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8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 외전 8화
“이크, 엄마다. 아빠, 나 이만 가볼게요!”
루도비카는 거북이라도 된 것처럼 목을 쑥 집어넣고는, 복도의 눈치를 보며 후다닥 줄행랑 쳤다.
타닥타닥, 아이의 잘은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결국 유디트에게 들켰는지 짤막한 잔소리가 오갔다. 뤼디거는 풍경처럼 울리는 유디트와 루도비카의 목소리를 들으며 작게 웃음 지었다.
오래지 않아 뤼디거의 집무실에 유디트가 찾아왔다. 유디트는 한숨을 쉬며 창틀에 걸터앉았다.
“나 초콜릿 하나만 줘요.”
“여기.”
칭얼거리는 모습이 딸과 똑 닮았다. 뤼디거는 픽 웃으며 유디트의 입술에 초콜릿을 물렸다.
유디트는 우물우물 초콜릿을 먹으며 뤼디거에게 물었다.
“루도비카가 좋아해요?”
“당연하지. 초콜릿을 먹는 그 순간은 하늘이라도 날 것 같던데.”
뤼디거는 아까를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루도비카에게는 엄마한테 비밀이라 신신당부했지만 뤼디거가 감히 유디트 허락 없이 일탈할 수야 있겠는가. 루도비카에게 초콜릿을 준 건 당연지사 유디트와 암암리에 합의된 일이었다.
당근과 채찍. 유디트 표현대로라면 굿캅스와 배드캅스.
뤼디거가 맡은 것은 바로 좋은 경찰 역이었다.
평소 뤼디거가 루도비카에게 머뭇머뭇하며 쉽사리 애정 표현을 하지 못하는 걸 보고, 유디트가 넌지시 가까워질 기회를 준 것이었다.
물론 뤼디거도 그 전까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노력이 언제나 그 정도에 따른 결과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변의 사랑을 받는 루도비카.
유디트와는 자주 투닥거리곤 했지만 소프트볼 연습을 비롯하여 붙어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그만큼 친밀했다.
반면 부친인 자신은…….
뤼디거는 생각보다 본인을 잘 알았다. 자신의 직선적인 성격이 딱딱한 얼굴과 결부되어 사교에 있어 별로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곤 했다.
유디트야 그럭저럭 괜찮은 제 얼굴로 사로잡을 수 있었다지만, 외모라는 것이 딸에게 친밀한 부친으로서 어필하는 종류의 것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자주 놀 수 있기만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는 군 장교로서, 그리고 대귀족이자 사업가로서 할 일이 많았다. 매일 꼬박꼬박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루도비카는 쑥쑥 자라 있고, 뤼디거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첫말도 첫걸음도 떼었다.
집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날 종일 자신을 붙들어둔 왕궁을 폭파하고 싶은 불온한 마음이 치솟았고 거의 실행에 옮길 뻔하기도 했다.
그렇게 다소 서먹한 부녀 사이를 단숨에 좁혀주는 것. 바로 초콜릿이었다.
초콜릿의 효과는 뛰어났다.
덕분에 루도비카는 스스럼없이 뤼디거에게 다가왔고, 뤼디거 또한 예전보다 부쩍 둥글고 말랑해진 말투로 루도비카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초콜릿을 남용하면 그만큼 효과가 떨어지기에, 유디트는 뤼디거를 제외한 루도비카 주변의 다른 초콜릿 공급로를 차단했다.
물론 초콜릿이 어린 루도비카에게 좋지 않다는 주장만큼은 유디트의 진심이었다.
“제가 변변찮다 보니 유디트 씨께서 이런 것까지 신경 써주 셔야 하는군요.”
뤼디거가 시무룩이 고개를 떨구었다.
밖에서는 럼가트의 장병들을 두려움에 벌벌 떨게 만드는 육군 장교였지만, 연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두 여인 앞에서는 한없이 눈치 보는 가련한 사내일 뿐이었다.
유디트는 뤼디거의 뺨을 쓸었다. 그의 짙은 구레나룻이 그녀의 손등을 간지럽혔다. 평소 피부 관리를 한 보람인지, 그의 뺨은 군인답지 않게 매끄러웠다.
뤼디거는 유디트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없었더라면 루도비카는 절 별로 안 좋아했을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유디트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뤼디거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잘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현상을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큰 결손이 있었다.
정작 자기 사랑을 받는 상대의 생각을 잘 모른단 말이지.
그게 전부 뤼디거의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은 그 무엇보다도 귀중하고 고귀한 가치를 지니는 만큼, 상대적으로 스스로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저 얼굴로 다른 감자 같은 사내들을 질투하게도 되는 거고.
유디트는 뤼디거의 높은 콧대를 손끝으로 가볍게 쥐고 흔들며 속삭였다.
“걘 날 닮아서, 결국 당신을 좋아하게 됐을 거예요. 당신이 초콜릿을 주지 않더라도 말이에요. 초콜릿은 그저 시기를 빠르게 해줄 뿐이고요.”
뤼디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청회색 눈동자가 반질하게 빛나며 유디트를 응시했다.
남들은 맹수라 알고 있는 남편의 약한 모습이 퍽 귀엽게 느껴졌던 유디트는 그의 시원시원한 입매에 그대로 제 입술을 겹쳤다.
이내 뤼디거의 입안에도 초콜릿 향이 감돌았다.
* * *
선왕, 빅토리아의 즉위로 이제는 선선왕이 된 럼가트 24대 국왕 유겐은 오늘따라 답지 않게 헤벌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항상 인상을 찡그리다 못해 입가와 눈가에 주름이 생기기도 전, 미간의 주름이 제일 먼저 생긴 이답지 않은 표정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스프 간이 너무 밍밍하다며 버럭 화를 내지 않았던가.
둔해진 혀끝을 만족시킬 만큼 조미료를 넣으면 건강에 해롭다는 의사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제비꽃 궁의 모두는 그런 유겐의 변덕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정확히 말하자면 변덕이랄 것도 없었다. 유겐은 항시 불쾌한 상태였고, 그런 그의 마음이 봄 볕에 노곤해지게 되는 것은 오로지 단 두 사람, 연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모녀를 맞이할 때뿐이었으니까.
“증조할아버지!”
“아이고, 우리 강아지!”
유겐은 두 팔 벌려 저에게 달려오는 종증손녀를 반겼다.
루도비카는 무서운 것도 없이 유겐의 목에 답삭 매달렸다. 일곱 살치고도 꽤 키가 큰 편이었던 루도비카의 무게에 선선왕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한발 늦게 방에 들어선 유디트가 그 꼴을 보곤 기겁을 하며 외쳤다.
“루도비카! 그러다 할아버지 넘어지시면 큰일 나!”
“아이고, 괜찮다, 괜찮아.”
유겐은 껄껄 웃으며 주름진 손으로 루도비카의 등을 토닥였다.
루도비카가 태어났을 당시 유겐은 100세를 목전에 둔 상태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골골거리며 유디트가 자식을 낳는 것만 보고 세상을 뜨리라 다짐했는데, 또 막상 루도비카를 보고 나니 애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은 욕망에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기어코 100세를 넘기면서 럼가트에서도 알아주는 장수인이 되었다.
유진과 유디트가 재회한 건 유디트가 성인이 되고 나서였기에, 유겐은 유디트의 어린 시절에 주지 못한 애정까지 모조리 루도비카에게 쏟아부었다.
루도비카가 아직 기어 다니던 시절, 선선왕은 루도비카와 눈 한 번 마주쳐 보겠다며 같이 바닥을 네발로 구르기도 했을 정도였다.
루도비카라면 뭐든 괜찮다 하는 선선왕의 모습에 유디트는 혀를 차며 엄히 일렀다.
“루도비카, 오늘 제비꽃 궁에 우리가 뭐 하러 왔지?”
“아, 맞다.”
유디트의 주의에 기억을 상기한 루도비카는 품을 뒤적였다.
“증조할아버지, 초대권이에요.”
루도비카는 머리를 꾸벅 숙이며 초대권을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선선왕은 껄껄 웃으며 초대장을 받아 열었다.
초대장의 가운데에는 ‘럼가트와 보아통의 소프트볼 친선경기 유소년부’라고 멋들어지게 적혀 있었다.
밑에 선수 명단이 있는데, 그 중 한 자리에 루도비카가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도 나가는 거야? 그래서 연습하느라 이렇게 새까맣게 탔구나?”
“어때요? 완전 쎄 보이죠.”
루도비카가 우쭐하며 답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클로이도 소프트볼을 하느라 피부가 건강하게 그을린 편이었는데, 루도비카는 항상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어 했다.
“건강해 보여서 좋구나. 역시 건강한 게 최고지.”
“히히.”
루도비카는 뿌듯이 웃었다.
세 사람은 마주 앉아 그간의 소소한 근황을 주고받았다. 정확히는 루도비카를 사이에 앉힌 채, 루도비카를 주제로 유디트와 유겐이 대화하는 것에 가까웠다.
루도비카는 제가 아는 내용이 있으면 슬쩍 끼어들었다가, 아니면 다시 탁자 위의 다과로 주의를 돌렸다.
선선왕이 루도비카를 위해 엄선해 둔 군것질거리다. 루도비카는 유디트의 눈치를 보며 하나씩 몰래몰래 집어먹었다. 다과 그릇이 점점 비어져 갔다.
유디트는 그런 루도비카의 행동을 훤히 들여다보았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원래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가서는 먹는 것 갖고 타박 주는 게 아니니까.
선선왕은 자신이 신경 써 고른 과자를 게 눈 감추듯 먹는 루도비카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잘 먹고 잘 자라는 것만으로도 기특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준비된 다과 거리가 전부 루도비카의 위장으로 들어갔다. 주의를 돌릴 다른 것이 없다 보니 금세 지루해졌다. 루도비카는 슬쩍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엄마, 나…….”
“그래,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루도비카가 어딜 가고 싶어 하는지 뻔했다. 왕궁에는 루도비카 또래인 빅토리아 왕녀의 장녀. 엘리자베스가 있었고, 둘은 꽤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유디트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루도비카는 히히힛 웃으며 의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선선왕이 아쉬워하며 루도비카를 잡았다.
“과자가 부족해서 그래? 내 좀 더 내오라 하마.”
“안 돼요, 오늘 많이 먹었어요.”
유디트가 냉정하게 잘랐다.
루도비카는 제 엄마가 오늘 너그러이 많이 봐준 것을 알았다.
이 이상 과자를 먹고 싶다 주장했다가는, 혈중 콜레스테롤이 어쩌느니 포화지방이 어쩌느니 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잔뜩 늘어놓으며 한 달간 간식을 금지할 게 분명했다.
루도비카는 어렸지만 손절할 타이밍은 기가 막히게 알았다. 루도비카는 발뒤꿈치를 들어선 선왕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손을 붕붕 흔들며 방을 뛰어나갔다.
“증조할아버지, 저 대신 엄마랑 놀고 있어요!”
루도비카는 꼬장꼬장한 제 종증조할아버지를 어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도비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주름진 뺨이 씰룩이며 미소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