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187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 외전 9화
유겐은 벌꿀색 눈동자로 루도비카의 뒷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우려스럽게 중얼거렸다.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맨날 뛰어다니는 애인데요. 안 넘어져요.”
유디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유겐은 걱정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세상의 온갖 걱정을 끌어모았다.
“그래도 시합이 코앞인데,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냐.”
“말이 시합이지 친선경기인걸요. 그리고 애들은 원래 조금은 다치면서 크는 거예요.”
유디트는 충치와 내장 비만에는 엄격한 엄마였지만, 외상에는 다소 무덤덤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애가 얼마나 시합을 기대했는데, 못 나가면 서운하지 않겠느냐.”
“내년도 있고, 기회는 많은걸요.”
유디트는 여유로이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태연할 것만 같은 그 모습에 유겐은 나직이 혀를 찼다.
“어떻게 해가 갈수록 더 능구렁이 같아지는지 모르겠구나.”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걸지도 모르죠. 아니면 할아버지에게 익숙해진 걸지도. 별로예요?”
그러며 샐쭉 웃는 얼굴은 아까 방을 뛰쳐나가던 루도비카와 똑 닮아 있었다. 유겐은 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별로기는. 내 이제 널 말로는 이기질 못하겠구나.”
“가족인데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어요. 한 번씩 주고받는 거지.”
유디트는 여전히 잔잔히 미소 띤 채 유겐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유겐은 뜨끈한 차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시합이라니, 너무 이르지 않을까?”
“나이가 좀 어리긴 한데……. 그만큼 재능이 있고 체격도 좋아서 괜찮을 것 같아요.”
유소년부 대회라고는 하나 보통 출전 나이 대는 열 살 이후였다.
하지만 루도비카는 사정이 달랐다.
럼가트에서 직계 왕족을 제외한다면 제일 고귀한 핏줄을 타고났기에 특별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철저한 실력 위주의 선발.
오히려 루도비카가 제대로 쥐고 태어난 것은 금수저가 아닌 근수저였다.
과거 선수 생활을 했던 전생보다도 더 재능이 뛰어나다 스스로가 평한 유디트의 육체. 그리고 럼가트에서 몸 쓰는 일이라면 따를 사람이 없는 뤼디거.
두 사람의 자식이니 타고난 체격이며, 운동신경이 오죽했겠는가.
그 결과, 루도비카는 벌써 제2의 클로이라 불리며 자질을 뽐내고 있었다.
조금의 걱정도 없는 유디트의 모습에 유겐은 나직한 한숨과 함께 팔걸이의자의 두툼한 등받이 쿠션에 몸을 기댔다. 그는 자신의 의자 팔걸이에 올려 있는 유디트의 손을 토닥이며 덧붙였다.
“네가 알아서 잘 결정했을 거라 믿는다.”
유디트는 해사하게 웃었다. 유디트가 그리 웃을 때마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그레타의 미소가 아련하게 그 위로 겹쳐졌다. 선선왕의 초점이 잠시 멀어지듯 흐려졌다.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해.”
“왜요?”
“내 인생에 있어 후회는 그레타를 찾아가지 않은 것뿐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더구나. 더 나이를 먹고 약해져 가니 하루하루가 후회야.”
“뭐가 그렇게 후회스러우신데요.”
유디트의 연보라색 눈동자가 걱정을 담아 깜빡였다. 유겐은 손을 들어 유디트의 뺨을 쓰다듬으며 나약한 제 속내를 고했다.
“내가…… 너희 결혼하기 전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결혼하고 나서도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유겐이 뤼디거를 유디트의 진정한 반려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참으로 오래 걸렸다. 지금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저런 ‘만약’을 입에 담다니, 유디트는 깜짝 놀랐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는데.
하지만 유겐은 노쇠해졌다고는 하나 아직 정정했다. 유디트는 불안스레 그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그러면 좀 더 오래 루도비카를 볼 수 있지 않았겠느냐. 어쩌면 그 아이가 결혼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고집이라면 럼가트에서 당해낼 자가 없는 유겐이 인생에서 무릎 꿇고 제 결정을 번복한 것은 단 두 번.
하나는 유디트요, 다른 하나가 바로 루도비카였다.
루도비카의 경우는 유겐의 마음을 돌리게 하려 그 어떠한 것도 한 적이 없기에 더욱 그 의의가 컸다.
유디트는 유겐의 후회로 얼룩진 벌꿀색 눈동자를 고요히 응시하며 덧붙였다.
“허튼 생각 하지 말아요.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고요. 좀 더 일찍 애를 낳았다면 그 아이는 지금의 루도비카가 아니었을 거예요.”
잘못하면 루도비카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수도 있다. 항상 사람은 더 좋은 미래만을 그리며 과거로의 회귀를 덧그리지만, 세상사 일이 그렇게 형편 좋게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그리고 막상 루도비카가 결혼할 때가 되면, 할아버지께선 저 결혼할 때랑 똑같이 반응할걸요? 결사반대하겠죠.”
“그거야, 뭐…….”
유겐이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뤼디거 씨랑 루카도 분명 가세할 거고……. 어휴, 저는 진짜 감당 못 할 거 같아요.”
저 세 사람이 편을 먹고 루도비카의 결혼을 반대할 거라고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유디트는 먼 훗날 제 딸의 연애 전선에 잠시 묵념했다.
루도비카의 결혼을 어떻게 반대해야 할지 생각하니 유겐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유겐의 눈동자가 잠시 반짝였다.
“너는 항상 그렇게 어리석은 내 눈을 번쩍 뜨게 해주는구나. 내가 이리 행복한 것도 다 네 덕이다.”
“그러니 건강하세요. 후회 백 날 하는 것보다 건강 챙기시고, 오래오래 사시는 게 더 긍정적이라고요.”
“알았다, 알았어.”
유겐은 껄껄 웃었다.
말은 건강하시라 했지만, 내심 유디트는 유겐이 제 아들인 패트릭보다도 더 오래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빅토리아에게 이양한 뒤로 유유자적 휴가를 즐기고 계시니, 또 모르지. 선왕 전하도 선선왕 전하만큼이나 장수하실지도.’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구나. 패트릭과 약속이 있어.”
예전이었다면 유디트를 부득부득 잡고 있었을 유겐이 먼저 유디트에게 운을 뗐다. 그러고는 변명하듯 투덜거렸다.
“조금만 늦어도 그놈은 맨날 잔소리한단 말이야.”
유겐과 패트릭, 말리나…….
예전에는 원수가 아니다 뿐이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던 부모 자식 사이였다.
하지만 다들 이제 인생의 끝에 다다른 시점에 와서 그런지, 서로 적당히 누그러질 줄 알게 되었다.
빅토리아를 비롯한 같은 항렬의 이들은 혹시나 그들이 ‘내가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지긋지긋한 저 얼굴을 더 보고 살아야 한단 말이냐!’ 하며 홀가분하게 절연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했었는데……. 천만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게 다 할아버지의 업보이신 거지요. 과거에 잔소리를 오죽하셨어야지.”
“예끼, 넌 누구 편이냐!”
“선왕 전하랑 체스 두다 막힌다고 판 엎지 마세요. 아셨죠?”
“유디트!”
유디트가 짓궂게 웃고는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섰다. 방 밖으로 내빼는 모습이 루도비카와 똑 닮아 있었다.
“나중에 또 봬요!”
유디트가 당부했지만, 유겐은 패트릭과 체스를 두다 세 판을 내리 지고는 네 판째, 기어코 체스판을 엎어버렸다.
“스스로의 무능을 인정하시지요, 아버지!”
“이런 불효막심한 놈! 어찌 이리 인정사정도 없어!”
“배운 인정이 없으니 베풀 인정도 없는 것이지요. 제가 열 살 때 아버지가 얼마나 인정사정없으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
“네가 열 살이면 도대체 몇십 년 전 일을 꺼내는 것이야?”
“흥, 제가 그 뒤로 이를 갈며 갈고닦은 실력입니다. 몇십 년 동안 숙련된 실력을 느껴보십시오!”
패트릭과 유겐은 과거를 끄집어내며 서로의 흠을 잡았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고는, 다시 주섬주섬 체스판을 정리하여 새로운 네 번째 판을 시작했다.
그렇게 오늘도 럼가트 왕실은 ‘그럭저럭’ ‘평안하게’ 굴러갔다.
* * *
루도비카의 첫 시합을 보기 위해 빈터발트에서 두문불출하던 소피아 또한 간만에 럼가트로 향했다.
당연히 막시밀리안도 함께였다. 소피아 혼자 보내는 건 그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막시밀리안의 표정은 많이 온화해졌는데, 사람이 유해졌다기보다는 모든 시간을 소피아와 함께할 수 있게 되어 만족감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추측되었다.
표정을 제외하면 막시밀리안은 참으로 변함이 없었다. 그는 제 유일한 손녀인 루도비카에게도 데면데면했고 썩 관심이 없었다.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기에 다들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신기한 것은 루도비카가 생각보다 막시밀리안에게 스스럼없다는 것이었다.
그 점이 궁금했던 유디트는 언젠가 루도비카에게 넌지시 물어 보았다.
“루도비카는 할아버지가 무섭지 않아?”
“왜 무서워?”
루도비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할아버지는 아빠랑 똑같이 생겼잖아.”
“……그렇긴 하지만.”
뤼디거는 루도비카에게 다정하게 굴고, 막시밀리안은 그렇지 않다만……. 루도비카에게 다정 함은 그리 썩 중요한 게 아닌 듯싶었다.
루도비카는 비밀을 이야기하듯 주변을 보고 목소리를 낮춘 채 유디트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만날 때마다 커다란 자허토르테를 주잖아.”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자허토르테를 좋아했던 루카의 영향인지, 막시밀리안은 꼭 루도비카를 만날 때마다 자허토르테 한 판을 들고 왔다.
빈터발트 요리사인 로라 어머니의 솜씨가 담긴 자허토르테는 다른 곳과 비교할 바 없이 커다랗고 맛이 진했다.
평소라면 압수했을 테지만, 아무리 유디트라 해도 막시밀리안의 선물을 압수할 수는 없었다. 그저 여러 번에 걸쳐 나눠 먹으라고 하는 수밖에.
루도비카가 막시밀리안을 가까이 여기는 두 가지 이유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된 뤼디거는 조금 억울해 보였다.
“루도비카가 뭘 좋아하는지 말해준 적도 없고 아버지도 딱히 관심도 없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루도비카가 좋아하는 선물을 딱 골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어머니께서 조언하신 걸까요.”
“뭐, 어린애 선물로 초콜릿 케이크는 불패의 선물이기는 하죠……. 루도비카에게는 필승의 선물이지만.”