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81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 외전 3화
루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무릎에 묻은 흙을 털었다.
“여기가 딱이기는 하다. 적당히 거리도 있고, 이미 다져놓은 지반이 있으니 벌목할 필요도 없고.”
“하지만 정말 괜찮을까? 회귀 전에 뭐 들었던 정보 같은 거 없어?”
“회귀가 만능 지식 창고는 아니라서. 생각해 봐. 내가 빈터발트 저택의 역사 같은 걸 하나하나 꿰고 있을 시간이 있었겠어?”
“아니.”
나는 머쓱히 입을 다물었다.
회귀 전의 루카는 귀족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머릿속에 쑤셔 넣느라 바빠 저택 주변을 꼼꼼히 둘러볼 여유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뤼디거가 루카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설명해 줄 성격도 아니었을 테고.
그 뒤로는 프란츠의 눈을 피해 빈민가에서 한참을 숨어 있다가, 간신히 프란츠를 몰아내고 저택에 입성한 뒤 소원의 잔과 함께 회귀하였으니 옛적에 전소된 온실의 존재 같은 건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내가 무신경했던 스스로의 발언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후회하는 것과 달리, 루카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심드렁히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말이나 한번 해보자고. 선대의 유산이라 안 되면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하겠지.”
“그것도 그래.”
전소된 온실을 선대 공작 부인의 것으로 결론 내린 우리는 저택으로 되돌아왔다.
저택의 로비에 들어서며 하인들에게 목도리와 장갑, 외투를 벗어 건네는 찰나, 때마침 계단에서 내려오던 소피아와 맞닥트렸다.
“네 취미 때문에 건물을 하나 짓기로 했다지? 괜찮은 장소는 찾았니?”
“고민 중이에요.”
“왜? 별로 마땅한 곳이 없니? 그런 거라면…….”
“그건 아니고, 저택 뒤쪽에 건물터가 있던데……. 거기를 써도 되는지 모르겠어서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소피아는 전혀 짐작 가지 않는다는 듯 가는 눈썹을 찡그렸다.
“저택 뒤?”
“네. 불에 탄 흔적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데…….”
“아아.”
내가 설명하기가 무섭게 소피아가 생각났다는 듯 나직이 탄식했다. 그녀의 눈 초점이 먼 옛일을 회상하듯 멀어졌다.
뭔가 얽힌 게 있다.
사연이 있는 장소라면 굳이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까 봐 걱정된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다른 곳도 봐둔 데가 있어요. 저택 부지가 원체 넓으니까……. 천천히 둘러보고 고르려고요.”
“아니야. 그냥 그곳으로 하렴.”
“하지만.”
“내가 예전에 쓰던 온실이야.”
그 온실 주인이 선대 공작 부인이 아니라 소피아였다고?
당연히 소피아는 아닐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만큼 어안이 벙벙했다. 루카 또한 당황스러운 건 나와 마찬가지인지 얼빠진 표정이었다.
소피아는 창백한 뺨을 손으로 감싸 쥔 채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흉물을 잘도 오랫동안 내버려 뒀구나. 하여간 그 인간도 어지간하다니까……. 내가 기억해서 말하지 않으면 건들지도 않을 생각이었겠지.”
“하하…….”
시어머니가 시아버지를 욕하는 것에는 그저 어색하게 웃는 게 최고였다.
온실의 주인이 소피아였다고 하자, 온실이 그 처참한 상태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막시밀리안과 뤼디거가 닮은 꼴이라는 걸 생각하니 더더욱.
아마 막시밀리안으로서는 한때나마 소피아의 손이 닿은 곳이니 그대로 박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피아는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곳에 불이 난 지도 벌써 이십여 년이 지났는데……. 네가 그곳을 쓰지 않더라도 치우라고는 해야겠다. 뤼디거에게 공작위를 물려주면서 그런 흉물까지 떠맡길 수는 없지.”
소피아는 진절머리가 났는지 고개를 작게 흔들더니, 이내 계단을 도로 밟아 올라갔다. 향하는 방향을 보아하니 막시밀리안의 서재가 있는 곳이었다. 아마 한 소리 할 모양인 듯싶었다.
나는 루카와 멍하니 소피아의 등 뒤를 보았다가, 짜기라도 한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해결됐네.”
“별거 아니어서 다행이다. 정말로 그 부지 써도 되겠지?”
“할머니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성격은 아니잖아.”
“그건 나도 알지만, 그래도 눈치 보이는 게 있단다. 우리 루카 씨는 모르겠지만.”
소피아가 하란다고 정말 하냐는 식으로 면박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하여간 이모는 너무 생각이 많아.”
“배려심이 많다고 해줘.”
그래도 내심 그 장소가 마음에 들었던 만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루카와 투닥투닥 상대의 말꼬리를 잡으며 방을 향해 발을 옮겼다.
* * *
“부지를 정했다면서요?”
“네. 어머님께서 예전에 쓰시던 온실이라던데.”
“아, 그곳 말입니까.”
뤼디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아고, 뤼디거고 다들 말하자마자 바로 떠올리는 걸 보니 그냥 잠깐 쓰던 장소가 아닌 듯싶었다.
“어머니께서 꽃도 기르셨어요? 요즘은 꽃에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아 전혀 몰랐어요.”
“아주 옛날에……. 제가 루카보다도 어렸을 그 시절에 잠깐 돌보셨죠.”
뤼디거도 기억에 있는 모양이다. 온실에 얽힌 사연이 궁금했던 나는 뤼디거에게 소파 옆자리를 내어주며 물었다.
“어쩌다 불이 난 거예요?”
“음…….”
바로 대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뤼디거는 한참을 침묵했다. 내 질문에 자판기처럼 따박따박 대답하던 이답지 않은 긴 침묵에 당황한 나는 말을 바꿨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에요. 말하기 힘든 거라면 굳이 말할 필요 없어요.”
“아뇨.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온실에 불이 난 건, 형이 불을 질렀기 때문이거든요.”
“……네?”
갑자기…… 방화입니까?
이십여 년 전이면 요나스도 루카 또래였을 텐데……. 물론 지금의 루카는 필요에 따라 방화를 하고도 남을 성격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특이 케이스가 아니던가.
당황한 내가 입만 뻐끔거리자 뤼디거가 머쓱히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잽 없이 훅 날린 화법이었겠지. 그는 차근히 옛일을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꽤 정성껏 유리 온실을 가꾸곤 하셨죠. 죽은 바네사 왕녀를 기리며 연보라색 아이리스를 심었는데……. 온실 한가득 핀 연보라색 꽃들이 참으로 이질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수도에서 꽤 오래 머물던 요나스와 달리 제가 입대 전까지는 빈터발트에서만 머물렀던지라, 그렇게 많은 꽃을 보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뤼디거의 눈빛이 몽롱했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 마치 그때의 풍경이 비치는 듯 보였다.
“어머니께서 무언가에 그리 관심을 두는 걸 처음 보았어요. 어쩌면…… 형에게 하는 것만큼이나 지극정성이셨죠.”
뤼디거의 순위는 요나스에 이어 꽃보다도 아래였다. 그리 말하는 뤼디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모든 것을 수긍하고 받아들인 고요함이었다.
항상 뤼디거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을 소피아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그랬기에 더욱 마음 아팠다. 뤼디거 스스로가 자신의 상처를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였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소피아가 나에게 잘해주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그런 면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뤼디거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놓인 커다란 손등 위로 손을 겹치며 조심스레 그를 다독였다.
“서운하셨겠어요.”
“글쎄요……. 딱히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어머니에게 있어 소외되는 것은 저뿐만이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뤼디거는 손을 뒤집어 내 손에 깍지를 끼며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키 차이 때문에 거의 몸을 웅크리다시피 한 채였다. 그의 숨결이 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아버지도 저와 마찬가지였거든요.”
“공작님이요?”
“네. 어머니의 세계에서 아버지와 저는 항상 바네사 왕녀님과 요나스에게 밀려난 언저리에 위치할 뿐이었죠. 북부의 주인인 아버지도 그런 취급이었으니……. 그건 저에게 꽤 동질감과 안도감을 주었답니다.”
뤼디거는 나직이 웃었다. 힘이 없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돌렸다.
“그래도 공작님께서 용케 온실을 가만두셨네요.”
“그걸 손대면 어떻게 될지 아버지도 아셨던 거겠죠. 어머니의 관심이 다른 곳에 가는 것 이상으로, 어머니가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을 끔찍해하시는 분이니까.”
소피아가 막시밀리안을 버리지 못하는 것마저도 바네사 왕녀의 유언 때문 아니던가. 그녀를 계속 그의 옆에 얽어매기 위해서는 소피아 마음에 바네사 왕녀가 영원해야 하였다. 막시밀리안으로서는 기꺼이 이용하였지만 그렇다 하여 달갑지도 않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막시밀리안이 아닌 요나스가 유리 온실에 불을 지른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왜 요나스가…… 불을 지른 거예요? 제가 들은 요나스는 어머님 관심이 옮겨갔다 해서 불만을 품을 성격 같지는 않던데…….”
“불만이 아니라 화풀이였죠.”
뤼디거의 몸이 슬금슬금 내 쪽으로 기울었다. 점점 들러붙다 못해 내 품에 구겨져 들어오는 모양새였다.
평소였다면 귀찮다거나 무겁다는 핑계로 떨쳐내는데, 오늘은 쉬이 그럴 수가 없었다. 뤼디거는 그런 점에서는 정말 눈치가 빠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 이득을 한껏 취했다.
뤼디거는 내 무릎에 머리를 뉜 채 과거를 회상했다.
“말리나 왕녀는 종종 형을 수도로 부르곤 했어요. 형은 그런 특별대우 받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수도에 갈 기회가 되면 냉큼 갔죠. 왕궁에서 다들 형을 예뻐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형은 자신이 왕족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어요.”
뤼디거는 남 이야기하듯 말했다. 형제였지만 요나스와 뤼디거의 대우는 같지 않았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그의 아픔에 조용히 손수건을 덮듯 손으로 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선왕 전하를 처음 만나고 나서 그 환상이 깨졌죠.”
“아.”
선왕이라는 말에 대충 짐작이 갔다. 나는 탄식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