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64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8화
결국 항복한 나는 우리 집에서 동화책을 싹 치워버렸다.
그 결과, 지금 다비와 클로이의 손에 들린 건 ‘쉽게 보는 고전 경제학’과 ‘과학 혁명의 구조’였다.
둘 다 열세 살 어린애가 볼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 루카가 신경 써서 골라줬다는 게 티가 나는 책 선정이라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클로이와 다비가 스스로 나서서 저 책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흘끔흘끔 루카의 눈치를 보지는 않았을 테니까.
혹시나 이런 식으로 애들을 눈치 줄까 봐 뇌물까지 먹여가며 부탁했는데…….
자허토르테 한 판을 홀랑 먹어 치우고는 이런 식으로 날 배신하다니!
애초부터 어린애들하고 장단 맞춰 놀아줄 생각이 없었던 게 분명했다. 나는 애들이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이를 악물고 억지로 빙긋 웃으며 말했다.
“루카, 내가 애들을 잘 부탁한다고 흤즈느…….”
“그래서 잘 봐주고 있잖아.”
도대체 이 상황의 어디가 잘 봐주고 있는 건데?
나는 눈을 세모꼴로 뜬 채 루카를 빤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뻔뻔스러운 루카는 오히려 천연덕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독서 중이라고.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잖아.”
“마음의 양식은 무슨! 일단 책 선정부터 잘못됐어, 루카. 애들한테 경제학이랑 과학책을 건네는 게 어디 있어?”
“다들 재밌게 읽고 있었어.”
“아하. 그래서 다비가 지금 책을 거꾸로 들고 있구나?”
내가 말하기가 무섭게 다비는 화들짝 놀라 책을 다시 바로 잡았다.
루카는 다비를 흘끔 곁눈질하고는 쯧 혀를 찼다. 심약한 다비는 그에 티 나게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유난히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걸 눈치챘는지, 루카는 생각보다 순순히 백기를 들었다.
루카는 읽고 있던 두꺼운 책을 탁 덮고, 한숨과 함께 물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고? 나 더러 얘네 데리고 소꿉놀이라도 하라고? 아니면 숨바꼭질?”
안 되겠다. 애들 노는데 어른은 개입하지 않는 주의지만 키를 잡아야 하는 루카가 이렇게 의욕 없는 방임주의여서야.
단단히 마음을 다잡은 나는 결연히 말했다.
“글러브랑 공 챙겨, 루카. 간만에 캐치볼이나 하자.”
“에엑.”
“에엑은 무슨! 얼른 움직이지 못해?”
내 재촉에 루카가 느릿느릿 발을 옮겼다.
하여튼 누구 닮아서 저렇게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지.
그런데 또 막상 검술이나 승마는 곧잘 했다. 그런 걸 보면 제가 생각하기에 쓸모없는 일에만 무기력해지는 게 틀림없었다.
‘성적 반영 안 되는 과목은 그대로 드랍해 버리는 것도 아니고.’
캐치볼이 뭔지 모르는 클로이와 다비는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나는 그렇게 어린애들의 등을 떠밀어 억지로 밖으로 내보냈다.
쪼르르 한데 뭉쳐 나가는 작은 등을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이렇게 공을 던지고 받는 거야. 알겠어?”
“어…… 네.”
내가 루카를 대상으로 시범을 보이자,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다비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공을 주고받는 것에서 무슨 재미를 느끼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한 번도 공을 갖고 놀아본 적이 없나?
클로이야 몸이 좋지 않았으니 바깥 생활이 무리였다 하더라도 다비는 좀 의외였다.
“생각보다 재밌어. 음……. 뭔가 던져 본 경험은 있지?”
“네. 돌은 자주 던졌어요.”
“…….”
공도 던지는 재미를 모르는 애가 돌은 도대체 왜 던졌을까…….
생각 이상으로 각박한 빈민가 생활을 더 깊게 파고들어 갈 자신이 없었던 나는 말을 돌렸다.
“자자, 루카랑 한번 해보자.”
한쪽 손에 글러브를 낀 루카와 다비가 마주 보았다. 루카는 작게 숨을 뱉고는, 어울려준다는 듯 공을 든 손을 치켜들었다.
그래도 나와 뤼디거와 합을 맞춰 캐치볼을 계속 해온 가닥이 있는지, 공을 던지는 루카의 자세는 무척 안정적이었다.
매끄럽게 공이 허공을 가르고 다비의 글러브 안에 안착했다. 딱히 뭔가 하지도 않았는데 공이 손에 쥐어지니 다비는 얼떨떨해하며 눈알을 굴렸다.
“루카가 한 것처럼 루카한테 던져!”
나는 공을 던지는 흉내를 내며 외쳤다. 내가 재촉하자 다비는 당황하며 들고 있던 공을 던졌다.
루카의 시늉을 하며 공을 던진 다비의 자세는 어딘가가 이상했다. 엉덩이도 뒤로 빠져 있고, 공을 내던지는 길쭉한 팔은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자세와 달리 공에 붙은 속도는 나쁘지 않았다.
공은 루카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떨어졌다. 루카가 손을 뻗어 공을 냉큼 낚아챘다.
나는 호들갑을 떨며 다비를 칭찬했다.
“처음인데 대단하네!”
“하지만 너무 멀리 날아간 것 같은데…….”
“아냐, 루카가 손만 뻗으면 닿는 위치잖아. 처음에 그만큼 하는 게 쉽지 않아. 정말 잘한 거야. 재능 있어.”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글러브 끝을 만지작거리는 다비의 귀 끝이 조금 발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연신 다비를 칭찬하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루카가 불퉁히 말했다.
“내가 처음 던졌을 때가 더 잘했던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네 공 완전히 비실거렸다고. 힘없어서 공을 땅바닥으로 메다꽂은 게 누구였더라?”
“아냐. 완전 잘 던졌는데? 3년 전 일이라 기억 못 하는 거 아냐?”
모르쇠 하는 루카의 낯이 뻔뻔스러웠다.
얘가 어디서 약을 팔아. 거짓말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도박에 소매치기에 사기에……. 루카는 온갖 범법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보호자 된 도리로 심히 우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그땐 훨씬 어렸잖아. 지금 다비랑 비교하면 안 되지.”
“비교는 네가 하는 게 비교고. 그리고 지금 다비도 어리거든?”
평소에는 어른 취급 받기를 원하면서, 가끔은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곤 했다. 무슨 취사선택도 아니고 말이야.
계속 이어지는 말꼬리에 나는 짝짝 가볍게 박수를 쳐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 처음부터 잘 던졌던 루카 씨. 다시 한 번 시범을 보여주시죠!”
“비꼬기는.”
루카는 입술을 작게 삐죽 내밀고는 공을 든 손을 치켜들었다. 다시 한 번 공이 오갔다. 다비는 아까보다 좀 더 자신감 있는 태도로 공을 던졌다.
처음에는 둘 다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다비는 혹시 실수라도 할까 집중하느라, 루카는 억지로 끌려온 티를 팍팍 내느라.
하지만 공이 오갈수록 두 사람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점점 펴졌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누가 봐도 신이 난 모습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클로이 또한 몸이 달았는지, 조심스레 나에게 물었다.
“이거……. 저는 못하는 거예요?”
“아니? 못하는 게 어디 있어. 클로이도 꽤 건강해졌으니까……. 좋아, 한번 해볼래? 던지기만 해도 좋으니까.”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내비치는 클로이의 모습에 나는 재빨리 답했다.
뒤늦게 클로이가 무리해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잠깐 스쳤다. 큰 고비는 넘겼지만 아직 요양 중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 안색은 괜찮으니까……. 주시하고 있다가 힘들어 보이면 바로 그만두게 해야지.’
이 기회에 운동에 재미를 붙여서 더 건강해질 수도 있는 거고.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클로이에게 글러브를 건넸다.
“클로이는 나랑 하자. 자, 공을 쥐고…….”
나는 다비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다시 한 번 설명했다. 클로이는 결연한 낯으로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클로이가 공을 쥐었다.
나는 클로이가 바닥을 향해 공을 내팽개친다 하더라도 잔뜩 칭찬해 줄 생각을 하며 클로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였다.
근데 이게 웬일?
클로이는 생각보다 잘 던졌다. 아니, 생각보다 정도가 아니다. 정말로 잘 던졌다.
자세도 괜찮았다. 아직 근력이 없어서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균형 감각이 좋았다. 무게 중심을 이동하는 것이 내가 알려준 그대로였다.
설마……. 클로이는 천재가 아닐까?
클로이에게서는 미래의 소프트볼 에이스의 자질이 보였다. 흥분한 나는 클로이의 건강을 우려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다급히 외쳤다.
“클로이, 한 번만 더 던져볼래?”
“네!”
“좋아! 그러면 혹시……. 내 글러브 안을 노려서 던질 수 있겠니? 꼭 글러브에 넣을 필요는 없고, 그냥 이 근처로!”
“자, 잠시만요?”
클로이의 공은 그대로 내 글러브 안에 안착했다.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나는 울먹이며 차오르는 감격을 토로했다.
“클로이, 너는 천재가 틀림없어! 재능 있어. 진짜. 백 년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재능이야!”
백 년에 한 명은 과장인가 싶었지만, 알 게 무언가. 지금까지 소프트볼 시합 자체가 없었는데.
감독으로서 인생을 배팅할 만한 선수를 만났다는 기쁨에 감동이 벅차올랐다. 그에 나도 모르게 너무 호들갑을 떨어버렸다.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칭찬세례에 다비가 시무룩해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기우였다.
“와, 지금 글러브 안으로 공을 던진 거야? 대단하다! 나는 몇 번을 해도 안 되던데.”
“너도 좀 하면 할 수 있을걸. 나도 처음엔 완전 못했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괜찮잖아.”
잠깐, 아까 전엔 처음부터 잘했다고 우긴 게 어디의 누구였더라?
내 시선을 느낀 루카가 아차 하며 시선을 피했다.
평소였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루카를 한 방 먹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나는 열망에 불타는 눈으로 클로이를 바라보았다. 촛대에 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로만 간간이 유지하고 있던 소프트볼에 대한 열정이 화르륵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