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7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20화
기억을 잃었던 뤼디거는 나에게 제 외모가 먹힌다고는 생각도 못 한 채 마냥 불안해하며 내가 손을 내밀어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제 외모가 나에게 먹힌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덩치 큰 흑표범 같은 사내가 새끼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애교로 나를 꾀는 것이겠지.
벼린 칼날처럼 투명하고 날카로운 눈동자를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 웃으며 나에게 매달리는 뤼디거의 잘생긴 얼굴을 본 순간, 무언가의 충동이 나를 흔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역시 저는 당신을 외모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뤼디거가 펄쩍 뛰었다.
내 가슴팍에 들이밀던 고개를 번쩍 치켜든 그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는 듯 두 눈을 홉뜬 채였다. 뤼디거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제 외모에 질리신 겁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과 동시에 흘러나온 말인지라 조금 두서없었다.
어떻게 해야 뤼디거를 상처 입히지 않고 내 뜻을 전할 수 있을지 잠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바닥을 더듬 듯 조심스레, 그리고 나직이 운을 떼었다.
“당신 외모만 좋았다면 당신 기억을 되찾게 하려고 그렇게 동분서주하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나와 유대감을 쌓은 당신을 좋아하는 거죠.”
추억은 타인과 타인으로 만나 생긴 틈을 켜켜이 메꿔주는 매개체였다. 추억이 많을수록, 그 결속력은 단단해진다.
뤼디거와 함께해 온 수많은 추억. 그것은 뤼디거가 선물한 그 어떤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가장 값비싼 보석이었다.
나는 뤼디거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수척해진 뺨과 깊은 눈매는 오히려 고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그러니까, 당신 외모만을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뤼디거 씨, 당신을 좋아하는 거지. 그러니까 인제 그만 좀 불안해해요.”
뤼디거는 자신의 얼굴이 나에게 먹힌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그와 별개로, 혹여나 내 관심이 사라질까 예민하게 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나는 시종일관 안달복달하는 뤼디거의 뺨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이걸로 뤼디거도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저 말만으로 마음을 다잡기엔, 뤼디거의 불안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면 기억을 잃은 저는 별로였습니까?”
난 쓰게 웃었다. 또 다른 걱정거리를 끄집어낸 뤼디거의 눈이 데굴데굴 구르며 내 눈치를 보았다.
“물론 기억을 잃은 당신도 결국은 당신이니까 좋았어요. 다른 그 어떤 남자를 가져다 대도 비교가 안 된다니까요. 당신이 기억을 못 찾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결국 우리 사이에는 추억이 쌓일 테고, 그대로 당신을 또다시 사랑하게 되었을 거예요.”
이 이상의 확신이 없을 정도로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확답에 뤼디거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기억을 잃은 자신을 싫어하는 건 못마땅하지만, 그렇다 해서 기억을 잃은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불유쾌한 모양이다.
“기쁘면서도 기쁘지 않군요.”
“제가 살다 살다 자기 자신에게도 질투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저 자신이라고는 하지만 기억을 잃은 터라 왠지 타인 같단 말입니다.”
뤼디거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참나. 그러면 기억을 잃은 자기가 별로였냐 묻지나 말든가.
하여튼 알 수 없는 감성이다. 나라면 좋을 것 같은데. 아닌가?
나는 내가 돌연 기억을 잃어 루카를 미워하고 괴롭혔던 시절로 돌아가고, 뤼디거가 그런 나를 좋아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음…….”
이내 침중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기분이 나쁘진 않은데, 미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다. 마냥 반기고 싶은 상황은 아니다.
뤼디거에게 공감해 버린 나는 아까보다 좀 더 누그러진 목소리로 뤼디거를 다독였다.
“뭐, 싫으면 앞으로는 기억을 잃을 일을 없게 하면 되죠.”
“네. 앞으로는 이렇게 기억을 잃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뤼디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과연 다짐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이 시점에서 그 사실을 지적하여 분위기를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뤼디거의 목에 손을 감았다.
“좋아요……. 그러면 우리, 하던 일을 마저 해볼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뤼디거 또한 마주 웃었다. 그의 몸이 내 위로 드리웠다.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가 촘촘히 겹쳐졌다.
외전4 루카 마이바움
눈을 뜬 루카 빈터발트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에 때가 끼어 꼬질꼬질했지만, 아이의 손답게 여리기 짝이 없다.
지옥의 밑바닥부터 닥닥 긁어 기어오르느라 단단하게 못이 박인 자신의 손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그런 손이었다.
게다가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의 낡은 저택.
아주 먼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던, 마이바움 가의 저택이었다.
그제야 루카는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한참을 혼란스러워한 끝에, 루카는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소원의 잔에 읊조린 한탄이 소원으로 인식된 걸까……. 구시대의 유물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소원을 들어주는 성물이었단 말이야? 하지만 내가 빈 소원은 과거로 돌아오는 것 따위가 아니었는데.’
루카는 그저 행복해지고 싶다는 자조 어린 탄식을 내뱉었을 뿐이다.
복수만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달린 탓일까, 전부 마모되어 주변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인생을 한탄하는, 그런 탄식.
‘소원의 잔은 과거로 돌아오는 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건가? 하……. 웃기지도 않는군.’
루카는 자조 어린 웃음을 지었다. 그가 걸어온 인생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인생을 사는 것은 그저 괴로운 일을 반복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놓친 기회, 자신을 두고 죽어간 사람들. 그 모든 것을 다시 틀어잡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로써 빈터발트에 드리운 암운이라는 원죄를 갚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빈터발트는 루카, 자신 때문에 핏줄이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자신의 부친인 요나스가 빈터발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빈터발트의 정통 핏줄은 전부 흙에 묻힌 뒤였다.
‘애초에 삼촌이 날 위해 죽을 필요도 없었는데.’
뤼디거는 빈터발트의 핏줄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목숨을 내던졌다. 애초에 그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뤼디거가 루카를 대신해 희생하던 당시를 떠올리니 무력함이 루카를 잠식했다. 숨이 틀어 막혔던 루카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제는 그리 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엔 결코……. 루카의 푸른 눈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그러고 보니 이모……. 이모도 아직 살아 있겠군.’
루카는 저에게 항시 못되게 굴었던 이모를 떠올렸다.
예전에는 그리도 증오스러웠던 이모였다. 하지만 이모가 자신을 미워하는 이유가 죽은 제 모친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지금은, 알 수 없는 감정이 루카의 마음 속을 뒤흔들고 있었다.
게다가 유디트는 루카에게 있어 피가 통한 유일한 가족이었다.
‘처음 삼촌이 나를 데리러 왔을 때는 새 가족이 생기니 이제 이모 따윈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루카는 자조했다.
결국 루카에게는 유디트뿐이었다. 가족이라는 것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유일한 혈육에 대해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아니다.
루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은 생각보다 가족과 혈육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기에 신 포도처럼 필요 없다 되뇔 뿐이었지.
‘지금 나는 대충 열 살쯤……. 아마 곧 삼촌, 아니, 아저씨가 찾아오겠지.’
루카는 도무지 뤼디거를 삼촌이라 부를 염치가 없었다.
그는 나의 가족이 아니다. 애초부터 선을 그어놔야 이전처럼 나를 구하고 죽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루카는 입안을 지그시 깨물었다. 생각만 해도 복장이 뒤집히는 과거를 이제는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손끝이 긴장으로 차게 식었다.
‘아저씨가 찾아오기 전까지 좀 더 계획을 세우자. 예전처럼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이라면 이모의 싸늘하고도 매정한 잔소리도 기꺼이 웃으며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 뾰족한 목소리가 그리웠다.
루카는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곧이어 쏟아질 잔소리를 기대하며 단단히 닫힌 방문을 열어 재꼈다.
* * *
루카는 유디트의 잔소리를 예상했지만, 막상 당면한 상황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유디트가 방 안에 틀어박혀서 두문불출한 것이었다.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흘끔 상황을 보니, 침대에 누워 있거나 방 안을 서성거리기만을 반복했다. 가끔은 제 얼굴을 매만지며 홀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말도 안 돼…….”
‘뭐지? 예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나?’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이는 유디트의 모습에 루카는 의아했다. 유디트의 이런 행동은 기억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디트는 멀끔한 낯을 띤 채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은 가신 채였다.
하지만 예상 밖의 상황은 여전히 이어졌다.
바로 유디트가 루카에게 사근사근한 척 관심을 보인 것이다.
루카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어쩌면 이 세계 자체가 자신이 겪은 과거와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위험 부담이 커지는 것이다.
위험의 결과가 제 죽음이라면 차라리 낫다. 만약 또다시 주변 사람이 죽는다면…….
‘차라리 이대로 가출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