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71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15화
뤼디거가 발끈한 나를 만류했다.
태연하다 못해 천연덕스러운 그 태도에 선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여튼 빈터발트 놈들에게는 정이 안 가. 기억을 잃어도 똑같구먼, 똑같아.”
“때마침 다행이로군요. 저도 선왕 전하께는 도통 정이 안 갔는데 말입니다.”
뤼디거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기 싸움을 종식한 것은 바로 루카였다.
“어차피 둘 다 평생 서로에게 정 붙일 생각 없잖아요. 일단 의사부터 불러서 해결책이나 찾죠. 삼촌 저 상태인 거 진짜 성가시니까.”
루카의 말에 정곡을 찔린 두 사람은 머쓱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왕실 의사가 우리를 찾아왔고, 나는 왕실 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왕실 의사는 심각한 얼굴로 한참을 침묵했다. 고뇌하는 의사의 눈치를 보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치료할 방법이 없나?”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가 진지하게 답했다. 긍정적 답에 희망을 품은 나는 의사를 재촉했다.
“그래? 역시 왕실 의사라 다르군. 그 방법이 뭔가?”
“……머리에 똑같은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억을 되찾은 사례가 있습니다.”
“…….”
나는 침묵했다.
혹시나 하긴 했지만 정말 그 방법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아니, 왕실 의사라며? 그 대단하다는 왕실 의사단이 내민 결론이 결국은 머리에 동일한 충격을 주세요, 이거냐!
의사단에서는 배당된 연구비를 전부 어디로 빼돌린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돌팔이 같은 민간요법 소리를 할 리가 없다. 나는 의학 비리에 대한 확신을 품었다.
희망을 품을수록 진창으로 고꾸라지는 낙차가 더 큰 법이다.
순간 머리끝까지 열이 뻗쳤다. 나는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의사를 노려보았다.
“그랬다가 빈터발트 준장께서 식물인간이 되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자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나?”
“그게 아니라면……. 저도 당장 아는 방법이 없습니다. 조금 더 사례를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날카로운 반응에 의사는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허리를 굽신굽신 숙이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뒤늦게 아차 했다.
뤼디거의 문제다 보니 예민해진 모양이다. 확실히 내가 신경질적으로 굴기는 했다.
나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의사를 달랬다.
“준장께서 기억을 되찾는 일이 그대 손에 달렸네. 부디 최선을 다해주게.”
“걱정 마십시오.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치료법을 찾겠습니다.”
의사는 결연히 답했다. 의사가 물러나고, 나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수도까지 온 것이 무색하게 아무런 소득이 없다.
속상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절로 얼굴에 드러나는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뤼디거가 내 뺨을 매만지며 위로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유디트 씨의 안색이 좋지 않으니 속이 상합니다.”
“미안해요, 뤼디거 씨. 뤼디거 씨가 더 답답할 텐데.”
“아뇨. 사실 전 딱히.”
“…….”
그건 그래 보였다. 당사자인 뤼디거보다도 내가 더 속 끓는 것 같았으니까.
이래서 신경 쓰는 사람만 계속 신경 쓰게 된다니까!
세상에는 방이 어지럽혀져 있으면 그걸 무시할 수 있는 사람과 치울 수밖에 없는 사람, 두 부류가 있다. 뤼디거는 전자였고, 나는 단언컨대 후자였다.
애초에 태어나기를 대범하지 못하게 태어난 내 죄다, 내 죄.
나는 반쯤 포기한 채 허탈한 심정을 부여잡고 소파에 널브러지듯 앉았다.
반대쪽 소파에 있는 선왕은 심각한 낯으로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흐음…….”
표정이 묘했다.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바로 선왕을 제지했다.
“할아버지,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
“으, 으응? 무슨 이상한 생각말이더냐.”
“이 기회에 저를 뤼디거 씨랑 헤어지게 한다든가 그런 생각 말이에요.”
“아니,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지 않느냐!”
선왕이 펄쩍 뛰었다. 너무 과한 반응을 보이는 게 더 수상쩍었다.
나는 가늘게 눈을 떴다. 선왕은 괜스레 헛기침하더니 말을 돌렸다.
“흐음……. 그렇다면 준장의 기억상실 치료법을 발견할 때까지 수도에서 머물러야겠구나.”
“딱히 그건 아니지만.”
“아무렴 왕실의 치료를 받는 게 낫지. 암, 그렇고말고.”
우리야 릴라니벨로 돌아가도 상관없지만 선왕은 반 억지를 썼다. 조금이라도 나를 수도에 붙들어 놓으려 하는 선왕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선왕이 계속해서 졸랐다.
기실, 수도에 머물면 귀찮은 일들이 생기는 게 문제였을 뿐이지, 릴라니벨로 돌아간다 해서 뾰족한 방법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좋아요. 하지만 왕궁이 아니라 빈터발트의 타운하우스에서 머물게요.”
“굳이 왕궁 놔두고…….”
“싫으시다면 릴라니벨로 돌아가고요.”
“아니, 아니. 싫다는 건 아니고.”
선왕은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선왕의 솔직한 반응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 오늘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가볼게요. 내일 또 찾아뵐게요, 할아버지.”
“아, 잠깐, 유디트.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선왕은 나를 붙잡고도 한참을 입을 떼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뒤에서야 선왕이 내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운을 뗐다.
“그 충격 주는 거, 제법 신빙성 있어 보이는데 내가 한번 해 보면 어떻겠느냐?”
“네?”
“아니, 손주 사위가 걱정돼서 그렇지. 이럴 때 이 할애비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야지 않겠느냐. 이 할애비만 믿거라.”
“그러니까……. 지금 뤼디거 씨의 머리에 충격을 주시겠다?”
선왕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친네의 변덕이니 참자 싶으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으니 참을 기력도 사라졌다. 나는 바로 목청을 높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손주 사위 걱정은 무슨.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시네!”
“딱, 딱 한 번만! 한 번이면 된다! 저 빌어먹을 놈팽이의 머리를 딱 한 번만 치게 해다오!”
속내가 까발려진 선왕이 목소리 높여 빌었다. 거의 나에게 애원하다시피 하는 선왕의 모습에 기가 찼다.
“도대체 얼마나 뤼디거 씨를 패고 싶었으면 저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까지!”
“그냥 패고 싶어서 저런다기보다는, 그 한 방으로 아주 보내버릴 생각이었던 거 아냐?”
한발 물러서 있던 루카가 심드렁히 덧붙였다. 그사이 흥분을 가라앉힌 선왕은 침착히 변명했다.
“어허, 루카. 나는 진심으로 준장을 걱정해서 그런 것일 뿐이야.”
“그러다가 선왕 전하께서 아주 가시는 수가 있습니다. 건강, 조심하셔야지요.”
“뤼, 뤼, 뤼디거! 네 이놈!”
애써 되찾은 침착이 뤼디거의 말 한마디로 완전히 날아갔다. 뤼디거를 향해 삿대질하는 선왕의 얼굴이 시뻘겠다.
뤼디거의 말대로 당장에라도 뒷목을 잡고 넘어갈 듯한 그 모습에, 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 * *
나는 계속 이렇게 소란스러우면 릴라니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강수를 두었고, 그것만큼은 바라지 않았던 선왕은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렇게 일이 일단락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오해였다.
“네? 연회요?”
“연회까지는 아니고. 가벼운 와인 시음회 정도……?”
“와인 시음회라는 이름의 연회인 거 다 알아요. 누가 속을 줄 알아요?”
내 말이 정곡이었는지, 선왕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내 경험상, 사람이 잔뜩 모이는 곳에 가서 좋았던 적이 없다. 안 좋은 기억만 한가득인 만큼, 나는 부정적인 의사를 밝혔다.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연회에 참석해요.”
“왜 참석을 못하느냐?”
“뤼디거 씨가 기억상실이잖아요.”
“에스코트야 다른 사람에게 받으면 되지.”
“남편이 함께 성에 왔는데 다른 사람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라고요?”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뤼디거와 나를 떨어트려 놓을 속셈인가?
하지만 선왕은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면 준장과 같이 가면 되지 않겠느냐.”
“기억상실이라니까요. 이럴 때 연회에 나섰다가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무슨 일이 있겠느냐? 어차피 연회에서 저놈에게 말을 걸 놈은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말을 걸면 또 어떠하느냐? 아무도 저 놈이 기억을 잃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그랬다.
릴라니벨에서 일하는 하녀들이야 온종일 같이 지내니 그의 이상함을 바로 눈치챘다지만, 지금 뤼디거의 뻔뻔함을 보건대 수도의 귀족들은 전혀 눈치 못 챌 게 분명했다.
솔직히 선왕도 내가 왕실 의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 사실을 밝히지 않았더라면 뤼디거가 기억 상실인 것을 몰랐을 테니까.
“수상쩍은데……. 무슨 꿍꿍이이신 거예요?”
“꿍꿍이라니! 네가 정 신경 쓰이면 난 얼굴만 비치고 금방 사라지마.”
“아니, 그럴 것까진 없고…….”
선왕은 집요하게 연회를 졸랐다. 이번 연회만 나가준다면 당분간 귀찮게 하지 않겠다며 떼를 쓰는 통에, 나는 결국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선왕의 억지에 심신이 피로해진 나는 비척비척 타운하우스로 돌아와 소파에 누웠다.
“알고 보니 뤼디거 기억상실 축하 연회, 이런 건 아니겠지…….”
“하여튼 선왕은 이모만 보면 연회를 못 열어 안달이라니까.”
루카가 심드렁히 말을 받았다. 습관적으로 신문을 펼쳐 드는 꼴이, 이 상황에 전혀 관심 없다는 기색을 풀풀 풍겼다.
루카는 신문의 활자에 집중하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제일 예쁜 손녀를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은 거겠지.”
“나는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저는 제가 유디트 씨 남편인 것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네……. 그건 참 다행이네요.”
뤼디거나 루카나, 연회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만 이렇게 신경 쓰고 걱정하는 거야? 내가 문제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