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82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 외전 4화
“당시 선왕께서는 패트릭 전하께 왕위를 넘기고 한동안 두문불출하셨거든요. 그러다가 오랜만에 블루옌으로 귀환하셨죠. 요나스는 선왕께서 바네사 왕녀를 특히 아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기대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다들 바네사를 닮았다며 치켜 세워주지만, 결정적으로 그 연보라색 눈동자만큼은 물려받지 못했다. 그리고 선왕에게는 그 연보라색 눈동자만이 애정의 모든 의미였다.
“선왕께서는 입담이 굉장하신 데다, 어린애라고 해서 봐주실 분도 아니죠. 정확히 뭐라고 쏘아붙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로 굉장히 수치스러웠던 것 같아요. 형은 잔뜩 씩씩거리면서 빈터발트로 돌아왔죠.”
“그 화풀이를…… 유리 온실에다 했다는 거예요?”
뤼디거는 나를 올려보며 눈을 깜빡였다. 수긍의 뜻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하필 그 온실이었던 거예요? 바네사 왕녀를 기리는 곳이라? 하지만 바네사 왕녀가 남긴 것이 한두 가지도 아니고…….”
“바네사 왕녀의 것은 그가 손댈 수 있는 게 아니었죠. 하지만…… 어머니의 유리 온실은 온전히 어머니의 것이었으니까요.”
말문이 막혔다. 요나스가 천하의 불한당이라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형은 연보라색 눈동자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뤼디거가 손을 뻗어 내 뺨을 매만졌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내 눈 밑을 쓸어내며 읊조렸다.
“신분, 외모……. 자신이 뭐든 갖고 태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맞닥트린 좌절이었으니까요.”
“보통 좌절한다고 해서 남의 것을 불싸지르진 않아요. 그게 어머니의 소중한 물건이라면 더더욱요.”
“알아요. 안 그래도 당시에 그걸로 형과 싸웠거든요. 내가 처음으로 형을 때렸죠.”
“어릴 때 아니었어요? 많이 맞진 않았어요?”
“그때도 형은 싸움을 잘 못 했거든요.”
한 대도 안 맞았어요. 뤼디거는 거들먹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허세라고 생각했을 텐데, 뤼디거라서 신빙성이 더해졌다.
“형이 혼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만, 제가 형을 때린 건 분명 혼날 일이었어요.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아무 말 없이 지나갔어요. 생각해 보면 좀 넋이 나가 계셨던 거 같기도 하고. 아직도 기억나요. 타오르던 불과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어머니…….”
아마 그 뒤로 소피아는 더 이상 온실을 가꾸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온실을 보는 것조차 힘들어 했을 수도 있고.
막시밀리안은 소피아의 손이 닿은 곳을 제멋대로 치우는 이가 아니니, 그렇게 외면당한 유리 온실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게 된 것일 터였다.
“뤼디거 씨도 엄청 상심하셨나 봐요. 형에게 처음으로 덤볐을 정도였으니.”
“그러게요. 저도 그 당시에는 제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유를 잘 몰랐어요. 뒤늦게서야 깨달았죠. 제가 그 온실을…… 꽤 좋아했다는 걸.”
뤼디거의 손이 내 뺨을 지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잘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헤집고 들어온 그의 손가락에 금방 헝클어졌다.
“가끔 어머니 몰래 기웃거리면서 본 게 전부지만, 그 온실에 펼쳐졌던 연보라색 아이리스 꽃밭이 제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맞닥트린 봄의 한 자락이었다는 걸…….”
그의 손이 내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지분거리는 손길이 다정하면서도 집요했다. 그의 눈동자에 일순 모닥불의 불티가 튄 듯 열기가 치솟았다.
“그래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놀랐습니다.”
“저는 또 왜요?”
갑자기 화제가 나로 튀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눈만 깜빡이자, 뤼디거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이리스 요정의 현신인 줄 알았거든요.”
“시장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요정이 어디 있어요. 하여간 농담도 참.”
뤼디거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 나는 깔깔 웃으며 그의 팔뚝을 내리쳤다.
우리가 결혼한 지가 언제인데 이 사람은 아직도 이런 남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게나 한다.
몇 년이 지나도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데, 나중에 호호 할머니가 되면 부드럽게 넘길 수 있으려나……. 아니, 애초에 그때까지 주접 떠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뤼디거라면 할 것 같단 말이지.
그런 내 고민을 조금도 모르는 뤼디거는 볼멘소리로 투정했다.
“농담 아닌데.”
“알았어요, 알았어. 이건 요정님이 내려주는 선물.”
나는 쪽 소리가 나게 뤼디거의 만질만질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뤼디거는 자기 이마를 몇 번 매만지더니, 돌연 벌떡 일어나 나를 덮쳤다.
“꺅!”
“제 요정님은 참……. 사람 안달 나게 하는 재주가 있군요.”
뤼디거의 손이 슬금슬금 내 발목을 매만졌다. 나는 뤼디거의 손을 찰싹찰싹 때리며 발버둥 쳤지만, 나를 가둔 그의 품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뤼디거는 연신 내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최대한 요리조리 그의 입술을 피하며 외쳤다.
“요정님한테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요정님은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 아닙니까. 제 소원을 들어주셔야죠.”
“요정한테 그런 소원을 품는 건 요정 모독죄거든요?”
“빈터발트는 죄악에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그게 자랑이에요?”
말싸움은 결국 어처구니없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이 폭주 기관차처럼 논리를 전개하는 뤼디거에게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패배한 요정님은 덩치 큰 어른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흑흑.
* * *
그날은 그렇게 흐지부지 넘어가기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소중한 곳을 내가 차지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피아가 그곳을 치우는 것과는 별개였다. 일단 다른 곳도 알아보겠다며 뤼디거에게 보류해 뒀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건지, 소피아가 돌연 티타임에 나를 불렀다.
“뤼디거가 말한 모양이로구나.”
“…….”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소피아는 잠시 창밖을 보더니,
“그 뒤로 내 취미가 꽃에서 보석으로 옮겨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니?”
“아뇨.”
“딱 그 정도였어. 결국 나는 꽃을 좋아했던 게 아니라, 바네사 왕녀님을 추모할 방법으로 꽃을 택한 것일 뿐이었으니까.”
나는 애꿎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소피아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를 고요히 시선에 담더니, 이내 드문 미소를 띠며 읊조렸다.
“그래도 뤼디거는 생각보다 그 온실을 좋아했었어. 맨날 거기에 알짱거렸지.”
“그랬나요?”
“내가 없는 새 정원에 몰래 들어갔다가 나오는 모습을 몇 번이나 들켰는지 몰라. 내가 모르는 척해서 뤼디거는 자기가 들킨 줄 모를걸.”
뤼디거는 가끔 어머니 몰래 기웃거렸다고 했지만, 그 가끔이 생각보다 자주 있었던 듯싶었다. 소피아는 과거를 떠올리며 회한에 젖었다.
“그냥 당당히 들어가도 되는 걸, 내가 못 들어가게 할 줄 알았었나 봐……. 생각해 보면, 내가 뤼디거에게 같이 온실을 둘러보자 말이라도 했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나는 지금이나마 모자 사이를 붙여보려 넌지시 말했지만, 소피아는 손사래를 쳤다.
“됐다. 내가 걔를 모르니? 걔는 이제 나와 같이 온실을 둘러보는 것보다, 너랑 같이 붙어 있는 걸 더 좋아할 거야. 제 아비랑 똑같아서 말이야.”
“하하…….”
모자 사이가 가까워지기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나는 조급해하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찻잔에 입술을 댔다.
“그나저나…… 그렇게 온실을 좋아하더니, 뤼디거도 아이리스의 요정을 만난 모양이로구나.”
“풉!”
차를 들이켜기가 무섭게 요정 운운하는 소피아의 말에 나도 모르게 차를 뿜어버릴 뻔했다.
간신히 그런 대참사는 면하였으나, 사레가 걸렸는지 한참을 콜록대었다.
“도대체 그……. 그 아이리스의 요정은 뭐예요? 뤼디거 씨도 그 이야기 하던데.”
이 지방에 내려오는 동화 같은 건가? 나만 모르는 거야?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소피아가 실금 같은 미소를 지었다.
“별거 아니란다. 내가 예전에 그 아이에게 지나가듯 해준 이야기야……. 나는 내 아이리스의 요정을 만났으니, 너도 언젠간 네 아이리스의 요정을 만나게 될 거라고.”
그것참, 메르헨적인 비유네요…….
삭막하다 못해 칼로 찌르면 피도 안 나올 것 같은 모자가 운명의 상대를 그런 귀여운 호칭으로 부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어쩌면 그 작은 호칭이 소피아가 어린 뤼디거에게 건넨 자그마한 애정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나는 서투르기 짝이 없는 눈앞의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피아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다시 부지에 관한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하여튼, 날 생각해서 그 부지를 포기한 거라면 그러지 말라 해주고 싶구나. 그곳에 실내 운동장을 만들어서 네가 좀 더 자주 올 수 있다면 나도 좋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자주 올게요.”
“기꺼이 와줬으면 한다는 뜻이야. 중요한 건 꽃이 아니라, 내 추억을 기릴 수 있는 대상이니까.”
소피아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가끔 그녀가 바네사 왕녀에게 품는 집요하고도 깊은 감정을 생각하면 아득해질 때가 있었다.
소피아도, 막시밀리안도 이렇게 보면 참으로 닮은 꼴이다. 그 자식인 뤼디거의 애정이 가끔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득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싶었다.
하지만 싫진 않았다. 오히려 노골적일 정도로 명쾌한이 감정에 이제 푹 젖어버렸다. 뤼디거의 기억상실 이후 얼마나 조마조마했던가.
그때는 그리 마음 졸였는데, 이제는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나는 설핏 웃으며 소피아에게 답했다.
“항상 기꺼이 오고 있어요. 제가 빈터발트로 오는 날을 얼마나 기대하는데요.”
“하여간 말은.”
소피아가 그리 말하며 눈을 흘겼다. 소피아야말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 기쁜지 입꼬리가 올라가며 그녀의 마른 뺨이 움푹했다.
* * *
일 년 뒤, 다시 빈터발트로 돌아왔을 때는 그럴듯한 실내 운동장이 생겨 있었다.
야구까지는 힘들어도 간단한 캐치볼 정도는 할 수 있는, 체육관 정도의 크기와 꽤 높은 층고에 나는 감탄했다. 바닥도 탄력 있는 단풍나무를 이용해 수평을 잘 잡아둔 것이 신경을 많이 쓴 듯했다.
뤼디거는 공사를 책임진 빈센트보다도 더 뿌듯한 얼굴로 나에게 체육관을 설명했다.
“여기서 매일 루카랑 캐치볼 해야겠어요.”
“나는 빼줘.”
“운동해야지, 루카. 여기서 테니스 하면 딱 좋겠다.”
“아,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루카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결국 같이 어울려 줄 게 뻔한 일이었다.
뤼디거가 날 위해 지어준 체육관이라지만 굳이 나만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다 같이 운동하는 걸 선호하는 타입이고, 관심을 가지는 저택의 아이들을 불러다가 같이 공놀이를 하곤 했다.
항상 춥고 고된 빈터발트의 환경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공놀이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된 아이들은 깜짝 놀랐다.
나는 내가 빈터발트에 없는 동안에도 체육관 문을 닫지 말아 달라 빈센트에게 청했고, 그 덕인지 아이들은 한 해가 다르게 실력이 쑥쑥 늘어 있었다.
그리고 훗날, 우리 딸 루도비 카는 체육관에서 걸음마도, 뜀박질도 뗐다. 첫 공놀이도, 그리고 시합에 나가기 전 훈련도 그곳에서 하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뤼디거는 실내 운동장을 만들기로 한 자신의 결정의 뿌듯함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나 또한 대만족이었다.
뒤늦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선왕이 그제야 자기도 왕궁에 실내 체육관을 만들 거라고 주장했지만, 왕궁 부지에 마땅한 땅이 없어 기각되었다.
선왕은 정원이라도 들어내려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다. 선왕은 급한 대로 왕궁 근처의 땅이라도 사들이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뤼디거가 타운하우스 근처에 근사한 제2의 실내 체육관을 만든 뒤였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선왕이 체육관을 짓도록 가만히 두었다. 자고로 체육관이란 다다익선이니,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 좋은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