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70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14화
뤼디거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무던한 낯으로 루카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스며 있는 압박감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루카는 그런 압박감에 굴할 아이가 아니었다. 루카의 새파란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 사이의 심상치 않은 기류에 내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물론 루카의 언행이 제 나이답지 않기는 하다. 하지만 평소였으면 뤼디거도 그냥 흘려 넘겼을 만한 이야기였다.
아니, 오히려 내가 한마디 하고 뤼디거는 루카를 두둔했다.
하지만 지금은…….
뤼디거의 경계는 노골적이었다.
뤼디거가 루카를 경계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어린애에, 형인 요나스를 닮았으니 딱 봐도 자기 조카라는 걸 알 텐데…….
‘설마 나랑 루카가 너무 허물 없어서……. 그래서 질투하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뤼디거가 루카를 질투했던 적도 있다.
다만 그건……. 내가 자기를 루카만큼 신경 안 써준다는 투정에 가까운 것이었지, 실제로 루카를 질시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내가 다른 누구보다도 뤼디거를 신경 쓰는 상황이니, 루카에게 질투할 일이 없다.
‘다른 이유가 있겠지. 루카가 뤼디거의 심기를 거스를 말을 했다가……. 그러고 보니 기억을 잃은 첫날, 루카가 뤼디거에게 상황을 설명했었지.’
그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게 아닐까. 그래서 지금도 으르렁대는 거고.
그게 제일 신빙성이 있었다.
그렇게 내가 뤼디거의 이상 행동의 근원을 추론하고 있는 사이, 기가 찬 루카는 어이없는 실소를 흘렸다.
“삼촌은 기억이 안 나서 모르나 본데, 이모 보호자는 나야. 알겠어?”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나이도 먹을 만치 먹어서 이모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것도 보기 좋은 꼴은 아니구나, 루카.”
“참 나, 내가 삼촌 뒤치다꺼리 해 준 게 얼만데 지금 와서 기억 안 난다고 이러기야?”
“내 뒤치다꺼리를 해준 건 고맙지만 그것이 결혼한 이모에게 집착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집착은 삼촌이 하고 있거든?!”
루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까지 루카와 뤼디거 사이가 별 소란 없이 균형을 이뤄 왔던 건 어디까지나 뤼디거가 루카의 행동에 대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근간이 깨져 버리니, 두 사람 사이가 마치 녹기 시작한 빙판처럼 위태위태해졌다.
뤼디거와 대화하던 루카가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외쳤다.
“성가셔! 얼른 기억 찾게 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라니까.”
드물게 루카와 나의 마음이 맞았다.
정작 뤼디거는 성가시다는 루카의 말에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아까는 별거 아닌 말에도 발끈하더니…….
안 그래도 엉뚱한 남자인데, 기억을 잃은 뒤로는 내가 아는 그와 내가 모르는 그가 뒤섞여 더더욱 종잡을 수가 없어졌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까지 가는 길이 험난할 것이 절로 예상되었다.
* * *
아니나 다를까, 뤼디거와 루카의 사이는 그 이후로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수도로 가는 마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좁혀지는 것이 있었으니, 뤼디거와 나 사이 거리였다.
괜스레 긁어 부스럼일까 싶어 입 다물고 참고 있었는데, 점점 들러붙다 못해 철썩 붙은 꼴에 운을 뗄 수밖에 없었다.
“저기, 뤼디거 씨.”
“네.”
“좀…… 떨어져 주실래요?”
“왜요?”
왜냐니? 태연스레 묻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던 나는 뤼디거와 나 사이 간격을 보았다.
조금의 틈도 없다 못해 그의 품에 반쯤 끌어안겨 있었다. 남들 보기 민망한 꼴일뿐더러, 어린 조카에게 보여주기에도 정도 이상이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답했다.
“루카도 있고……. 이렇게 붙어 있을 필요가…….”
“루카가 무슨 상관이죠?”
뤼디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는 부부 아닙니까. 유디트 씨 말씀대로라면 금실 좋은. 아닙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이렇게 남들 보는 앞에서 철썩 들러붙는 건 우리 스타일 아니었다니까?
‘설마……. 뤼디거, 원래 이렇게 들러붙고 싶었는데 참았던 건 아니겠지.’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이런 건 내가 못 견디겠으니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뤼디거의 가슴을 슬쩍 밀어냈다.
“그래도 남들 시선은 신경을 써야죠.”
“남의 시선을 왜 신경 쓰죠?”
“…….”
벽을 보고 말해도 이것보단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
예전엔 이런 뤼디거와 어떻게 대화를 한 걸까?
아니, 그것보다 나는 이 남자를 어떻게 설득한 거지?
‘그때는 뤼디거의 눈 밖에 나서 내쫓기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고……. 여러모로 참았었지.’
예전에 다 겪은 일이지만 다시 마주하니 막막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무지의 용기로 헤쳐 나온 일들도, 두 번 하려니 어설프게 알게 되어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뤼디거와 내가 투덕거리는 동안 창문에 턱을 괴고 창 밖의 풍경을 보고 있던 루카가 심드렁히 말했다.
“포기해.”
“하아…….”
* * *
뤼디거에게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알려주기는 했지만, 루카가 소원의 잔을 이용해 회귀했다는 사실까지 밝히지는 않았다.
너무 구구절절하기도 했고, 지금의 뤼디거가 거기까지 알아봐야 머리만 더 복잡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뤼디거는 유난히 루카와 내가 어울릴 때마다 불만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하긴, 열세 살 조카가 이모 하는 일에 하나하나 간섭하는 건 좀 어색하긴 하지.’
그건 나도 불만이었다. 굳이 루카가 열세 살이 아니어도 불만이었다!
‘하지만 익숙해져 버렸단 말이지……. 게다가 루카, 쉽게 물러서는 타입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된 루카의 과보호에 나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에 대해 기억을 잃기 전의 뤼디거와 나눴던 말이 있기는 했다.
‘루카 걔는 도대체 언제까지 내 보호자처럼 굴 건지…….’
‘아마 새로운 피보호자가 등장하면 관심이 옮겨지지 않겠습니까.’
‘피보호자라면?’
‘신경이 쏠릴, 또 다른 존재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생길까요?’
‘루카도 빈터발트입니다. 마이바움의 피를 잇고 럼가트의 피를 이었지만, 루카의 기저에는 빈터발트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빈터발트는 제 여자에게는 제 모든 것을 내던집니다. 주변 다른 이들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거 왠지 기쁘면서도 섭섭할 것 같네요.’
‘걱정 마십시오. 그때가 되면 제가 유디트 씨께서 섭섭하단 생각을 할 틈도 없게 만들 테니까요.’
그리 말하며 활짝 웃던 뤼디거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쌓아두었던 추억들을 공유할 상대가 사라진다는 건 생각보다도 상실감이 더 컸다.
‘아니야, 유디트. 희망을 놓지 마. 뤼디거 씨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고. 잠시 잊고 있는 것일 뿐이야.’
나는 고개를 내저어 허튼 상념을 떨쳐냈다.
수도가 이제 코앞이었다. 나는 늦기 전에 뤼디거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뤼디거 씨, 부탁드릴 게 있어요.”
“말씀만 하십시오.”
“수도에 가서 뭔가 행동하시기 전에 일단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한마디로 일치기 전에 보고하란 뜻이었다. 그래야 어떻게 수습이라도 가능할 테니까.
“선 보고, 후 조치 말씀입니까?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뤼디거는 걱정 말라 했지만, 걱정이 아니 될 수가 없었다.
지금껏 뤼디거가 저질러온 일이 있지 않던가. 내가 삼 년간 애써서 학습시켜 둔 것들이 완전히 원위치가 되어버렸기도 했고.
나는 노파심에 집요할 정도로 그의 자유를 억제했다.
“혼자서 누굴 따로 만나지도 말고요.”
“알겠습니다.”
“저랑 꼭 함께 있어야 해요.”
“알겠습니다.”
함께 있자는 말에 대답하는 뤼디거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뜬 듯 들렸다.
거의 감금이나 다름없는 상황인데도 그는 별 상관없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말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던 나는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지만, 뤼디거는 알겠다는 답만 계속할 뿐이었다.
사실, 그 외의 답을 한다 해도 문제기는 했다.
그렇게 우리는 수도에 도착했다. 마차는 바로 왕궁으로 향했고, 뜻밖의 방문에 왕궁에서는 헐레벌떡 우리를 맞이했다.
“오오, 유디트! 웬일로 여름에 수도에 온 것이냐.”
“할아버지.”
소식을 듣고 날아온 선왕을 맞이하며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실 왕궁에서 벌어지는 일을 선왕 모르게 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선왕의 관심이 나에게 쏠려 있기에 그러했다.
그럴 바에는 내가 먼저 토로하고 지원을 받는 게 나았다. 나는 솔직히 선왕에게 털어놓았다.
“그게 사실은요…….”
* * *
뤼디거가 기억상실이라는 말에 선왕은 화들짝 놀랐다.
선왕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멀끔한 뤼디거의 얼굴과 곤혹스레 일그러진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한참을 바라본 뒤에야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였다.
“내가 치매 걸려 뒤지기 전에 빈터발트 놈이 기억상실 걸린 꼴을 보게 되다니. 감개무량하구나.”
“기뻐할 일이 아니에요, 할아버지!”
“기뻐한 게 아니라, 놀라워한 거야.”
“감개무량하다는 말 똑똑히 들었거든요! 아무리 할아버지가 뤼디거 씨를 마음에 안 들어 해도 그렇지, 어떻게 본인 앞에서…….”
“좋으실 대로 두십시오, 유디트 씨. 선왕 전하의 얼마 남지 않은 생에 이런 기쁨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