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61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5화
* * *
조용하고, 따듯하고, 평화롭고. 릴라니벨은 살기 좋은 곳일뿐 아니라 휴양지로 딱이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주변인들이 놀러 오곤 했다.
이사벨라와 다비, 럼가트 왕족들, 해터 가 사람들…….
다만 선왕은 제외였다.
나에게 릴라니벨을 내려준 것은 선왕인데, 정작 본인이 방문하지 못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나에게 이곳을 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여기에 아주 눌러앉을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블루옌에서 일 년의 삼 분의 일을 보내는 것도 선왕을 위해서가 아니던가.
만약 선왕이 자유롭게 릴라니벨에 출입할 수 있다면 분명 사 개월을 꽉 채워 머무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나는 선왕과 팔 개월 남짓 붙어 있어야 할 판이었고.
선왕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가 더 애틋한 법이다.
상대가 내가 눈치 봐야 하는 가족이라면 더더욱.
게다가 신혼 생활에 방해가 되는 면도 있고.
‘그냥 와서 머물기만 하면 괜찮은데, 꼭 사사건건 뤼디거와 시비가 붙는단 말이지. 무슨 처가살이시키는 것도 아니고.’
선왕에 비하면 루카의 장난 정도는 애교였다.
하여튼 선왕의 릴라니벨 행은 필히 막아야만 하는 중대 사항이었다.
물론 선왕인 그에게 강제로 출입금지령을 내릴 순 없었다.
어디까지나 선왕의 입으로, 본인이 릴라니벨에 오지 않겠다는 선언을 들어야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 결과, 블루옌에 머무는 동안 빈터발트의 타운하우스가 아닌 왕궁에서 지내는 것으로 선왕과 타협했다.
한참을 재보던 선왕은 결국 그렇게 하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냥 포기한 건 아닌지, 계속해서 제가 한 약속을 뒤집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바로 이번 여름 파티였던 모양이다.
나는 며칠 전 죠세핀에게서 날아온 편지의 내용을 곱씹으며 선왕의 끈질김에 몸서리쳤다.
이번 여름 릴라니벨에서의 휴가를 무척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우리가 이번에 릴라니벨에 다녀오면, 그걸 빌미로 선왕 전하께서도 슬쩍 방문할 생각이신 것 같거든.
본디 영토를 정복할 땐 발부터 내디디고 보는 것 아니겠니? 억지로라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내고 그대로 들어앉는 거지.
일단 발걸음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차츰차츰 기간을 늘려갈 속셈이신 게 분명해.
하여튼, 결혼한 지 삼 년째인데도 그리도 불안하고 못마땅하신 걸까.
아무래도 우리는 올해는 그냥 넘기는 쪽이 좋을 것 같아. 아쉽지만 나중을 기약할게.
추신: 선왕 전하께서 드시는 와인이 몇 병 남지 않은 것 같더라. 그걸 빌미로 찾아갈 수도 있으니 미리 보내드리도록 하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집 세고, 끈질기고, 포기를 모르고……. 어디서 많이 본 특성들이었다.
“왕녀들이 못 오면…… 그럼 샤를로트도 못 오겠네. 클로이가 많이 아쉬워하겠는걸.”
릴라니벨이 만인의 별장이 되어가다 보니 뜻밖의 친분이 생기기도 했다.
바로 클로이와 샤를로트가 친해진 것이었다.
둘 다 똑똑하고 주변 어른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타입이었다. 공통점이 많기 때문인지,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더니 어느새 훅 친해져 있었다.
서로 수도에 살지만 아무래도 왕녀와 평민이다 보니 만나기가 힘들었다. 샤를로트가 평민의 거리로 나올 수도, 그렇다고 해서 클로이가 왕궁에 마음대로 찾아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상대를 만나게 해달라 주변 어른들을 조르기엔 둘 다 내성적이고 말이야.
그랬던 만큼 이번 여름에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렸을 텐데…….
아쉬워하는 두 사람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다음에 블루옌에 가게 되면 한 번 클로이를 데리고 왕궁으로 가야겠어. 샤를로트를 데리고 외출을 하든지 말이야.’
물론 왕녀들의 불참이 아쉬운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죠세핀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 거짓말처럼 친해지기도 했고.
‘뭐, 릴라니벨에 오기 바로 직전 블루옌에 네 달간 머물면서 수시로 얼굴을 마주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만나는 거랑 왕궁에서 만나는 거랑은 느낌이 다르단 말이지.’
왕궁에서는 내가 손님인 것도 있지만, 보는 눈이 참 많은 것도 불편한 요소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릴라니벨에서처럼 자유롭게 행동하기가 힘들었다. 대화도 그렇고.
‘그래도 이번 여름에는 이사벨라와 다비가 찾아오기로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사벨라가 릴라니벨에 방문하는 건 처음이지.’
내가 결혼하고 정신이 없었던 것처럼, 이사벨라도 버켄레이스를 잇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빈터발트에서 방계 모임이 있을 때는 종종 만났지만 그 외에 따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버켄레이스 부인이 된 이사벨라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의 신분 상승을 도와준 것이 나이니만큼 좋은 관계가 아닐 이유도 없었고.
하지만 그 이상으로 우리는 제법 친했다.
공공의 적을 물리친 사이라는 동질감도 그렇고, 그녀나 나나 귀족사회에 편입된 지 얼마 안 된 입장으로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지 않던가. 없던 동료 의식도 절로 솟을 판이었다.
그리고 같은 또래의 아이를 키운다는 것도 한몫했고.
‘물론 루카와 다비가 같은 또래라는 건 조금 어폐가 있긴 하지만…….’
신체적 나이는 동갑이지만, 속에 능구렁이 수십 마리를 키우는 루카와 달리 다비는 딱 그 나이 대 어린애답게 순진했다.
이번 생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마주한 건 이사벨라가 버켄레이스에 편입되고 나서 처음 열린 빈터발트 방계 모임에서였다.
사실 성도 완전히 마이바움으로 바꾼 만큼, 루카가 빈터발트 방계 모임에 참석할 이유는 없었다. 루카 본인도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아 했고.
하지만 빈터발트에서는 루카를 여전히 빈터발트로 대우했다. 성만 바뀌었다 뿐이지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뻔뻔스레 너도 방계 모임에 참석하라는 공작의 말에 루카도, 나도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럴 거면 그때 입적 취소가 불가능하니 뭐니 한 건 도대체 왜였던 거야?
‘어쩐지 소피아의 기분이 걸린 문제인데 너무 순순히 입적을 풀어준다 했어……. 사실은 루카가 빈터발트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거였네.’
계속해서 빈터발트 가문의 일에 자신을 끌고 들어오는 것에 참다못한 루카가 공작에게 따지고 들려 했다.
하지만 소피아가 너무 기뻐하는 모습에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성게처럼 삐죽이 솟았던 반발심이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누그러들었다.
1회 차에서 소피아가 유난히 루카를 챙기고 들었기 때문일까 루카는 묘하게 소피아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하여튼 1회 차에서 루카와 다비는 썩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루카가 다비를 어떻게 대할지 걱정이기도 했다.
물론 이사벨라에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루카가 다비를 미워하거나 증오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친하게 지내는 건 또 별개의 일이니까.
루카가 다비와 어울리기 싫어하는데 친하게 지내라고 하는 것도 정도 이상의 개입인 만큼, 나는 노심초사하며 둘의 관계를 주시했다.
‘괴롭히지만 마라, 괴롭히지만 마라…….’
루카가 한 번 작정하면 얼마나 집요하고 독해지는지 알고 있는 만큼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걱정은 기우였다.
천만다행으로 루카의 눈에 다비가 마냥 어린애로만 보인 모양이다.
루카는 어린 조카 보살피듯 다비를 끌고 다녔고, 다비 또한 박학다식하고 자기주장 뚜렷한 루카를 삼촌처럼 잘 따랐다.
‘그래도 겉모습은 동갑내기인데, 형, 동생이 아니라 삼촌, 조카 같은 건 문제 있는 거 아냐?’
하여튼 둘이 잘 지내니 한시름 덜게 되었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으려 했지만 이사벨라도 눈에 띄게 안도 하는 눈치였고.
빈터발트 친척들 사이에 또래의 아이들이 루카와 다비뿐이요, 다른 귀족 아이들과 어울리기엔 다비가 다소 내성적이다 보니 내심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루카랑 같이 지내면서 내성적인 면을 좀 벗어내면 좋을 텐데……. 아, 그렇다고 뻔뻔하고 고집스러운 점을 배우는 건 곤란한데.’
루카는 어른스럽고 의젓했지만, 좋은 영향을 끼칠 만한 모델은 아니었다. 욕설에 도박에 농땡이에…….
‘자, 잠깐.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거 친해진다고 좋은 게 아닌 거 같은데……!’
악영향도 그런 악영향이 없다. 잘못했다가 다비가 제2의 루카처럼 되어버리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부지불식간에 치솟았다.
하지만 딱히 루카가 아니더라도, 다비 주변에 있는 남자 어른들을 두고 봤을 때 썩 긍정적 영향을 줄 만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이미 죽은 친부인 프란츠는 제쳐두고서라도, 조부인 버켄레이스 백작은 우유부단하고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뤼디거나 빈터발트 공작은 굳이 말하는 것이 입 아플 정도였다.
그래. 비록 루카가 모범생과는 거리 먼 불량한 어린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백 배 낫지. 암, 그렇고말고.
나는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 이모!”
“어? 어어!”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루카가 눈썹을 못마땅하게 휘어 올린 채 허리에 손을 얹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금발은 조금이라도 빛을 받으면 눈부시게 반짝였고, 상대를 또렷하게 쏘아보는 푸른 눈동자는 바닷가에서 건져 올린 남주석처럼 맑았다.
길쭉해진 팔다리는 흰 사슴처럼 매끄러웠다.
부족했던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한 덕인지, 루카는 삼 년 새 키가 많이 자라 있었다. 예전엔 내 가슴팍에나 거의 올까 싶었는데, 이제는 정수리가 내 코끝 위로 불쑥 솟았다.
루카는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뭘 하고 있었길래 계속 부르는데도 답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