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80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 외전 2화
적당히 쉬었다 싶었던 내가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뤼디거가 재빨리 슬리퍼를 대령했다. 나는 보들보들한 슬리퍼에 맨발을 꿰며 한숨지었다.
“역시 뤼디거 씨가 빈터발트 올라올 때 저도 같이 따라올 걸 그랬나 봐요.”
“그런 뜻에서 건넨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빈터발트는 확실히 춥습니다. 유디트 씨가 좋아하는 운동도 하기가 쉽지 않죠. 유디트 씨의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
시무룩하게 말하는 덩치 큰 뤼디거의 모습에 괜스레 유쾌해진 나는 깔깔 웃으며 뤼디거의 깎아낸 듯 날카로운 콧대 끝을 야무지게 잡아 흔들었다.
“제 즐거움은 여기 있는걸요.”
그러자 내 손이 닿은 코끝에서부터 양 뺨이 벌그레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뤼디거의 목을 깍지 낀 손으로 끌어당기며 소파에 다시 누웠다. 내 막무가내나 다름없는 행동에 뤼디거의 몸이 내 위로 엎어지다시피 하였다.
나는 뤼디거를 향해 빙긋이 미소 지은 채 졸랐다.
“그러니 아까 못한 입맞춤이나 해줘요.”
“제 인생에 있어 제가 인내심이 짧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말입니다.”
뤼디거는 입안이 버석 말랐는지 혀로 아랫입술을 날름 핥았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가 열기를 품은 유리 호롱처럼 빛났다.
그는 내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는, 꽉 죄인 목깃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코오롱 냄새가 풍겨왔다.
숨통이 트였음에도 여전히 그는 초조해 보였다. 그는 소파 위로 옮겨 앉아 나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탄식했다.
“당신은 횃불 같아요. 단단한 밀랍 초 같던 제 인내심을 단숨에 전부 녹여 없애버리는군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샐쭉이 웃었다.
왼발 슬리퍼는 그새 어디로 갔는지 사라진 뒤였다. 나는 발가락으로 뤼디거의 종아리를 간지럽히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전 오래 가는 쪽도 나쁘지 않은데.”
“그건 걱정 마십시오.”
뤼디거의 몸이 내 쪽을 향해 좀 더 가까이 기울어졌다.
“빈터발트의 밤은 깁니다. 오랫동안 탈 수 있게, 빈터발트의 초는 끈질기지요.”
뤼디거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내 입술에 닿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허리춤을 휘어 감았다. 아직 찬기가 가시지 않은 살갗에 온기가 퍼지며 전해지는 간지러운 느낌에 나는 까르륵 웃었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소파를 비추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두 개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 * *
푹신한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뤼디거가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매만졌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간질간질한 그 느낌을 즐겼다. 조금 성가신 것 같기도 했다.
계속해서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뤼디거가 갑작스레 툭 말을 건넸다.
“유디트 씨의 취미 말입니다.”
“저 더는 못 해요.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어요.”
“그것도 취미로 끼워주는 겁니까?”
뤼디거가 나직이 웃으며 물었다. 괜히 어림짐작해서 헛발질한 게 부끄러웠던 나는 되레 뻔뻔스레 주장했다.
“시간 남을 때 별다른 목적 없이 하는 즐거운 행위를 보통 취미라고 한답니다.”
“유디트 씨가 즐거우셨다니 뿌듯하군요. 허나 아쉽게도 그 취미 말고 운동 말입니다.”
아까, 소파에서 잠시 끊겼던 대화를 잇고자 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운동은 왜요?”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결연히 각오한 듯한 목소리에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뤼디거를 바라보았다. 벽난로의 불빛이 드리운 그의 표정이 퍽 진지하였다.
“유디트 씨가 편히 운동하기엔 빈터발트가 너무 춥지 않습니까.”
“뭐, 추운 나라에는 추운 나라의 운동이 있으니까요. 그런 것도 나름…….”
뤼디거가 계속 빈터발트의 추위를 단점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나는 서둘러 빈터발트의 좋은 점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뤼디거의 말이 나보다 빨랐다.
“그래서 유디트 씨가 운동할 만한 실내 공간을 만드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또 또. 이 남자 또 급발진한다!
나에 관한 일이라면 자제가 없는 남자이니 내가 적당히 고삐를 쥐어야 한다는 사실은 항상 주지하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순간 혹해버렸다.
실내 운동장이라니! 그것도 나만을 위한!
구미가 당긴 나는 뤼디거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물었다.
“운동하려면 공간도 넓고 천장도 높아야 하는데……. 생각보다 큰 공사가 되지 않을까요?”
“남는 게 땅입니다. 유디트 씨께서 시간 되시는 대로 터를 한 번 살펴보시고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시면, 제가 바로 공사에 착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건 공작님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아요?”
“어차피 근시일 내에 저에게 작위를 물려주시려고 이를 갈고 계시는데, 제가 미리 월권한다고 뭐라고 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뤼디거는 자못 당당했다.
뤼디거와 알게 된 지도 몇 년. 탱탱볼 같던 그의 사고방식도 이제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보아하니 그는 지금 내게 실내 운동장을 만들어주고자 하는 욕구로 가득 찬 상태였다. 이 상태를 자제시키거나 그대로 방치한다면, 잠깐 깜빡한 사이에 무언가 어마어마한 걸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그나마 예전에는 물어보지도 않고 사고를 쳤다면, 이제는 내 취향을 고려하기 위해 먼저 말을 건네는 정도로 발전했다는 게 다행일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개입하기로 했다. 어차피 만들어질 실내 운동장이라면 내 취향대로 만드는 게 좋지. 나는 뤼디거의 뺨에 입을 맞추며 답했다.
“좋아요. 그러면 내일 저택 근처를 좀 둘러볼게요.”
* * *
실내 운동장이 있을 곳은 저택에서 너무 멀어도 곤란했고, 그렇다 하여 너무 붙어 있는 것 또한 그러했다.
전자는 오가는 길이 고되기 때문이고, 후자는 소음 때문이었다.
옷을 단단히 차려입은 나는 업무하느라 바쁜 뤼디거 대신 루카와 함께 빈터발트 저택 근처를 둘러보기로 했다.
로라도 같이 가겠다고 하였으나, 그쪽도 어머니와 근 일 년 만에 만나는 것이니만큼 회포를 풀고 있으라 하였다.
나는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뽀득뽀득 눈을 밟았다.
“그러고 보니 저택 밖을 이렇게 둘러보는 건 또 처음이네.”
“처음 왔을 땐 마음껏 돌아다닐 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그 뒤로는 날씨가 영 아니었으니까.”
보풀이 일어난 아이보리색 목도리를 칭칭 감은 루카가 심드렁히 답했다.
뤼디거와 결혼한 뒤로 근 몇 년간 폭설이 꽤 심했던 탓에, 대부분 저택에서만 머물곤 했었다. 창밖으로 몰아치는 하얀 태풍을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절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요 며칠은 좀 잠잠해서 다행이야. 그런데 부지를 정한다고 해서 바로 작업 들어가지는 않겠지? 그래도 겨울인데. 작업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잖아.”
“공사는 봄이 되면 들어가지 않을까? 빈센트한테 맡겨두면 내년 돌아오기 전까지 완벽하게 끝내둘 거야.”
루카와 나는 도란도란 수다를 떨며 저택 근처를 살폈다. 뤼디거와 루카와 함께 처음으로 캐치볼 했던 곳을 지나 조금 더 깊숙이 들어선 내 시선 끝에 무언가가 잡혔다.
나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내가 갑자기 발걸음을 틀자, 루카가 종종 따라붙으며 물었다.
“왜?”
“저기에 뭔가 있는 거 같아서.”
그리 오래지 않아 우리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뭔가 했더니 다 쓰러져 가는 철제 골조였다. 거뭇거뭇한 것을 보니 화재가 있었던 듯싶었다. 빈터발트 공작가 저택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흉물이었다.
루카는 나보다 한발 먼저 터에 발을 내디뎠다. 별문제 없는지 먼저 둘러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아.”
“네, 보호자님.”
나는 놀리듯 말끝을 늘였다. 루카도 자기가 과했다는 걸 인정하는지 휙 고개를 돌리며 툴툴거렸다.
“이모가 하도 덤벙거리니까 그러지. 이런 데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삼촌이 나한테 뭐라고 할걸.”
“두 사람 다 잊고 있는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이모는 걸음마를 뗀 지 거의 삼십 년이 되어 간단다. 놀랍게도 뜀박질을 뗀 지도 그 정도 되지.”
“신기하단 말이지. 그 경력쯤 되면 좀 잘 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야.”
루카와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으며 나는 이제는 흔적밖에 남지 않은 공간을 둘러보았다.
검게 그을리고 녹이 슨 철제 골조와 뿌옇게 흐려진 유리 조각……. 전소된 흔적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세공의 잔해들이 화려했을 그 시절을 짐작케 하였다.
구석에 쭈그려 앉아 뒤적거리던 루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온실이었나……?”
“빈터발트에 온실도 있어? 하긴 어느 정도 자급자족하려면야…….”
“농작물을 심은 온실 같진 않고, 꽃을 심었던 모양인데.”
“꽃? 하지만…….”
나는 말을 흐렸다. 빈터발트에서 꽃은 정말 귀했다. 여름쯤 돼서야 잠깐 고개를 내밀다 사라지는 동백 정도를 보았을까.
만찬의 센터피스도 꽃이 아닌 보석으로 치장한 조화를 쓸 정도였다. 아니면 아예 보석을 깎아 만든 꽃이거나.
물론 이건 빈터발트가 특이한 경우다. 다른 귀족들이라면 따로 꽃을 키우는 온실이 있을 테니까. 하다못해 버켄레이스가만 해도 그러했다. 프란츠가 수작을 부리며 가져다준 꽃다발이 바로 자기네 집 온실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꽃을 기르는 일은 보통 안사람이 도맡는 편이었다. 내가 아는 소피아는 꽃을 기르는 것에 영 취미가 없어 보였고.
“선대 공작 부인께서 쓰시던 곳인 걸까? 그래도 그렇지. 왜 이걸 그냥 이대로 뒀지? 보기 안 좋게.”
“그러게. 삼촌이나 할아버지였다면 진즉 밀어버렸을 텐데.”
그래도 선대 공작 부인이면 뤼디거에겐 할머니, 막시밀리안에게는 모친 되는 분이다. 당연히 그 흔적을 선뜻 밀어버리기엔 조금 고민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이내 도리질 쳤다. 내가 빈터발트에게 너무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감수성을 기대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역시 빈터발트의 사고에 익숙해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