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73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17화
내가 다른 남자에게 눈을 돌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찔러보기인가.
대놓고 하자니 나중에 뤼디거가 정신을 차렸을 때가 걱정되니까, 적당히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와인 시음회라는 명패를 걸어둔 모양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기엔 너무 노골적이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선왕이 바라는 그림은 무얼까.
내가 여기서 다른 젊은 애랑 눈이라도 맞아 임신이라도 하길 바라는 걸 수도 있다.
어지간히도 빈터발트의 피를 이은 증손주를 보기가 싫은 모양이지.
나는 나직이 혀를 찼다.
‘막상 증손주가 생기면 또 예뻐할 것 같은데 말이야. 이거, 자녀 계획 조정이 필요하겠는데…….’
“마이바움 백작님.”
그때 우리를, 아니, 정확히 내 쪽을 계속해서 힐끔힐끔 보고 있던 사내들 중 하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이제 막 스물을 넘긴 것처럼 보이는 파릇하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나는 분명 마이바움이라는 성에 내려진 백작위의 주인이기는 했다.
내가 처음 왕족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선왕이 릴라니벨과 함께 건네준 작위였다.
백작이라니! 부담스러웠던 나는 몇 번을 거절했지만 선왕은 막무가내였다.
나중에 루카가 빈터발트가 아닌 마이바움을 잇게 되고, 루카에게 물려줄 작위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작위를 지니고는 있었지만……. 백작으로 칭해지는 것이 영 불편한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보니 대외적인 내 호칭은 어디까지나 작센 백작 부인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나를 마이바움으로 호칭한다?
그것은 작센이라는 호칭을 제외하고 싶기 때문이리라.
한마디로 나를 뤼디거의 아내로서 대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해도 사교계 관습은 뻔하다. 뤼디거가 그런 상대의 의도를 모를 리 없다. 뤼디거의 눈썹이 씰룩이며 하늘로 치켜 들렸다.
그런 뤼디거의 불편한 속내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히려 수줍은 듯 귓가를 발갛게 붉히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와인에 취미가 있으시다 들었습니다. 영지에서 따로 와인을 연구하신다고…….”
와인에 취미가 있는 건 선왕이고, 영지에서 와인을 연구하는 건 하녀장 로라의 독단적 재량이었다.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착각이에요.”
나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예전에는 평민 출신인 내가 괜히 귀족들 눈 밖에라도 나면 루카에게 안 좋은 소문이라도 돌까 걱정했었다지만, 이제는 그럴 일도 없었다.
냉랭한 내 태도에도 청년은 굴하지 않았다.
청년은 입술에 달콤한 말을 가득 물은 채 나에게 달라붙었다.
“마이바움 백작님의 이름을 딴 와인을 시음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고혹적이고 달콤하더군요. 마이바움 백작님의 격에 맞는 와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와인이었지만, 그래도 마이바움 백작님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마이바움 백작님, 혹시 백포도주는 어떻습니까? 제가 무척 달콤하고 귀한 와인을 하나 가져왔습니다만…….”
처음 물꼬를 튼 청년을 시작으로, 다른 청년들도 질세라 달려들었다.
끊임없이 아부하며 달라붙는 미남들이라니. 당혹스러웠던 나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건 할아버지의 수작일 뿐이야. 얘네들이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거나 그런 걸 리가 없어. 그러니 단호하게 밀어내야…….’
하지만 나에게 호감을 사려 사근사근 웃으며 눈치를 보는 잘생긴 얼굴들을 눈앞에 두고 정색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미남들이 더더욱 몰려들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뤼디거의 눈치를 보아서라도 내 근처에 조금도 다가오지 못했을 텐데, 오늘은 뭘 잘못 먹었나 하나같이 다들 저돌적이었다.
단시간에 급격히 피로해진 나는 미간을 엄지로 눌러 펴며 그들을 만류했다.
“잠깐, 다들 조용히 좀 하시고…….”
쨍그랑!
내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무언가 깨지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연회장을 울렸다.
모두가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깨진 와인 병의 주둥이를 손잡이 삼아 들고 있는 뤼디거가 있었다.
와인 병은 날카로운 예기를 흩뿌리며 번뜩였고, 쏟아진 와인은 카펫을 붉게 물들이다 못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숙성된 포도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와인 향이 아니었다면 살인사건 현장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흉흉한 광경이었다.
모두가 경악하여 뤼디거를 바라보는 가운데, 뤼디거는 나를 바라보며 빙긋 눈을 휘어 웃었다. 무척이나 현실에서 동떨어진,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일렀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총도, 칼도, 아무것도 안 들고 와서.”
“초, 총이나 칼을 들고 왔다면 어,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는데요?”
“이런 소란 없이 좀 더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겠지요?”
“…….”
그 말인즉슨, 조금의 딜레이 없이 바로 칼부림이나 총부림을 했을 거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상대를 조져버리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뤼디거의 얼굴을 보아하니, 내가 생각한 것이 착각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했다.
어쩐지 청년들이 몰려와서 시끄럽게 구는데도 조용하더라니……. 저 손에 들린 흉기를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혹시 몰라 연회에 오기 전에 그에게서 총과 칼을 압수한 것이 다행이었다. 자칫했다가는 연회가 와인바다가 아닌 피바다가 될 뻔했다.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와중, 뤼디거가 성큼성큼 나에게로 걸어왔다. 발밑에서 튄 와인이 그의 바짓단을 물들였다.
뤼디거가 다가올수록, 내 주변에 있던 청년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 자, 잠깐, 잠깐만요, 준장님!”
“빈터발트 준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돼.”
뤼디거는 단호하게 말하며 와인 병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제 앞에 서 있는 귀족 청년들을 내려다보는 뤼디거의 눈빛은 그대로 그들의 목을 그어 내릴 것처럼 흉흉했다.
“여, 연회장에서 폭력은……!”
“남편이 버젓이 있는 연회장에서 부인에게 치근덕거리는 건 되는 줄 아는가? 아니, 남편이 없어도 그러면 안 되지.”
“으윽……!”
귀족 청년들은 뤼디거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나로서는 오히려 그들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뤼디거의 지랄 맞은 성질머리는 블루옌의 사교계에 유명했기 때문이다.
‘저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그들의 예상이 틀렸다는 걸 깨달은 청년들은 황급히 빅토리아와 사무엘의 눈치를 보았다.
설마 왕족이, 왕궁에서 열리는 연회에서 피바람이 불도록 그저 방관하겠는가?
하지만 빅토리아와 사무엘이 뤼디거를 말릴 거라는 그들의 예상은 거하게 빗나갔다.
“준장은 못 말리지, 못 말려.”
“준장하고 엮였다가 아바마마께서 화병이 나셨었지. 아이고, 나는 젊은 나이부터 그리되기 싫다.”
이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티를 노골적으로 내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귀족 청년들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들은 뒤늦게야 하나둘 뤼디거에게 무릎 꿇고 빌기 시작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준장님! 다름이 아니라 선왕 전하께서 부득불 부탁하셔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맞습니다! 선왕 전하께서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저에겐 책임져야 하는 토끼 같은 두 여동생이 있습니다. 부디 선처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뤼디거의 측은지심을 자극하려 했지만 쓸모없는 짓이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던 빅토리아와 사무엘이 짐짓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책임 회피만큼 준장에게 먹히지 않는 변명도 없지.”
“타인의 사정 따위 제 알 바 아닌 사내가 아닌가.”
두 왕족의 말대로였다.
뤼디거는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성가시다는 듯, 그는 나직이 혀를 찼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뤼디거의 손에 저들의 명운이 달리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나는 황급히 뤼디거를 만류하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깐……. 그래서 선왕 전하께서 당신들에게 도대체 뭘 하라고 시킨 건가요?”
“마이바움 백작님께 얼굴도장을 찍고 오라고…….”
“좀 더 자세히.”
“저흰 잘 모릅니다. 사실 저도 왕궁 연회에 참석할 정도로 대단한 가문은 아닌지라……. 폐하께서 부르셔서 부리나케 달려왔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선왕이 나에게 선보이기 위해 럼가트 전역에서 긁어모은 미남들이다 이 말이었다.
가문이나 다른 조건 말고, 오로지 얼굴만 보고 데려온 미남들.
‘어쩐지, 사교계에서 못 보던 얼굴들이다 싶더라니.’
대단치 않은 가문이라는 걸 보아하니 사교계 소식에 어두운 모양이고, 그러니 뤼디거의 감당 안 되는 성격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겠지.
선왕에게 ‘남편인 빈터발트 준장은 좀 고지식해’ 정도의 설명만 들은 게 아닐까? 그러니 이렇게 겁도 없이 얼굴을 들이밀 용기를 얻은 것일 테고.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확신 어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선왕 전하께서 절 꼬시라고 하던가요?”
“무슨……!”
뤼디거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유리병이 뽀드득 위태로운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손에서 깨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나는 진정하라는 뜻을 담아 뤼디거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 나던 기이한 소음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시한폭탄 같은 뤼디거의 반응에 침을 꿀꺽 삼킨 청년은 잠시 끊어졌던 질문에 황급히 답했다.
“매, 맹세코 마이바움 백작님과 빈터발트 준장님과의 사이를 방해하란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저…….”
“그저?”
“마이바움 백작님께서 잘생긴 사내를 좋아하니 가서 아, 아양이나 열심히 떨고 오라고……. 그러다가 간택되면 인생 피는 거라고…….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청년은 수줍게 볼을 붉히며 답했다. 진심으로 자신은 우리 부부 사이를 방해할 생각이 아니었다 믿는 눈치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던 나는 못 미더운 눈으로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얼굴이 잘생긴 건 좋은데, 머리가 좀 꽃밭인 모양이네…….’
그때 내 뒤에서 빠드득 소리가 났다.
아까는 와인 병을 쥔 손에서 나는 소리더니, 이번엔 뤼디거의 이가 갈리는 소리였다.
뤼디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역시.”
“네? 뭐가 역시예요?”
“후환을 없애버려야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유디트 씨, 먼저 돌아가시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말끔히 처리하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뤼디거의 몸이 반쯤 앞으로 나섰고, 귀족 청년들의 몸은 세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나는 황급히 뤼디거를 뒤로 잡아당겼다. 저 어리숙한 젊은 청년들에게서 최대한 떼어놓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것이 마냥 그들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자, 잠깐! 뤼디거 씨! 집단 살해는 아무리 뤼디거 씨라 해도 중범죄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