죠. 그런 말씀 마세요.”
그리 말하기는 했지만, 죽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왕의 말에 이견은 없었다. 실제로 이 시대의 수명을 생각했을 때 선왕은 정말로 장수한 축이었으니까.
‘뭐, 참는 것 없이 있는 꼬장 없는 꼬장 다 부리고 사니 명줄이 길 수밖에 없다고는 하는데……. 욕을 많이 먹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고 그러고. 신빙성이 있지, 신빙성이 있어.’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빈터발트 남자들의 수명이 긴 것도 비슷한 이치였다.
‘물론 이쪽은 사실 자살, 타살, 혹은 사고사 등이 문제지만…….’
나는 1회 차에서 불혹이 되기 전에 죽었던 뤼디거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뤼디거의 부친인 막시밀리안 또한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자살했고.
그에 비하면 지금은 둘 다 건강하기 그지없다. 특히 뤼디거의 경우 너무 건강해서 문제일 정도였다.
좀처럼 닳지 않는 뤼디거의 체력을 떠올리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꼭 하루에 와인 한 잔이에요. 그 이상 드시면 안 돼요. 그 이상 드셨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내년에는 한 병도 납품하지 않을 거예요.”
“알았다, 알았어!”
나에게서 떨어진 승낙에 선왕은 화색을 띠며 희희낙락 반겼다.
* * *
그렇게 작년 와인은 대부분 선왕에게로 넘어갔다.
내 이름이 붙은 와인을 전부 빼앗긴 상황이다. 뤼디거가 선왕이 좋니 자기가 좋니 하는 유치한 언쟁으로 한참 투덜대더라도 감내할 각오를 했다.
하지만 선왕과의 대화가 그의 약점을 찔러도 단단히 찌른 모양이었다.
그는 투덜대는 대신, 젊은 애들에게 뒤처지지 않겠다며 운동을 하러 뛰쳐나갔다.
나는 다급히 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여기서 더 체력이 붙으면 고생하는 건 바로 나였다!
“뤼디거 씨, 굳이 운동 안 하셔도 돼요. 지금도 충분히 하고 계시잖아요. 군살도 없고. 딱 보기 좋아요.”
“아닙니다. 제가 안일했습니다. 지금까지 그저 습관적으로 해온 운동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안 부족하다니까요? 제 눈에는 뤼디거 씨, 지금이 딱 좋아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이 제일 예쁘다구요.”
“……정말입니까?”
꿀 같은 내 말에 솔깃한 듯 바짝 올라간 뤼디거의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당연하죠. 뭘 그렇게 불안해하세요. 우리 뤼디거 씨보다 더 잘생긴 남자는 럼가트, 아니,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아요.”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나중엔 또 어찌 될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뤼디거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낯으로 개소리를 했다.
아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애들도 경계 대상인 거야?! 걔들이랑 내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나는 정색하려는 낯을 애써 다스렸다. 그러고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짐짓 부드러운 말투로 뤼디거를 살살 꾀었다.
“나중에도 없어요. 이리 와봐요. 말도 안 되는 입씨름을 하느니, 그 시간에 우리 예쁜 뤼디거 씨 얼굴이나 한 번 더 보게.”
“아직 해가 떠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뤼디거는 은근한 내 신호를 바로 눈치챘다. 하지만 반기는 대신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주저할 뿐이었다.
평소 낮에는 절대 안 된다며 철저하게 그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딱히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낮에도 괜찮다 허락했다가는 내가 죽어 나가기 딱 좋지. 딱 좋아.’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내가 말이야, 어, 평소에 얼마나 예뻐해 줬는데! 선왕의 그런 말에 바로 기가 죽어가지고 말이야!
그리 어화둥둥 해줬는데, 말도 안 되는 선왕의 세 치 혀 농간에 휘둘리는 뤼디거를 보고 있자 하니 오히려 내 자존심이 상했다.
다음부터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 못 하게 오늘 단단히 박아둘 셈이었다.
좋아. 나도 오늘 밝은 데서 뤼디거 몸매 감상하고 좋지, 뭐.
나는 그렇게 뤼디거를 품으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