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62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6화
“잠깐 딴생각을 좀 하느라…….”
루카가 아무리 훤칠하고 잘생긴 미소년이라지만, 나에게는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호랑이나 다름없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나는 철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다독였다. 하지만 표정마저 관리하지는 못했는지 내 얼굴을 본 루카의 미간이 씰룩였다.
“딴생각? 그렇다기에 표정이 불순한데?”
“부, 불순한 표정이 뭔데?”
“혹시 내 욕 하고 있었어?”
헉, 어떻게 알았지?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처음엔 루카 욕이었을지언정 끝에는 칭찬이었다고!
과연 그것이 진실 된 칭찬이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 혼자만 납득하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끝낸 나는 뻔뻔스레 얼굴을 가다듬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레 목청을 높였다.
“내가 네 욕을 왜 해? 그것도 혼자 있으면서. 아니면, 너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
“흐음…….”
물론 그런 내 허세 섞인 블러핑에 순순히 속아 넘어갈 루카가 아니었다. 루카는 내 속내를 떠보듯 가늘게 눈을 접었다.
‘쟤 저렇게 볼 때가 제일 무섭다니까.’
나는 오소소 돋는 소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최대한 태연히 되물었다.
“그, 그래서 나는 왜 찾은 거야?”
“로라가 이모 찾아. 손님맞이 준비하면서 커튼이랑 소파 커버 같은 내부 장식을 싹 새로 할 모양인 것 같던데.”
“아, 맞다. 세부 디자인에 대해 상의하기로 했지.”
잠시 잊고 있던 로라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빨리 가봐야겠다. 급한 일이었는데……. 전해줘서 고마워, 루카!”
사실 그리 급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카의 새초롬한 시선에서 도망치기 위한 최적의 변명거리가 아니던가. 나는 일부러 과장된 반응을 보이며 부랴부랴 밑으로 내려갔다.
그런 내 뒤로 루카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흥.”
마치 다 알면서도 그냥 속아넘어가 준다는 듯한 그 웃음에 애써 부산스러운 척 발걸음을 옮기던 내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래. 다비가 배우면 안 되는 게 이런 면이라고!
어른들 머리 위에서 뛰어노는 루카의 모습에 나는 작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너무 알기 쉽나?’
루카가 손바닥 들여다보듯 내 속내를 읽는 것도 전부 내가 표정 관리를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뺨을 만지작거렸다. 거울이 앞에 있는 게 아니니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 *
집 안의 인테리어를 싹 바꾸고 이사벨라를 맞이할 준비를 모두 끝냈다.
로라와 나는 우리가 해둔 것을 보며 만면에 미소를 짓고 저택을 둘러보았다.
물론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한 건 아니고 하나하나 다 지시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상의의 과정 또한 인고의 시간이었던 만큼 완성된 저택을 보며 느끼는 뿌듯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패션 센스랑 다르게 인테리어 감각은 나쁘지 않단 말이지. 거 참 신기하다니까.”
“응? 뭐라고, 루카?”
“아무것도 아냐. 예쁘게 잘됐다고.”
옆에서 분명 뭔가 찝찝한 말을 한 것 같은데.
나는 사실을 이실직고하라는 듯 루카를 흘겨보았지만 루카는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며칠 뒤, 이사벨라가 오기로 한 날이 되었다. 한적한 릴라니벨의 너른 평야 저 끝에서부터 마차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차가 저택 앞에 서고, 이사벨라와 다비가 마차에서 내려섰다.
“오랜만이에요, 부인.”
“릴라니벨에 온 걸 환영해, 이사벨라.”
이사벨라의 금발은 태양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귀족이 된 그녀는 원래의 자리를 찾아간 듯 무척이나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부인,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엄청 컸구나, 다비!”
나는 일 년 새 키가 껑충 큰 다비를 보며 깜짝 놀랐다. 루카도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다비는 더했다.
갈색 고수머리와 껑충 큰 키가 마치 스탠다드 푸들 같아 보였다.
다비는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직 멀었어요.”
“정말 요즘 애들은 한 해가 다르게 쑥쑥 큰다니까. 그래. 푹 쉬다 가렴.”
또렷한 이목구비의 미인인 이사벨라와 달리 흐릿한 인상의 다비의 눈매가 서글서글하게 휘어졌다.
어렸을 때 금발이었던 머리카락이 나이를 먹으며 갈색으로 빛이 바라니, 점점 더 이사벨라보다는 프란츠를 닮아갔다.
특히나 선량한 외모가 프란츠의 판박이였다.
물론 프란츠의 선량함이 외모에 국한되었던 것과 달리, 다비는 정말로 착한 아이였다.
남의 말을 너무나 순진하게 믿어서, 처음에는 골려먹던 루카도 쟤 어디 가서 등쳐 먹히고 다니게 되는 건 아니냐 진지하게 걱정하게 될 정도였다.
‘그래 놓고선 이래라저래라 잘도 휘두르지만…….’
다비도 그런 루카가 싫진 않은지, 오늘도 릴라니벨에 오자마자 루카부터 찾았다.
“저…… 루카는 어디 있어요?”
“방에서 신문 읽고 있을 거야. 집중하고 있어서 같이 마중 나가자 말을 못 붙였어. 다비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으면 데리고 나오는 건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집중하고 있어서 말을 못 붙였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진즉 같이 마중 나가자고 했지만, 귀찮다며 단칼에 거절당했다.
‘하여튼 그놈의 성격하고는…….’
평범한 아이라면 자기가 놀러 오는데도 관심이 없다며 실망하거나 화를 냈을 텐데, 다비는 오히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다독였다.
“괜찮아요. 앞으로 며칠간 계속 얼굴을 마주칠 텐데요. 조금 늦게 만나는 것 정도야…….”
“이해심이 깊기도 하지.”
나는 감격 어린 낯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점은 정말 루카가 보고 배웠으면 좋겠을 정도였다.
물론 절대 그러지 않을 테지만.
다비는 나와 이사벨라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러면 저, 루카를 먼저 보러 가도 될까요?”
“그러렴. 방은 하녀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거야.”
그렇게 다비가 총총 저택으로 향했다.
루카랑 어울리려면 저 정도로 착해야만 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샤를로트처럼 루카에게 한 점 지지 않든가.
어느 쪽이든 흔한 상대는 아니다. 나는 예상되는 루카의 좁은 인간관계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뤼디거의 안 좋은 점만 쏙쏙 배운다니까.’
내가 뤼디거를 떠올리기가 무섭게,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이사벨라가 대뜸 물었다.
“그러고 보니 준장님은요?”
“아아, 잠시 군에 볼일이 있어서 수도에 있어. 며칠 뒤에 돌아올 거야.”
평소에 뤼디거가 항상 껌딱지처럼 내 곁에 붙어 다녔기 때문일까. 이사벨라는 뤼디거의 부재를 바로 눈치챘다.
실제로 뤼디거가 수도에 가지 않았더라면, 오늘 마중에도 따라 나왔을 게 분명했다. 이사벨라를 반기지 않는다는 티를 풀풀 풍기면서 말이야.
안 그래도 수도에서 갑작스레 호출이 들어왔을 때도, 나보고 같이 가자는 듯 처량히 눈물을 글썽이지 않았던가. 말만 안 했다 뿐이지 노골적인 의사표현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요, 안 돼. 며칠 뒤 이사벨라가 오기로 되어 있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 와서 쉬고 있으라고 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아니, 그래도 집주인이 반겨줘야죠! 무슨 별장을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엄연히 저희가 머무는 저택인데……. 게다가 그쪽에서도 마냥 쉬려고 찾아온 게 아니라 절 만나려고 찾아온 거라구요.’
라고 말했지만 뤼디거는 여전히 이해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은 뤼디거 혼자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니 다시 골치가 아파왔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눈치 빠른 이사벨라가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 그녀는 나를 위로하듯 덧붙였다.
“용케도 혼자 가셨네요.”
“하하. 아무리 뤼디거 씨가 고집이 세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그나저나…… 이제 존대할 필요 없다니까. 친척이잖아. 편하게 대해.”
나는 계속해서 존대하는 이사벨라를 만류했다.
예전에야 내 시녀였다지만, 지금은 어엿한 백작가 후계자의 어머니가 아니던가.
나이 대도 엇비슷하고, 신분도 그러한데 나는 반말을 쓰고 저쪽에서 깍듯이 존대하는 것이 엄청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아뇨, 제가 부인께 입은 은혜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러겠어요. 저는 이쪽이 더 편해요.”
“나야말로 그쪽에 목숨 빚을 진 상태인데…….”
이사벨라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하여튼 다들 고집만 세서 말이야. 나는 혀를 작게 찼다.
저택으로 들어온 우리는 잠시 티타임을 하며 지금까지의 근황을 나누었다.
릴라니벨은 한적해서 쉬기에는 정말 좋지만, 역시 수도에 비하면 말동무가 부족했다.
물론 로라도 있지만, 로라는 하녀장으로서의 자아실현을 하느라 공사다망했다. 그런 만큼 단지 심심함을 지우기 위해 오래 붙잡아두고 수다 떨기가 좀 신경 쓰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등장한 이사벨라가 참으로 기꺼웠다.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이사벨라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창밖으로 펼쳐진 시야 가득한 포도 밭을 보았다. 그녀의 무뚝뚝한 낯에 드물게 황홀감이 비쳤다.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좋네요, 이곳은…….”
“맘껏 쉬다 가. 로라도 네가 오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거든.”
“로라가요? 이상하네요. 아까는 언제 가냐며 툴툴댔는데.”
“말은 그래도 오늘 저녁에 칠면조 요리를 준비하던걸.”
나와 이사벨라는 얼굴을 마주하고 웃었다. 칠면조 요리는 이사벨라가 좋아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