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72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16화
그래. 외눈박이 세상에서 두눈 박이가 비정상인 것처럼, 천상천하 유아독존 마이웨이 세 사람 사이에서 평범한 내가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쯤 포기한 나는 별생각 없이 연회 준비를 했다.
시간은 참으로 빨리도 흘렀다. 눈 몇 번 깜빡이고 나니 연회 당일이 되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그냥 오늘은 참석 안 하는 게 어때요? 에스코트야 여차하면 루카에게 맡겨도 되는 일이고.”
“유디트 씨의 에스코트를 타인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죠. 걱정 마십시오.”
타인이라고 딱 잘라 말할 것까지야…….
뤼디거의 정 없는 말투에 괜스레 루카의 눈치가 보였다. 안 그래도 루카는 회귀 전 뤼디거의 이런 모습에 상처를 많이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루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루카는 귀찮은 걸 처리하듯 손을 휙휙 내저으며 말했다.
“와인 시음회라며. 내가 가서 뭐 해. 나도 와인 시음하게 해줄 거야?”
“아니!”
“그러면 그냥 삼촌이랑 같이 가. 못 가게 하면 분명 이상한 일 저지른다. 차라리 이모 시야 안에 두는 게 속 편할걸?”
“그렇습니다. 유디트 씨의 마음의 평안을 위해 절 데려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뤼디거는 천연덕스레 루카의 말을 받았다. 루카를 못마땅해하는 것 같더니, 기억을 잃어도 손발은 척척 잘도 맞았다.
“지금 저 협박해요?”
“협박이라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유디트 씨를!”
뤼디거는 펄쩍 뛰었다.
그는 결백을 증명하려는 듯 순진무구한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와인 시음회를 빙자한 연회로 향했다.
그래도 와인 시음회라는 명목답게 연회장에는 가벼운 핑거푸드와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연회장에는 젊은 귀족들이 한 서른 명 정도 자리하고 있었다. 다들 손에 한 잔씩 와인잔을 들고 있었고, 잔이 빌 때마다 왕실 시종을 불렀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작은데……. 진짜 와인 시음이 목적이란 말이야? 정말로 선왕이 순수한 의도로 이 시음회를 연 거라고?’
의심을 미처 버리지 못한 내가 수상쩍게 연회장을 둘러보고 있던 중, 연회장에 미리 와 있던 빅토리아 왕녀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유디트.”
빅토리아가 나서기가 무섭게 귀족들이 썰물처럼 자리를 비켰다. 그 사이를 여유롭게 걸어오는 빅토리아에게서 차기 왕으로서의 위엄이 풍겼다.
“안 그래도 유디트 네가 수도에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언제 얼굴을 보나 했더니, 이렇게 기회가 닿는구나. 네가 오는 줄 알았더라면 죠세핀도 왕성에 남아 있었을 텐데.”
“저도 예상치 못했던지라. 그러고 보니 죠세핀은 어딜 갔나요?”
“저머밀 중령이 이번에 괜찮은 요트를 샀다더구나.”
“아아…….”
나는 픽 웃었다. 뤼디거의 두 친구 중 한 명인 페터 저머밀의 이상형은 ‘꽃도 못 꺾을 것처럼 착한 외모로, 이기적인 짓을 서슴지 않는 여자’였다.
착한 아이인 척하는 것을 그만둔 죠세핀의 본 성격을 보고 그가 한눈에 반해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실, 죠세핀의 외모만큼은 온화하고 가녀리기 그지없었으니까
페터는 그 뒤로 계속해서 죠세핀에게 열렬한 구애 중이었다.
이번에 요트를 장만했다는 것 또한 죠세핀의 관심을 끌기 위한 페터의 수작일 터였다.
물론 죠세핀은 결혼에 별 생각이 없는지라, 페터의 구애의 단물만 쏙쏙 즐기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죠세핀의 태도조차 패터의 취향 한복판 스트라이크였다.
그렇게 우리가 간단한 안부를 나누는 사이, 빅토리아와 함께 다가온 사무엘이 나에게 불쑥 말을 건넸다.
“어쩐지. 선왕께서 급작스럽게 연회를 준비하라 하신 게 전부 유디트 너 때문이었구나.”
“괜히 유디트에게 친한 척 굴지 마십시오, 오라버니.”
“친한 척이라니!”
빅토리아가 핀잔을 주자 사무엘은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우린 친해!”
“그래서 오라버니를 반기는 유디트의 표정이 저리 어색한가 봅니다.”
“아니, 유디트. 네가 저 오라버니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망아지 같은 여동생에게 말 좀 해 다오.”
“유디트에게 억지로 대답을 강요해 봐야 부질없습니다.”
“네가 유디트와의 관계를 독점해서 선왕 전하의 호의와 빈터발트 경의 지원을 독점하려 하는 걸 내 모를 줄 아느냐!”
사무엘과 빅토리아는 한참을 투덕거렸다. 견원지간은 여전한 듯싶었다.
왕족의 후계 구도는 점점 명확해져 갔다. 사무엘도 왕으로서 나쁘지 않은 재목이었지만, 빅토리아가 너무나 강력했다.
거기에 뤼디거를 위시한 빈터발트 가의 원조까지 받으니, 그야말로 사자가 날개를 단 격이었다.
1년 전, 결국 왕은 빅토리아를 차기 왕으로 삼겠노라 결정을 내렸다.
사무엘도 빅토리아가 왕이 되는 걸 마지못해 인정하기는 했다.
미처 추스르지 못한 미련이 여전히 철철 넘치고 있는 게 문제였지.
그래도 사이가 나쁘지는 않은지라, 아까도 함께 있던 것 같았다.
‘은근히 잘 붙어 다닌단 말이지.’
그러는 사이에도 대화는 이리 튀고 저리 튀더니, 삼 년 전 내가 프란츠를 처리하기 위해 수를 썼던 그 당시까지 거슬러 내려갔다.
“아니……. 나도 분명 그때 유디트를 도와주지 않았더냐. 그런 데 왜 이런 불공평한 사태가 벌어진 거지?”
“아니죠. 그건 가족끼리의 도움이잖아요. 오라버니, 같은 혈연 사이에 그렇게 매정하게 굴 생각이에요?”
“같은 혈연이면서 나에게 제일 매정한 건 바로 너야, 빅토리아!”
“흐흥.”
빅토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그 뻔뻔한 모습에 열이 뻗친 사무엘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게다가 너는 빈터발트 준장과 거래했으면서! 그는 가족 아니더냐?”
“준장과 거래한 건 그 전이니까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 거래가 이어지는 건……. 서로에 대한 신의?”
빅토리아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녀와 뤼디거와의 사이에 신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사무엘을 약 올리기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개의치 않는 기세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사무엘의 말대로, 사무엘에게 제일 너무한 것은 빅토리아가 맞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 주제가 나에서 뤼디거로 넘어갔다.
왕궁에서 뤼디거가 기억상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선왕과 국왕, 그리고 왕실 의사뿐이었다.
혹시라도 뤼디거가 말실수를 할까 나는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뤼디거는 가만히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침묵을 넘어서 사무엘과 빅토리아의 말에 관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 뤼디거의 태도가 익숙한 듯, 사무엘과 빅토리아는 저희끼리 대화를 계속했다.
“오늘 에스코트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날 닦달해서 데려와 놓고는, 뭐가 어쩌고저째? 평소 연회를 별로 즐기지도 않으면서! 솔직히 말해봐라. 오늘 유디트 앞에서 날 아주 망신주기로 작정한 거지? 그렇지?”
“오늘은 예외예요. 빠질 수 없잖아요? 이런 날은 흔치 않다고요.”
흘러가는 빅토리아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낀 나는 순간 흠칫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빅토리아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 생각하니 수상쩍은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선왕이 나 때문에 이번 연회를 열었다는 사무엘의 말도 그렇고…….
“저, 빅토리아. 방금 했던 말말인데요…….”
“응? 뭐가?”
“이런 날은 흔치 않다고.”
“하하. 그렇지. 네가 간만에 찾아와서 그런가? 선왕 전하께서 힘을 좀 쓰셨거든.”
“선왕 전하께서…… 힘을 쓰셨다고요?”
“연회장을 둘러보면 알게 될 것이야.”
의미심장한 빅토리아의 웃음에 나는 황급히 연회장을 살폈다. 그러고는 이내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보통 연회에는 남녀 쌍을 맞춰 입장하는 게 보통이다.
특히나 이렇게 작은 연회라면 더더욱.
그런데 이상했다. 연회장의 성비가 심하게 불균등했다. 연회장을 가득 채운 것은 남자 귀족들이었다. 그것도 전부 젊고 잘생긴.
꽃다발도 이보다는 덜 화려할 듯싶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이쪽을 바라보는 눈길이 수상쩍다.
이 연회장에서 제일 신분이 높은 이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신경 쓰는 것일 뿐이라 단언하기엔, 묘하게 안달 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설마……?
내가 눈치챘다는 걸 바로 알아챈 빅토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치? 이렇게 잘생긴 귀족 사내들만 모아두는 일은 흔치 않다고.”
“하여튼…….”
사무엘이 혀를 쯧쯧 찼다. 정착할 생각 없이 연애만 하는 여동생을 못마땅해하는 티가 풀풀 났다. 물론 빅토리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솔직히 고맙다고 해도 돼요, 오라버니. 새언니가 오늘 연회에 데려가 달라 했는데, 내가 미리 선수 쳐 핑계가 되어주어 고맙죠?”
“흥, 이런 늑대 소굴에 내 부인을 데려올 리가! 부인이 아무리 오고 싶다 해도 내가 안 된다 하면 그만인걸. 그게 네 덕인 줄 아느냐?”
“말은 이렇게 해도 새언니 앞에 서면 절대 거절 못 하는 거 알아요.”
“쳇!”
사무엘은 괜히 성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껏 침묵한 채 대화를 한 귀로 흘리고 있던 뤼디거가 어두컴컴한 낯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는 형형히 눈을 빛내며 나직이 물었다.
“이 늑대 새끼들이 전부 유디트 씨를 노리고 몰려들었다, 이 말입니까?”
선왕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 선왕의 목을 향해 손을 뻗을 듯한 뤼디거의 기세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뜬금없는 와인 시음회다 싶었다. 선왕에게 이런 속셈이 있었을 줄이야…….
뤼디거가 정신이 혼미해진 틈을 타, 나에게 재빨리 풋풋하고 잘생긴 신선한 미남을 공급하려는 계획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