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78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외전 22화
“……그렇게 되면 이모가 진짜 제 엄마가 되는 건데요? 아저씨 형이랑 얽히게 된다고요. 그래도 괜찮아요?”
루카는 공격적으로 쏘아붙였다. 뤼디거가 겉으로나마 유디트에게 잘 보이려 애썼던 것을 꼬집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뤼디거는 되레 알 수 없다는 듯 의아히 물었다.
“형의 여자인 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딱 잘라 말하는 뤼디거의 태도에 루카의 당황은 더욱 깊어져 갔다.
그럼 지금껏 이모에게 치근덕거렸던 건 다 뭐야? 이모를 꼬시려 했던 게 아니었단 말이야?
유디트의 앞에서 이렇게나 당당히 상관없다 말하다니…….
역시 저 사람의 속내는 평생 아는 일이 없을 것이다. 루카의 입술이 비스듬히 비틀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루카 때문에 유디트가 위험해졌다며 루카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루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뤼디거의 말은 사실이었기에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제 편을 들어줄 이가 아무도 없는 기차 객실 안에서 루카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홀로 상념에 빠져 들었다.
처음에는 유디트가 상냥해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유디트는…….
아마 이대로 두면 이모는 몇 번이고 자신을 감싸고, 위험한 곳에 몸을 내던질 것이다.
그러다 죽을 수도.
과거에 루카는 유디트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프란츠를 통해 넌지시 전해 들은 내용이 전부였다.
네 이모는 어리석은 데다 주제도 모르는 여자라고. 빈터발트를 진심으로 고꾸라트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고.
프란츠의 비웃음이 루카의 귀에 윙윙거렸다. 루카의 이가 바득 갈렸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그건 다짐이라기보다 맹세에 가까운 각오였다.
‘이번에도 이모가 죽게 된다면 나는 평생 행복해지지 못할 거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선 이모가 어떻게든 살아야만 해.’
이모를 지키기 위해 차라리 자신이 빈터발트의 피를 잇지 않았다는 출생의 비밀을 밝히고 빈터발트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몰랐다.
애초에 빈터발트를 이을 생각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루카에게는 빈터발트에게 진 빚이 있었다. 과거 그를 위해 빈터발트 가의 모든 이들이 죽은 것에 대해 그는 보답해야만 했다.
루카는 이 자신만만하고 독선적인 빈터발트 가에 드리운 거미줄을 제거해 주는 것으로 그 빚을 갚고자 했다.
프란츠를 처리하기 위해선 빈터발트의 후계자라는 위치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자신의 출생을 밝힐 수가 없다…….
루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짓눌렀다. 어떻게 해야 유디트를 완벽히 지킬 수 있을까.
이전에는 유디트를 감시하기 위해 시야에 둘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그녀가 시야에 없으면 또 무슨 일을 당할까 봐 불안해졌다. 본말전도였다.
그녀를 지키고자 하는 바람이 커지니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이 유디트 마이바움이라는 여자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은근히 고집도 세고 말도 안 듣는단 말이지. 내 일에 훼방도 많이 놓고, 사고도 많이 치고…….’
루카는 혀를 찼다. 자신이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은 티를 풀풀 흘리는데도 꿋꿋이 열 살 어린애 취급하는 것부터가 그녀의 고집의 방증이었다.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루카는 눈을 빛냈다. 이미 한 번 겪어낸 일이니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과거와 현실이 다르게 흘러가도 과거에 얻은 경험까지 무마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해결한 뒤, 최후에는 빈터발트의 굴레를 벗어던지고야 말 것이다.
이번 생만큼은 루카 빈터발트가 아닌 루카 마이바움으로 죽기를.
비혼주의자인 뤼디거는 왕족과 결혼하기가 싫어 루카가 빈터발트를 잇기를 절실히 바랄 테지만…….
‘비혼주의자든 뭐든, 내 알바 아니지.’
루카는 코웃음을 쳤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단호해질 필요가 있었다.
‘일단 프란츠, 그 새끼부터 빨리 처리해야겠군. 혈통의 정리는 그다음부터야.’
루카의 푸른 눈이 겨울 호수처럼 빛났다. 지금은 차게 얼어붙었지만, 봄이 되는 그 순간 찬란한 반짝임과 함께 하늘을 그대로 옮겨 담게 될 것이다.
행복.
루카가 소원의 잔에 빈 소원은 분명히 행복이었다.
외전5 10년 후
수도 블루옌에 있는 빈터발트의 타운하우스 로비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유디트와 뤼디거가 결혼하던 당시, 가족사진이라는 명목하에 그려진 초상화였다.
그 앞에 한 소녀가 골몰한 채 우뚝 서 있었다. 여섯 살쯤 되었을까. 자못 심각한 듯 미간을 찌푸린 소녀의 연보라색 눈동자는 초상화에 고정된 채였다.
“루도비카.”
그런 소녀에게 한 청년이 말을 걸었다. 금빛 고수머리를 우아하게 다듬은 미청년. 아름다움을 넘어 성화 속에서 빠져나온 듯 성스럽기까지 한 그는 바로 이제 스물세 살이 된 루카 마이바움이었다.
루카는 성큼성큼 루도비카라 부른 소녀에게 다가갔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봐?”
“이 그림, 엄마랑 아빠랑 오빠지?”
“그렇지.”
루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소녀는 바로 빈터발트의 후계자이자 유디트와 뤼디거의 외동딸, 루카의 유일한 사촌 동생인 루도비카 빈터발트였다.
루도비카는 아빠를 닮은 검은 머리카락과 엄마를 닮은 연보라색 눈동자를 지니고 태어났다.
아직도 정정한 선왕이 루도비카가 태어나고 얼마나 신이 났는지는 구태여 말할 것도 없었다. 소피아 또한 마찬가지였고.
루도비카가 태어나고 나서야 선왕은 유디트에게 새 남자를 붙이는 걸 포기했다. 루도비카를 보고 있다 보니 빈터발트의 칙칙한 검은 머리카락도 봐줄 만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빈터발트와 왕가의 어르신들이 모두 그들의 새 공주님의 이름을 짓고 싶어 안달이 났다. 아빠인 뤼디거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루카 또한 삼촌이라는 권리를 휘두르며 참전했을 정도였다.
어찌나 경쟁이 치열했는지 럼가트 전역이 들썩였다.
평소의 유디트였다면 어색하게 웃으며 사이를 중재하려 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단호하게 아이의 이름을 제가 짓겠다 나섰다.
어머니인 유디트를 이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아이는 루도비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왜 그 이름을 주장했느냐, 꼭 그 이름이어야 할 이유가 있느냐 선왕이 넌지시 물었다. 자기 주장을 하는 이가 드문 유디트였다 보니 모두가 그 사실을 궁금해 했다.
유디트는 조금 쑥스러운 듯 답했다.
‘루카의 이름에서 따왔어요. 루카는 마이바움이었고 루도비카는 빈터발트로 서로 성이 다르지만, 둘 사이에 무언가 이어지는 증표를 주고 싶어서……. 우린 가족이니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 루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말았다. 감동이라 해야 할지. 목 끝까지 벅차오른 무언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때의 일은 6년이 지난 지금도 놀림거리였다.
하여튼 그런 이유에서일까. 루카는 이 어린 꼬맹이가 유난히 귀여웠다.
루도비카는 아직도 못마땅한 게 있는지, 볼멘 표정을 풀지 않았다. 루도비카가 툭 하니 말했다.
“왜 난 여기 없어?”
“넌 그때 없었으니까.”
“내가 없었어도 그려줬어야지.”
“야, 네가 없는데 널 어떻게 알고 그려?”
말도 안 되는 우기기에 루카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하지만 되레 루도비카는 성을 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오빠 맨날 이거 할 줄 안다 저거 할 줄 안다 아는 척하더니, 그런 것도 몰랐어?”
혈압이 오른 루카는 타는 속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어려서 그런 걸까. 아니, 나 어렸을 땐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유디트가 들었다면 네가 더 심했다며 기가 찬 표정을 지었겠지만, 이곳에 유디트는 없었다.
루도비카에게 한 방 먹고만 있을 수는 없다. 열 살 때는 스물일곱인 이모와 맞먹었던 루카는 스물셋이 된 지금, 여섯 살인 사촌 동생과 맞먹을 생각 만만이었다. 그렇게 나잇값 못하는 루카는 실실 웃으며 루도비카를 골렸다.
“그때 네가 있었어도 그림에 못 들어갔을걸.”
“왜?”
“그림 모델이 되는 것도 엄청 힘들거든. 꼼짝도 하지 않고 몇 시간 동안 있어야 하는데, 너 할 수 있어? 너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하잖아.”
“끙.”
루도비카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운동이 취미인 유디트와 신체 능력이 뛰어난 뤼디거의 피를 이어서인지, 루도비카는 가만히 있는 걸 싫어했다.
그런 루도비카를 보며 루카는 킥킥 웃었다.
“아, 넌 어떻게 네 엄마랑 그렇게 똑같냐.”
“엄마 딸이니까 당연하지.”
루도비카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니 할 말이 없어지는 쪽은 루카였다.
“하……. 그래. 네 아빠만 닮지 마라.”
“루카 오빠는 맨날 나한테 뭐라 그래.”
“내가 오빠 아니라고 했지! 삼촌이라고 불러.”
“삼촌은 무슨. 나 이제 촌수 배웠거든? 루카 오빠는 사촌이거든?”
루도비카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루카는 루도비카에게 오빠 소리를 듣는 게 그렇게 어색했다.
루카에게 있어 유디트는 이모보다 누나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더 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뤼디거 또한 마찬가지고. 둘 다 루카에게 있어 보호자라기보다는 뒷수습을 해줄 대상에 가까웠다.
루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이고. 됐다. 사진이나 찍자. 오늘 날씨 좋더라.”
“싫어!”
사진 소리가 나오자 루도비카는 냅다 달음박질을 쳤다. 루도비카는 사진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루카가 찍는 사진을.
루카가 억울한 듯 외쳤다.
“왜, 내가 예쁘게 찍어준다니까. 눈 한 번 깜빡이면 쑥쑥 자랄 때라 사진 자주 찍어놔야 해.”
“오빠는 사진 한 번만 찍은 적이 없잖아! 싫어!”
그리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루카는 저 멀리 복도로 쌩하니 달려가는 루도비카를 보며 아쉬운 듯 혀를 찼다.
로비에서 일어난 소란을 들은 것일까, 루도비카가 달아난 반대쪽 복도에서 유디트가 나직이 웃으며 걸어왔다.
“왜. 루카 너 또 루도비카한테 사진 찍자 그랬지?”
“쟤는 왜 그렇게 사진 찍는 걸 싫어하지?”
루카는 천사 같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혀를 찼다. 사교계의 모든 이들이 추앙해 마지않는 미모였지만, 이모인 유디트에게는 짓궂은 조카일 뿐이었다. 유디트는 담담히 대꾸했다.
“너도 초상화 그리는 거 싫어했잖아. 기어코 사진기를 발명했을 정도로.”
결혼식 전에 초상화를 그리며 유디트가 저도 모르게 흘린 말을 기억한 루카는 나중에 꼬치꼬치 사진기의 원리에 대해 캐물었다.
고등학교 수준의 간단한 지식밖에 없었던 유디트가 더듬더듬 설명하는 것을 가만히 듣더니, 이내 과학자들을 모아두고 사진기 발명을 명령했다.
유디트가 알고 있던 것은 정말 기본적인 사진기의 원리뿐이었다. 하지만 똑똑한 머리 여럿이 모였겠다, 목표도 확실하겠다, 기본 원리까지 알게 되니 사진기 발명 속도에 박차가 가해졌다.
그렇게 루카는 기어코 사진기를 발명해 냈다.
처음에는 흑백 사진기일 뿐이었던지라 여전히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는 사실에 루카는 암담해했다.
하지만 발명은 계속되었고, 그 끝에 칼라를 넘어 언제든지 들고 다닐 수 있는 간편한 사진기가 만들어졌다.
유디트는 사진기가 발명된 이유가 바로 초상화 그리기가 싫었던 루카 마이바움 경의 후원 때문이라면 훗날 사람들이 엄청나게 웃을 거라며 어처구니없어 했지만, 루카로서는 마냥 뿌듯할 뿐이었다.
유디트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루카 너는 초상화 귀찮다고 하더니, 애가 사진기 귀찮아하는 건 들은 척도 안 하니.”
“사진기랑 초상화는 다르잖아!”
루카는 당당했다. 그런 루카를 바라보는 유디트의 눈빛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심리가 뚜렷이 드러났지만, 그 또한 루카가 알 바 아니었다.
“됐어. 루도비카는 도망쳤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그래.”
“그러면 아쉬운 대로 이모라도 찍어야지, 뭐.”
“앗, 나도 갑자기 할 일이.”
루카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유디트는 바로 쌩하니 달아났다.
유디트 또한 사진은 질색이었다. 루카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집요할 정도로 사람을 붙들어놨다.
하지만 이미 한 명의 피사체를 놓친 루카가 호락호락 유디트를 놓아줄 리 없었다. 루카는 유디트의 뒤를 바싹 쫓으며 말했다.
“아, 좀 찍혀줘!”
“뤼디거, 뤼디거 씨한테 가!”
“그 인간을 찍어서 뭐 하라고!”
스물셋이 되어 유디트보다도 훌쩍 큰 루카의 보폭은 컸다. 루카는 금세 유디트를 따라잡았다.
그렇게 유디트와 루카는 투덕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행복한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