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74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18화
“살해라뇨. 그저 후환의 제거입니다. 저도 군인으로서 민간인에게 함부로 흉기를 휘두르면 안 된다는 자각 정도는 있습니다. 결투라면 모를까.”
“지금 말이 앞뒤가 안 맞거든요? 그러면 손에 든 와인은 흉기가 아니면 뭐예요?”
“아, 이건 저도 모르게.”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뤼디거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린 와인 병이 바닥에 떨어지며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날카로운 소리가 다시 한 번 연회장을 울리자 귀족 청년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들이 놀란 건 예상치 못한 소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제 비게 된 그의 주먹이 다시 단단히 말아 쥐어진 탓도 있었다.
틀어쥔 뤼디거의 주먹은 크고 무시무시했으며, 그의 통나무 같은 팔뚝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뤼디거의 체구는 컸고, 더 놀라운 건 그 커다랗고 무거운 체구를 한 손으로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팔 힘과 악력이 세다는 사실이었다.
달리는 마차에 한 손으로 매달린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장총을 쏘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맞추는 사내다.
비리비리한 청년들은 그에게 한 대만 맞아도 그대로 저 멀찍이 날아갈 게 분명했다.
혹여나 뤼디거가 주먹을 치켜들까, 청년들은 그의 주먹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살피며 움찔거렸다
그리고 뤼디거가 주먹을 치켜들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황급히 뤼디거를 막아섰다.
“잠깐, 잠깐잠깐.”
나는 필사적으로 뤼디거를 달랬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저들은 아직 어리잖아요. 뭣 모르고 저지른 일에 너무 그러지 말아요.”
“어리다는 것이 전쟁터에서도 면죄부가 되어주진 않습니다.”
“여긴 전쟁터가 아니에요.”
“하지만 저들은 입대하기 충분한 나이죠. 그리 어리지도 않다, 이 말입니다.”
그들을 흘겨보는 뤼디거의 시선은 빈터발트의 숲을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차가웠다. 당장에라도 그들을 죽여버릴 것 같은 살벌함에, 귀족 청년들은 오들오들 떨다 못해 꽁꽁 얼어버린 채였다.
나는 한숨과 함께 뤼디거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뤼디거의 발은 땅에 뿌리라도 내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뤼디거는 귀족 청년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그들에게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시선만으로도 그의 의도가 충분히 느껴졌다.
“뤼디거 씨.”
나는 다시 한 번 뤼디거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못 이기는 척, 뤼디거는 슬며시 내 쪽으로 발을 옮겼다.
대충 사태가 정리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빅토리아에게 말했다.
“그럼 왕녀님, 왕자님. 저희는 일찍 가볼게요.”
“그러렴. 뒤처리는 내가 알아서 해둘게.”
“고마워요.”
나는 생긋 웃었지만, 입가에 스민 피로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나는 뤼디거를 질질 끌고 연회장 밖으로 향했다.
뤼디거는 말 잘 듣는 개처럼 순순히 나를 따라 나왔지만, 연회장을 나설 때까지도 시선은 여전히 귀족 청년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협박이라도 하듯이.
* * *
우리는 바로 타운하우스로 돌아왔다.
마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도 뤼디거의 기색은 심상치 않았다.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불편한 심기에 나는 지레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반응은 처음인데……. 그답지 않아.’
물론 선왕이 그를 두고 다른 이들을 붙여주려고 한 것이 못마땅했을 수도 있다. 평소에도 그는 질투가 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질투를 할지언정, 이런 식으로 감정적으로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는 가문의 이름 그대로인 사내였다. 아무리 겨울바람이 몰아친다 해도 숲이 송두리째 뽑히는 일은 없다. 그는 항상 침착했고, 오히려 당황하고 휘둘리는 역할은 유디트,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뤼디거는 분하고, 억울하고……. 무언가 서러워 보였다.
타운하우스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나는 뤼디거를 다독여 방으로 향했다.
“뤼디거 씨, 방으로 가요. 자, 이쪽으로…….”
딱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뤼디거의 기색에 집사와 하인들은 재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 받기 위해 다가오던 루카도 내가 눈짓하는 걸 보고는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뤼디거를 자극하지 않고 무사히 방으로 돌아온 나는 방문을 닫으며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향한 방은 원래 뤼디거와 내가 함께 쓰던 부부 침실이었다. 뤼디거가 기억을 잃고 나서는 각방을 쓰느라 현재는 뤼디거 혼자만 머무는 방이기도 했다.
뤼디거는 방 한복판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을 그득 메우고 있는 건 지독할 정도의 자기 혐오였다.
그 또한 뤼디거와는 거리가 먼 단어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보았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말을 걸어볼까.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말문이 막힌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뤼디거였다. 그새 많이 침착해졌는지, 나직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흥분감 없이 먹먹히 잠겨 있었다.
“죄송합니다. 일을 치기 전에 허락받으라 하셨는데.”
“그건……. 됐어요. 상황이 상황이었잖아요.”
나는 뤼디거를 두둔했다. 솔직히 이 정도쯤에서 끝난 것이 다행이었다.
좀 더 다행인 점을 따져보자면, 선왕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 또한 그러했다.
만약 선왕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더라면 이 정도에서 사건이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위로할 줄은 몰랐는지 뤼디거의 눈이 커졌다. 이내 나를 고요히 응시하는 그의 청회색 눈동자는 겨울 바다처럼 고여 있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뤼디거가 한참 끝에 입을 열었다.
“역시 유디트 씨는 어린 남자가 좋습니까?”
뭐?
뜬금없다 못해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 거예요?”
“유디트 씨는 어린 남자들에게 상냥하신 것 같아서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피로한 목소리로 뤼디거를 타일렀다.
“뤼디거 씨.”
“전 여전히 유디트 씨의 말을 잘 모르겠습니다. 어리다는 것을 장점으로 들고 온 놈들입니다. 그런 놈들을, 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봐주어야 하는 겁니까?”
“…….”
“그놈들은 자신의 젊음을 빌미로 유디트 씨를 유혹하려 했습니다. 저에게는…… 저에게는 없는 것이죠.”
“뤼디거 씨.”
나는 재차 뤼디거를 불렀지만, 분한 듯 씨근덕거리는 뤼디거에게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자조하는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떨리는 눈빛은 무척이나 생경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내 심장 한구석이 꽉 틀어 막혔다.
뤼디거는 돌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손을 붙들고 나를 올려보는 그의 모습은 고해성사하는 죄인처럼 절실했고 처참했다.
“저는 불안합니다. 불안하고 질투가 나요. 젊은 귀족들, 조카인 루카, 심지어 기억을 잃기 전의 저에게도 말입니다.”
내 손을 붙든 그의 손에 점점 힘이 실렸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그의 반응에 어찌 답해야 할지 알지 못한 내가 당황함만을 간신히 추스르고 있는 사이, 돌연 뤼디거의 손이 내 목 뒤를 감싸 쥐었다.
몸을 일으킨 그의 얼굴이 느릿하게 나에게로 다가왔다.
명백한 입맞춤의 시도였다.
등에 식은땀이 배었다. 그의 손이 붙잡고 있는 곳에 불이라도 붙은 듯 화끈거렸다.
지금껏 뤼디거와는 몇 번이나 되는 입맞춤을 했다. 하루에 찻잔에 입술을 대는 것보다도 더 자주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쳤다. 우리는 서로가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였고, 그것은 무척 당연한 행위였다. 남들이 보는 건 좀 부끄러웠지만.
하지만 기억을 잃은 그와는 이런 종류의 성애적 접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왠지 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페르세포네가 석류 한 알을 먹고 지옥에 붙들린 것처럼, 내가 그에게 입을 맞추면 뤼디거의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불길한 망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끌어안는 것 정도가 나의 최선이었다.
멍하니 생각을 곱씹는 사이 그의 입술이 어느덧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다. 떨리는 숨결이 내 입술을 간지럽혔다.
입술이 겹쳐지기 바로 직전의 그 순간, 나는 결국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의 입술을 피해버렸다.
순간 뤼디거는 상처받은 것이 역력한 낯을 지었다.
“뤼디거 씨, 방금은 그저…….”
뒤늦게 아차 한 내가 변명하려 했지만 발에 짓밟힌 꽃처럼 고개를 떨군 그와 마주하니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뤼디거는 처참함을 삼키며 처연히 읊조렸다.
“당신은 저를 사랑한다 했지만 저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
뤼디거가 이런 반응인 것도 당연하다.
나는 스스로의 경솔함을 탓했다. 만약 내가 뤼디거의 입장이었더라도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가 태연해 보인다 하여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뤼디거의 마음은 한 번 할퀴어진 뒤였다.
“당신은 저에게 무척 상냥하고 항상 제 곁에 있지만……. 저에게 거리를 둡니다. 아까처럼 제 입술을, 그리고 제 손길을 피하죠.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유디트 씨……. 지금의 저는,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내인 겁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단지 당신이 혼란스러울까 봐…….”
“전혀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저는 이대로 살아도 상관없어요!”
뤼디거가 발악하듯 외쳤다.
그의 손이 내 팔뚝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마치 자신이 털어놓는 속내에 내가 지레 질색하며 도망칠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