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67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11화
뤼디거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로서는 무척이나 드물게 드러내는 불쾌한 기색이었다. 그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멍하니 되물었다.
“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비혼주의자셨다고.”
“아뇨. 그 전에. 준장이라구요? 저희는, 그러니까 그런 호칭을 쓰는 부부였습니까?”
뤼디거는 취조하듯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대화의 초점에 당황한 나는 말을 더듬었다.
“네? 아, 아뇨. 그냥 불편하실까 봐요. 아무래도 당신, 기억이 없으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럼.”
“평소 대하던 대로 해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무어라 불렀습니까?”
뤼디거는 나를 고요히 응시하며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이 남자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내가 생각한 뤼디거의 반응은 나와의 결혼에 대한 의문과 거부였지, 호칭에 관한 반박이 아니었다.
예상 범위에서 한참 벗어난 그의 반응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혹시 대답하시기 힘든 호칭입니까? 거론하기 민망한…….”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거론하기 민망한 호칭이라는 게 도대체 뭐야?
여전히 떨떠름함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대로 답을 미뤘다가는 별 이상한 오해를 사기 십상이었다. 나는 재빨리 답했다.
“유……디트. 유디트 씨, 라고. 그냥 이름을 불렀어요.”
“유디트…… 당신의 이름이 유디트입니까. 당신에게 무척 어울리는 이름이로군요.”
뤼디거는 담담히 대답했다. 조금의 열기도 없는, 고저 없는 목소리와 달리 무척이나 치근덕대는 듯한 말투.
‘잠깐, 이거…… 굉장히 기시감이…….’
왠지 처음 뤼디거를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데, 착각이겠지.
‘그러고 보니 뤼디거,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상당히 다르다.
뤼디거가 첫눈에 반했다고 말한 그 당시에는 시골 아가씨다운 풋풋한 신선함이라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뤼디거가 질색하는 귀족 여인 그 자체였다.
‘게다가 나한테 한눈에 반했다고는 했지만……. 정말 그랬을까 의문이기도 하고.’
그냥 호기심과 호감 정도를 뤼디거가 과장했던 것일 터였다. 아무렴, 첫눈에 반한 것보다야 훨씬 신빙성이 있었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 넘기자니 근본적인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뤼디거의 미묘하고도 이상한 태도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최대한 뤼디거의 속내를 짐작하려 노력하며 슬쩍 말을 돌렸다.
“많이 혼란스러우시죠.”
“솔직히 그렇습니다. 제가 빈터발트를 이었다는 사실도 그렇고……. 하지만 제일 믿기 힘든 것은 당신이 바로 제 아내라는 사실입니다.”
“하하…….”
뤼디거의 의도를 짐작하려 했지만, 여전히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중요한 단어가 하나씩 빠진 것 같은…….
내가 어색한 웃음만 흘리고 있을 때, 돌연 뤼디거가 정색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낯을 한 채 나직이 운을 뗐다.
“유디트 씨께서는 왕녀나 다름없는 신분이라 들었습니다. 선왕의 총애를 받고 계신다고.”
“총애라고 하긴 좀 그런데.”
나는 조금 겸손을 떨었다. 하지만 뤼디거에게는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선왕은 괴팍하기 짝이 없죠. 그런 분이 따로 영지까지 챙겨줄 정도면 총애 맞습니다.”
그사이에 이곳 릴라니벨이 내가 선왕에게서 받은 땅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여쭤보는 것이니 솔직히 대답해 주십시오.”
“네.”
“혹시 제가 출세를 위해 유디트 씨를 꾀어 결혼한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갑자기 선왕 운운해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어떻게 해야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본인 스스로가 그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습니다. 그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 그러세요.
나는 엄숙히 자기 성찰을 하는 뤼디거를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뤼디거는 제 할 말을 이었다.
“제가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당신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건, 나와 결혼한 걸 그리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데…….
이혼 얘기가 오갈까 걱정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을 모양이다.
큰 고비를 넘긴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작게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 미움받을 짓은 전혀 안 하셨어요.”
“더더욱 다행이로군요. 당신과 제 사이가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우리는 어떻게 결혼하게 된 겁니까? 정략결혼? 아니면 제가 당신에게 결혼해 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습니까?”
굳이 따지자면 결혼해 달라고 무릎 꿇고 빈 게 맞는데…….
뤼디거 얘 왜 이렇게 잘 맞춰? 원래의 자신이라면 생각도 못 할 일 아니었어?
아니면 루카에게 먼저 들었다거나.
그러면 굳이 모르는 것처럼 물어볼 이유가 없지 않나?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떨떠름히 물었다.
“우리 결혼에 대해 루카에게 듣지 못하셨나요?”
“당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척 간략한 객관적인 사실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도 그럴 만하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어제 막 기억을 잃고 일어나셨는데 너무 많은 정보를 듣기엔 정신없었겠네요.”
“아뇨, 당신과의 일을 타인에게서 듣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
“당신과 나 단둘 사이의 일이잖습니까. 당신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
천연덕스럽다 못해 뻔뻔할 정도로 당당히 말하는 뤼디거의 입 끝이 수줍게 올라갔다. 나에게는 무척 헤프지만, 타인에게는 한 점 흘리는 일 없는 값비싼 웃음이 빙긋이 지어졌다.
뤼디거 빈터발트는 아무에게나 웃어주는 남자가 아니다.
상대가 부모라 해도 마찬가지인 남자가, 기억도 안 나는 아내에게 웃어줄 리가 없다.
사랑하는 상대가 아니고서야.
잠깐, 그 이야기인즉슨…….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 그 말, 정말이었어?! 그리고 지금, 기억을 잃고 다시 한 번 나한테 반했다고?’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뤼디거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호감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골탕 먹이려고 기억을 잃은 척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하지만 뤼디거는 그런 짓을 할 남자가 아니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참나. 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단 말이지…….’
“유디트 씨?”
내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자 뤼디거가 의아히 나를 보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횡설수설했다.
“자, 잠깐. 그러니까……. 우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아닙니다. 제가 당신에게 어떻게 청혼했는지 여쭤보고 있었습니다.”
뤼디거는 침착히 답했다. 지금 상황만 보면 기억을 잃은 게 뤼디거가 아니라 내 쪽 같았다. 나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뤼디거 씨는 본인이 청혼했다고 확신하시네요. 제가 청혼했을 수도 있잖아요.”
“설마요.”
“설마라니, 못 믿으세요?”
나는 휘둥그레 눈을 떴다. 농담 삼아 건넨 말이기는 했지만 뤼디거는 조금도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기까지 했다. 그가 저리 확신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과거의 제가 머리가 제대로 달린 놈이었다면, 당신을 만난 순간 청혼했을 테니까요.”
“…….”
“만약 제가 그러지 않았다면, 당신이 제 청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아마 당신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며 당신이 준비되기를 기다렸겠지요.”
정확하다. 소름이 돋았다.
실제로 뤼디거는 나와 처음 만나고 빈터발트로 가는 마차에서 내내 불꽃같은 플러팅을 해댔다. 내가 그걸 제대로 못 받았을 뿐이었지.
뭐라 했더라.
‘우리가 루카의 엄마, 아빠가 되어, 루카를 훌륭하게 키우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래. 처음 만나고 그다음 날 건넨 말이다.
와, 그때는 뤼디거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해 갈팡질팡하며 당황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구애의 표시를 정말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얼굴이 홧홧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몇 번이고 입만 열었다 닫았다.
그렇게 한참을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가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렸다.
나는 허겁지겁 뤼디거의 질문에 답했다.
“아, 그러니까 저희가 어떻게 결혼하게 된 거냐면…….”
막상 이야기하려니 부끄러웠다.
차라리 내가 그에게 구애한 걸 읊으라 하는 게 낫지, 내가 그에게 받은 걸 말하려니 손끝이 간질거리며 절로 곱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고개가 익은 벼처럼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아마 귀도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뤼디거는 진지한 낯으로 내 말을 경청했다. 토씨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전부 곱씹어 외울 기세였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납득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러니 대충 넘기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뤼디거와의 만남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뤼디거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처럼 보고했던 경험 덕도 좀 봤고.
계속 말을 하느라 입이 고단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만했다.
뤼디거가 기억을 잃긴 했지만,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했던 그 어떤 상황보다도 긍정적인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