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6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10화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카의 말대로였다. 지금은 좀 쉬어야 할 때였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역시 나보다는 뤼디거일 터였다.
아무런 기억도 없는데 대뜸 자신과 결혼했다며 아내라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하물며 과거의 뤼디거는 비혼주의였다. 뭐, 제 입으로 비혼주의가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여하튼.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그런 그에게 감정적인 나의 태도로 인한 혼란을 가중하는 것은 확실히 옳지 않은 선택이었다.
일단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정리하는 쪽이 좋겠다. 루카의 제안을 수긍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나도 지금 혼란스러우니까……. 부탁할게, 루카.”
“맡겨둬.”
결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카의 눈빛이 걱정스레 나를 향했다.
루카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었던 나는 애써 괜찮은 척 웃어 보였지만, 입꼬리 끝만 파들거리고 말 뿐이었다.
그때, 뤼디거의 시선이 느껴졌다. 빤히,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생긴 아내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자는 심정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나 또한 그대로 그를 마주 봐주면 되는 일이다. 내가 눈치 볼 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항상 따듯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 지금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혹여나 그가 나를 경멸하거나 적대하기라도 한다면…….
‘자기를 어떻게 홀린 거냐 화를 내기라도 하면 어쩌지?’
내 머릿속에 소설과 드라마, 만화를 가리지 않고 온갖 기억 상실로 인한 후회남들의 만행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래서 너무 많이 아는 것도 좋지 않다니까. 괜히 불안해지기만 하고…….’
물론 뤼디거가 창작 매체 속 후회남들처럼 행동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다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없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억상실로 인한 돌변은 클리셰라고! 진부하고 상투적인, 제일 대중적인 결과값이란 말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아무리 나와의 관계를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의 유난스러운 짓들로 인한 증거와 증인이 산더미라는 것이었다.
안도, 불안, 걱정, 염려, 그 모든 감정이 수시로 오락가락했다. 발이 디디고 있는 땅은 평평하기 그지없었지만, 요동치는 감정에 속이 울렁거리며 멀미가 났다.
입술을 꾹 깨물어 구역질을 삼킨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최대한 비우려 노력하며 방을 나섰다. 끝끝내 뤼디거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도망치듯이.
그런 내 뒤로 뤼디거의 시선이 유난히도 길게 따라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착각이겠지. 나는 그리 곱씹었다.
* * *
나는 뚜껑을 덮어두듯이 잠에 모든 스트레스를 털어놓고 왔다. 좋지 않은 방법이라는 건 알지만 그 당시의 최선이었다.
그래도 자고 일어나니 좀 낫다. 기분 전환도 되고, 새롭게 의지를 다질 의욕 또한 났다.
환경이 바뀐 것도 영향이 없진 않았다. 내가 일어난 곳은 바로 손님방이었다.
쓰러진 뤼디거를 바로 부부 침실로 옮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항상 그에게 안겨 눈을 뜨던 부부 침실에서 홀로 눈을 뜨는 것보다야 이쪽이 내 정서적 안정에 훨씬 도움이 되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로라를 불렀다. 로라는 내가 부르기가 무섭게 세안물과 함께 들이닥쳤다. 마치 문 앞에서 준비하고 있던 것 같은 재빠른 행동이었다.
로라는 시중을 들면서 계속해서 내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는 기색이었다. 나는 애써 괜찮은 척 목소리를 꾸몄다.
“뤼디거 씨는 일어나셨니?”
“네……. 일어나셔서 마님을 찾으셨어요. 한 번 찾아뵈셔야 할 것 같아요.”
“나를?”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뚝 떨어트렸다.
“기억이 돌아오신 거야?”
“아뇨……. 그건 아니신 것 같아요.”
잠시나마 치솟았던 기대가 바로 푸시식 꺼졌다.
내 눈치를 살피던 로라가 재빨리 수건을 주워 건네며 말했다.
“일단…… 루카 도련님을 먼저 만나 뵙는 건 어떠세요? 안 그래도 루카 도련님께서도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던데.”
“그래……?”
나는 로라의 말대로 우선 루카와 만나기로 했다. 일단 뤼디거의 현 상태에 대한 사전 정보가 필요했다.
내가 부르기가 무섭게 루카가 들이닥쳤다. 로라도 그렇고 루카도 그렇고, 다들 내가 부르기만 기다리던 사람들 같았다.
“괜찮아?”
“괜찮지.”
루카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여튼 내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을 녀석이다.
내 상황에 대해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바로 말을 돌렸다.
“뤼디거 씨는 어때?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어?”
“우리를 만난 뒤 기억은 전혀. 그나마 다행인 건 요나스가 죽고 나서 나를 찾아오던 당시의 기억까지는 남아 있다는 거야. 덕분에 설명을 덜었지.”
루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예상하던 답에 나는 한숨과 함께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면……. 지금 상황을 어디까지 받아들인 것 같아?”
“음…….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질문도 별로 안 하더라고. 원체 말이 없는 편이긴 했지만……. 적어도 결혼은 했고, 이모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 정도는 인지한 것 같아.”
“기분 나빠하거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기분 나빠한다고?”
루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루카의 입이 몇 번 열렸다 닫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참을 주저하던 루카가 넌지시 물었다.
“일단 삼촌을 한번 만나볼래?”
“만나보라고?”
“왜 그렇게 놀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럴 줄 몰랐거든. 넌 나랑 뤼디거 사이가 좋은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이 기회에 이혼하라고 할 줄 알았지.”
물론 마지막은 호들갑 섞인 농담이었다. 타인에 의해 약점이 까발려지기 전에 먼저 내가 언급하는, 일종의 허세 섞인 농담.
그런 내 의도를 훤히 읽은 루카는 피식 웃으며 똑같이 농담으로 받아쳤다.
“내가 선왕이야? 그거야 둘이서 편먹고 날 애 취급하니까 그런 거지. 내가 두 사람 조카인데 둘이 불행해지기를 바라겠어? 하지만……. 그래, 확실히 선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곤란할 것 같네. 선왕이라면 분명히 이 기회에 이혼시키려고 난리를 칠걸.”
그건 그랬다. 선왕이라면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절대 안 된다고 할 거야.”
“삼촌이 이혼하자고 하면?”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루카는 장난이었다. 하물며 이혼 얘기를 먼저 농담 삼아 꺼낸 것은 나였고.
하지만 뤼디거가 나에게 이혼하자고 할지도 모른다니…….
생각만 해도 섬뜩한 소름이 내 몸을 휘감았다.
진저리를 쳐 소름을 떨쳐낸 나는 억지로 웃으며 애써 괜찮은 척 답했다.
“그러면 자살 쇼라도 벌이지, 뭐.”
“하여튼 못하는 말이 없어.”
루카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어른답지 못한 발언이기는 했다. 어린애한테 할 만한 말도 아니었고.
평소 루카를 어린애 취급하려고 하면서도, 막상 내가 정신적으로 막다른 골목길에 몰리면 결국 이렇게 루카에게 의지하곤 했다.
내가 어색하게 웃자, 루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뭐, 그렇게 될 일은 없겠지만 일단 입단속은 해 둘게.”
“그래. 부탁 좀 할게. 지금 내가 의지할 사람이 너밖에 없네.”
“그러니까 평소에 잘하라고.”
“잘하거든? 이보다 더 어떻게 잘하라고?”
“아주 자신만만하네. 그런 사람이 나한테 정신연령이 스무 살 가까이 차이나는 애들을 돌보라고 시켰다 이거지.”
아니, 잠깐.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게다가…….
“시킨 게 아니라 부탁한 거지! 그리고 대가로 자허토르테 한 판 전부 먹게 해줬잖아! 너 그렇게 먹을 건 먹고 입 싹 닦으면 안 되는 거야. 알겠어?”
“한마디도 안 지는 걸 보니 기력은 넘치나 보네.”
내가 발끈하자 루카가 씩 웃었다. 마치 내가 분연하기를 바란 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루카랑 입씨름하는 사이, 아까의 미칠 듯한 불안감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나는 아까보다 훨씬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루카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부러 그런 거지?”
“뭐가?”
“능청맞기는.”
나는 루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잘 다듬어진 루카의 고수머리가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나는 손을 뻗어 루카를 끌어안았다. 제법 자란 소년의 단단한 뼈가 곧은 나무처럼 나를 지지해 주었다.
평소라면 질색을 하며 빠져나갈 텐데, 오늘은 유난히도 순순하다. 나는 루카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항상 고마운 거 알지?”
“……고마우면 빨리 원래대로 돌아와. 아무래도 평소보다 놀리는 재미가 없으니까.”
“너, 이모를 재미로 놀리니?”
“그럼 재미없는데 왜 놀려?”
“루카, 너!”
내가 다시 한 번 발끈하기가 무섭게 루카가 내 품에서 쏙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문밖으로 달음박질치더니,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는 외쳤다.
“일단 삼촌한테 다녀와! 괜히 혼자서 이혼이니 자살쇼니 하는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그러고는 쌩하니 사라졌다. 혼자 남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루카의 말이 맞는 구석도 있었다. 혼자 있어 봐야 부정적인 생각만 계속하게 된다.
안 그래도 뤼디거가 나를 찾았다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 결심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해도 뤼디거는 내 남편이었다. 설령 그가 나를 타인처럼 바라보는 것에 상처를 받을지언정, 내가 회피해도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어떤 냉대를 받더라도, 그건 내가 아는 뤼디거가 아니니까 상처받을 필요도 없고.
‘뤼디거가 이혼이라도 하자고 하면……. 최대한 설득해 봐야지.’
그리 다짐하며 나는 결연히 발걸음을 옮겼고, 오래지 않아 뤼디거와 마주했다…….
굳건한 다짐과는 달리, 막상 그의 앞에 서니 어깨가 절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제 아내라는 말씀입니까?”
딱딱하지만 정중한 말투. 뤼디거치고는 그래도 나름 예의를 차렸다. 그가 나를 아내로서 부정하지는 않겠다는, 제법 긍정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마냥 기뻐하기엔, 나로서는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이 너무나 멀었다.
“음……. 그러니까, 네. 맞아요.”
나는 뤼디거의 눈치를 보며 답했다.
뤼디거는 몇 번이나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긴장? 불편함? 역시 갑작스레 생긴 아내로 인해 심기가 불편한 게 분명했다.
평소였다면 그냥 뤼디거 씨, 라며 그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그를 군 계급으로 호칭했다.
“물론 준장님이 비혼주의자시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당황스러우신 마음은 저도 익히 이해합니다만…….”
“뭐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